피카소의 작품이 대부분 그렇듯이 미술사를 새롭게 쓰게 된 <게르니카>도 사생활에서 그 소재를 얻고 있다. ....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미술사에서 모든 먹이를 독점하고 작품 제작법을 일변시킨, 저 강철같은 눈초리를 느낄 수 있다. 동시에 피카소의 사악한 일면이 얼굴을 내미는 것도 사실이다. 여자들을 파멸시키고 그 잔해에서 서양미술사에 남는 훌륭한 회화를 창작한 사람이 피카소였다. .... 그러나 피카소조차도 <게르니카> 앞에서는 그 존재가 희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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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각상에서는 신비로운 생명력이 넘쳐나고 있다. 그 어떤 조각상도 모델의 개성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데 반해 네페르티티의 입술에는 살아 있는 인간의 한 조각 웃음이 묻어난다. 당장이라도 얼굴을 옆으로 돌릴 것만 같고, 콧구멍을 넓혀서 숨을 빨아들일 듯한 기색마저 감돈다. 그 멋진 목에 손을 살짝 갖다댈 수 있다면 맥박의 희미한 진동마저 전해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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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는 미소를 머금고 당신을 바라본다. "당신에 대해서 하나에서 열까지 모조리 알고 있어요"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상대는 누구일까? 이 그림을 의뢰한 늙은 남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였을까, 아니면 모나리자를 자신의 애인으로 만들었다는 권력자 줄리아노 데 메디치였을까. 어쨌든 깊이 파고들면 대답은 하나, 레오나르도에게로 다다른다. 모나리자는 자신을 응시하는 레오나르도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녀의 예리한 시선은 화가의 본심을 꿰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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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벨라스케스는 도대체 무엇을 그린 것일까? 지금까지는 우리들이 보고 있는 그 정경을 그대로 그렸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화면 밖에 커다란 거울이 걸려 있기 때문에 거기에 이 장면이 비쳤을 것이라는 구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실물과 똑같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화면의 길이 또한 조금의 오차도 없으며, 인물들의 태도와 몸짓도 진짜처럼 그려져 있다. 그렇다. 벨라스케스는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울 안의 왕과 왕비의 영상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만들기 위한 벨라스케스의 계략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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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어색함(구도의 파괴라고 해도 좋다)이야말로 작품의 시정詩情을 이루는 원천으로 고흐 작품만의 자유로운 해석의 길을 열어주었다. 가령 공중에 떠 있는 의자는 주변에 따라 좌우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고흐의 분신으로 볼 수도 있다. 혹은 쓴맛 단맛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결코 자만하지 않는 사람의 영혼에도 비유할 수 있다. 의학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있을 법한, 자기 주변과 자신의 분열된 의식의 조짐으로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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