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소외된 우리 손님들은 어느새 자기 존재감을 잊으면서 홀로 설 용기를 잃고 자포자기하기 쉽다. 그래서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가져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중략) 새로운 손님들이 오시면 항상 이름부터 외웠다. 국수집 벽에 걸린 하얀 칠판에 손님들 이름을 쭉 적어놓고, 국수집에 오시면 한 번이라도 꼭 이름을 불러드렸다. 잊어버리면 다시 물어보고 또 외우고, 또 외우고……. 처음엔 그나마 손님들이 몇 분 안 되어서 이름 외우기가 별로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손님이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이름 외우는 것을 더욱 열심히 해야 했다. “저는 식당에서 말썽 부리는 몇 사람 이름만 기억하는데…… 어떻게 다 외우세요?” 한번은 안드레아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시험공부 하듯이 열심히 외우죠. 그래야지 나한테 말을 할 거 아니에요?” --- p.53
지난 수요일 허리가 아파서 조심조심 병원으로 걸어갔다. 보통 걸음으로도 걷기가 힘들어 쉬엄쉬엄 가다가 우연히 어느 음식점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잘 보이는 곳에 “번성케 하소서”를 나무판에 새겨 걸어놓았다. 하는 일마다 뜻대로 잘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세상이 될까! 그저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지상의 천국이 지금 여기에서 시작될 수 있다. 암세포를 생각하면 쉽다. 암세포는 하는 일마다 잘된다. “번성케 하소서”라는 말 그대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암세포가 하는 일마다 잘되어서 더는 번성할 수 없을 때, 사람은 죽음으로 치닫는다. --- p.64
기섭 씨가 감기에 걸렸는지 밥을 조금 드시더니, 머뭇거리다가 쓰레기봉투 몇 장을 내밀면서 좀 사달라고 했다. 찜질방에서 하룻밤만 자면 감기가 나을 것 같다며 돈이 필요하단다. 주고받는 장사를 하려면 민들레 국수집에서 밥값도 내라고 했더니 미안하다며 그냥 가려고 했다. “기섭 씨, 찜질방비를 그냥 드릴 테니까 쓰레기봉투도 민들레 국수집에 그냥 주세요.” 잠깐 망설이던 기섭 씨가 쓰레기봉투를 내밀기에 찜질방비를 그냥 드렸다. 거래가 아닌 나눔이 이루어졌다. ---- p.125
꼴베 형제의 영치금은 몇 년째 ‘0원’이다. 자기 몫의 영치금을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할아버지 재소자에게 넣어주기 때문이다. 꼴베 형제는 종이 쇼핑백 가방을 만드는 청송교도소 제8공장 반장이다. 보통은 2∼3만 원을 받지만 꼴베 형제는 반장이라서 작업수당이 많다. 월 7만 원 정도다. 하지만 19년이나 모아온 작업수당도 ‘0원’이다. 2003년부터 민들레 국수집의 후원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꼴베 형제는 ‘배가 고프면 다른 마음을 먹고 범죄에 빠지기 쉬우니, 얼마 안 되지만 국수집 손님들 대접하는 데 보태라’며 지금까지 200만 원도 넘는 돈을 보내왔다. --- p.144
어렸을 때부터 힘든 일에는 웬만큼 익숙해져 있던 나도 가끔은 정말 일이 고될 때가 있었다. 언젠가는 하도 힘들어서 꾀를 부렸다. 다른 수사님 방에 몰래 들어가 신발까지 숨긴 채 침대 밑에서 낮잠을 잤다. 그런데 몸은 편할지 몰라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음이 부대껴서 오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할 수는 없다는 것, 둘 중에 하나는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 후 몸이 편한 것보다는 마음이 편한 쪽을 택하게 되었다. --- p.162
얼마 전 식사를 끝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루에 몇 번 식사를 하시느냐”고 물었더니 “하루에 한 번, 여기서 식사하는 게 전부”라고 했다. “국수집이 쉬는 날은 어떻게 하시냐”고 했더니 돈이 있으면 컵라면을 사먹고, 없으면 그냥 굶는다고 한다. 적어도 하루 두 끼는 드셔야 한다고, 내일부터는 오전과 오후 두 번 오시라고 당부했더니 재화 씨가 수줍은 듯이 말했다. “나보다 더 배고픈 이들도 먹어야지요.” 무섭게 으름장을 놓았다. “한 번만 오시면 앞으로는 출입금지입니다. 적어도 두 끼는 드셔야 해요.” --- p.180
한번은 서울에서 오신 처음 보는 손님이 국수집에 오셔서 음식에 욕심을 내며 듬뿍듬뿍 담았다. 다 드실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비닐 봉투에 먹던 밥을 담고 있었다.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음식을 남기면 혼나기 때문에 비닐에 싸서 밖에 나가 버리려고 했단다. 손님의 잘못을 지적하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결국 있는 욕 없는 욕 다하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끝을 맺었다. 아마 그 손님은 한동안 식사하러 오시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 잊혀질 만하면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씩 한 번 웃어주고 만다. 배고플 테니 어서 들어가 식사하시라고 하고,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시면 담배 한 대 권하면서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사람은 잘못을 하면 스스로 자기에게 벌을 내린다. 그 손님이 민들레 국수집으로 다시 오기까지 뚸음고생을 꽤 했을 테고, 그럼 스스로 받을 벌을 다 받은 셈이니 떡 하나 더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p.194
아침에 문규 씨가 대뜸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연히 아이들이 민들레 국수집 앞의 교회에 가는 것을 보았다면서, ‘민들레 꿈 공부방’은 엄연히 수녀님이 계시고 무상으로 아이들을 돌보면서 왜 아이들이 교회에 가는 것을 내버려 두냐고 했다. 교회가 아니라 당연히 성당으로 가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다. 참다운 사랑은 조건이 없는 법이라고 말해주었다. 민들레 국수집 손님들에게 신앙을 강요하거나 그 어떤 조건, 단서를 달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봉사에 조건을 달면 봉사가 아니다. 공부방 아이들이 모두 점점 밝게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국수집 손님들과 감옥에서 고생하는 형제들, 출소한 형제들이 시나브로 변하는 것에 비하면, 민들레 꿈 공부방 아이들은 기적에 가까운 속도로 변화한다. --- p.199
2003년 첫해 겨울엔 김장이 문제가 아니라 점점 늘어나는 손님들 때문에 진땀이 났다. 도저히 쌀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알음알음으로 도움을 주실 만한 몇 분에게 부탁을 드렸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상당수 난색을 표하거나 냉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말 큰 실수를 했구나 싶었다. 눈 딱 감고 민들레 국수집 문을 닫아버리면 그만이고, 책임질 일도 없었지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 끼 밥도 얻어먹기 힘든 우리 손님들을 생각했다. 우리 손님들은 얼마나 막막할까?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만석동 ‘기찻길 옆 작은학교’의 단비 아빠에게 전화를 드렸다. 100만 원을 빌려달라고 겨우 이야기했다. 공동체와 상의한 후에 연락을 준다고 하더니 잠시 후 전화가 왔다. 단비 아빠가 말했다. “저희가 회의를 했는데요. 그게…… 돈을 빌려드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뿔싸, 하는 순간. 낙담할 틈도 없이 단비 아빠가“그냥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 pp.224-225
여러 사람들이 열심히 일한 끝에 드디어 김장이 끝났다. 이번에도 역시 이웃들과 인정이 넘치도록 푸짐하게 김치를 나눴다. 크고 작은 통에 나눠 담은 김치가 자그마치 70통이 넘었다. 처음에는 김장을 한 후 저장할 곳이 없어서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좋은 김장김치 저장법을 알고 있다. 바로 민들레 국수집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것! 김장을 할 수 없는 분들께 김치를 나눠드리면, 하느님께서 잘 보관해두셨다가 다음 해에 또 모자라지 않게 주실 것이다.
이 책을 손에 든 독자는 행운입니다. 가난하지만 사랑으로 사는 한 성자를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염으로 찌든 우리 시대에 향기롭고 빛나는 영혼의 사람을, 손만 뻗으면 가까이 손잡을 수 있는 이웃으로 소개받는다는 것은 정말 멋진 행운 아닙니까? 민들레 국수집은 하느님 나라의 과방입니다. 서영남은 하느님과 내통하는 하느님의 동업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가운데 하느님 사랑의 불꽃이 꺼질 수 없음을 믿게 해주는 집입니다. 저 역시 예수살이공동체 안에서 수사님과 함께 한 것을 행운으로 고백합니다. 그의 존재가 산 위의 마을에서 지치고 나약해진 저를 흔들어 깨우고 일으킵니다. 박기호 (예수살이공동체 대표신부)
필자는 국수집 주인장이 수사일 때 인연을 맺었다. 세월이야 가거나 말거나 어찌나 한결같은지 그는 사철나무 같다. 아니 바위? 어쩌면 강물인지도 모른다. 민들레 국수집 손님들을 대접하는 웃음을 보니 알겠다. 세상을 껴안고 사람을 대하는 법을. 사람 잘 대하는 것이 사랑, 바로 민들레 국수집 방식이다. 생색 없이 내는 밥 한 그릇이 이리 시절을 흔든단 말인가. 일 년 내내 거짓이 참으로 행세하는 세상, 부끄럽다. 이일훈 (건축가)
배고픈 손님들이 언제든 무료로 식사할 수 있는, 거짓말 같은 진짜 식당의 주인공 서영남 씨.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나는 그의 열렬한 팬이다. 그가 지난 7년간 선한 이웃들과 일궈낸 밥의 기적을 통해 나의 신념은 더욱 단단해졌다. “나눔은 아름다운 습관이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민들레 홀씨하나가 바람타고 날아왔다. 씨끝이 나사처럼 생겨 땅속 깊숙이 박히기 좋겠다. 저 씨앗도 꽃이 되는 꿈을 같고 날아 왔겠지? 민들레 국수집은 민들레꽃처럼 강하고, 소박하고, 예쁘다. 밥을 준비하는 주인도 예쁘고, 언젠가 꽃이 될 밥을 먹는 사람들도 예쁘다. 우리도 이 책을 통해 민들레꿈을 갖자. 그래서 꽃이 되자! 김미화 (코미디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