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조망하다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 회갑 기념 논문집 출간!
지난 4월 7일로 회갑을 맞은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의 30여 년 학문 인생을 기념하는 책이 학고재 출판사에서 나왔다. 한국 근현대미술가론이라는 부제가 달린 『시대의 눈』은 그에게서 받은 지적 자극을 자양분 삼아 우리 미술계 곳곳에서 왕성한 연구와 비평 활동을 펼치고 있는 13명의 후학들이 엮은 논문집이다.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이자 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으로 있는 김영나 선생은 우리 근현대미술 연구의 중요한 선행 연구들로 후학들에게 많은 학문적 영감을 주었다. 근현대 한국미술과 서양미술의 교류 및 영향 관계, 일본의 근현대미술 연구, 박람회와 미술관 같은 근대적 미술 제도, 식민주의와 내셔널리즘, 미술의 전통과 혁신 문제 등에서 수행한 핵심적 선행 연구들이 그것이다. 선생은 1990년 객원교수로 일본에 머무를 당시부터 근현대미술사 관련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연구 논문들을 발표해왔다.
이는 우리 근현대미술을 연구하는 후학들이 다양한 연구 관점을 형성하고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시대의 눈』은 이처럼 김영나 선생이 한국 근현대미술 연구에 던진 첨예한 질문과 이슈들을 발판 삼아 집필한 13편의 논문들을 엄선했다. 미술사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론의 프리즘을 통해 김규진, 안석주, 정현웅, 이쾌대, 성두경, 권진규, 단게 겐조, 전성우, 백남준, 무라카미 다카시, 최정화, 이불, 유근택 등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13명의 작가와 그들의 작품 세계를 집중 탐구하고 있다.
저자들은 개체로서의 미술가가 미술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내는 파동과 간섭을 고찰함으로써 ‘개체’를 관통하는‘전체’를 조망하고자 했다. 즉, 미술의 특정한 표현 양식과 감각을 형성하는 근현대 시공간의 역동적 배치를 고민함으로써 우리 근현대미술사의 흐름을 관통하는 기본 문법을 찾고자 한 것이다. 이는 우리 근현대미술의 역사를 단순한 양식 수용의 문제로 환원하거나 민족성이나 자주성을 판단하는 척도로 재단하는 시각적 협소함을 뛰어넘어 ‘문화의 역동성’ 속에서 다층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또한 『시대의 눈』은 우리 근현대미술 연구의 정초를 다진 김영나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기념하는 책인 동시에, 미술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우리 근현대미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눈을 갖게 하는 한국 근현대미술사 교과서로도 손색이 없다. 독자들은 근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13명의 작가와 그들의 작품 세계 분석을 통해 전통과 현대의 세계관이 충돌하고, 전근대와 탈근대의 가치들이 공존하는 ‘근대’의 경험이 우리 근현대미술사를 어떻게 엮어나갔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첫 번째 마당인 ‘식민시대 한국을 살다’에서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서화가 김규진(金圭鎭, 1868~1933), 삽화가 안석주(安碩柱, 1901~1950), 삽화가 정현웅(鄭玄雄, 1910~1976) 등을 차례로 다루고 있다.「해강 김규진의 금강산 그림과 사생 정신」(목수현)은 그동안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 근대적 미술인으로서 해강 김규진의 면모를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이제까지 서예와 사군자의 대가로서만 알려진 김규진은 전통과 새로운 것의 경계에 선 작가다. 그는 1910년대에 많은 작품을 그리고 교육자로 활동했으며 사진관을 열고 서화관을 운영하는 등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개척자의 모습을 보였다. 특히 1920년대에는 필생의 역작인 창덕궁 희정당 부벽화를 그림으로써 작가로서의 역량도 발휘한다. 저자는 그 역량의 근거로 김규진의 남다른 사생(寫生) 정신을 내세운다. 미술의 근대성이 사생을 바탕으로 한 현실 감각을 한
요소로 하기 때문이다.
「대중매체의 문화 생산자, 안석주의 여성 표상」(서유리)은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와 시대일보, 그리고 조선일보 등에서 만화와 삽화를 그렸던 석영 안석주의 삶을 조망하고 그의 ‘생산물’들을 분석하고 있다. 신문의 삽화를 그렸고, 만화에도 능했으며, 에세이와 소설도 썼고, 영화까지 만들었던 안석주의 다재다능함이 수렴되는 곳은 신문이라는 ‘대중매체’였다. 아울러 그의 글과 그림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바로 근대적 대중매체의 새로운 독자이자 소비자였던 ‘여성’이었다. 저자가 보기에 안석주는 “대량 인쇄되어 새로운 소식과 정보를 읽도록 명령하는 신문이라는 뉴미디어와, 문자 문화의 새로운 주체이자 범주로서 호명된 여성이라는 키워드가 교차하는 하나의 지점”이었던 것이다.
「곡예사와 화가의 자화상: 정현웅의 일제강점기 작품」(권행가)은 월북 작가 정현웅의 일제강점기 회화 작품들을 재검토한다. 저자는 정현웅의 작품들을 친일, 좌익 같은 거대 담론으로 재단하기에 햾서 작가 개인의 내적인 시각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즉, 정현웅의 회화 작품에서 드러나는 내적 특징들을 재현된 공간과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라는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의 제국주의적 파시즘 체제에 외부적으로는 동조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민족주의와 리얼리즘을 포 기하지 않았던 소박한 리얼리스트로서 정현웅의 모습을 재조명한다.
전쟁을 딛고, 유토피아를 꿈꾸다
이 책의 두 번째 마당인 ‘전쟁을 딛고, 유토피아를 꿈꾸다’에서는 한국전쟁 시기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화가 이쾌대(李快大, 1913~1987), 사진가 성두경(成斗慶, 1915~1986), 조각가 권진규(權鎭圭, 1922~1973), 화가 전성우(全晟愚, 1934~ )를 차례로 다룬다. 일본 전후 건축의 성립에 커다란 기여를 했던 일본 건축가 단게 겐조(丹下健三, 1913~2005)도 함께 조명한다.「이쾌대 연구」(김인혜)는 한국 근대미술사상 가장 걸출한 화가 중 한사람으로 손꼽히는 이쾌대가 포로수용소에서 화가 이주영을 위해 제작했다는 교본인 『인체 해부학 도해서』를 분석한다. 저자는 이쾌대가 어떤 환경 속에서 이러한 교제작했는지 살펴보고 도해서의 내용과 미술사적 의의를 논하며, 나아가 이를 적용해 이쾌대 작품을 해석
한다. 최근에 공개된 『인체 해부학 도해서』는 화가로서 이쾌대의 탄탄한 기초 실력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뿐 아니라, 인물화를 그릴 때 작가가 특별히 고려했을 사항들을 짐작케 한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의 비극중 하나인 포로수용소 생활에서도 의연했던 작가의 인품과 교육자로서의 열정까지 읽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성두경의 한국전쟁 사진」(박은영)은 한국전쟁 당시 종군 사진기자로 활동했던 성두경의 전쟁 사진을 분석한 글이다. 성두경의 사진들은 전쟁 장면 중에서도 도시의 폐허를 재현했는데, 저자는 이 점에 주목하여 사건에 대한 기록성과 작품으로서의 예술성이라는 양면적 가치가 그의 사진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살펴본다. 특히 그 사진들에 나타난 다양한 ‘거리두기’ 효과를 분석하여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이미지가 미적 대상으로 재현되고 수용되는 방식을 분석한다.
현대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하여 이 책의 세 번째 마당은 백남준(白南準, 1932~2006),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 1962~ ), 최정화(1961~ ), 이불(1964~ ), 유근택(1965~ )에 대한 비평적 고찰을 통해 현대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한다. 「노마드적 삼위일체: TV, 부처, 백남준」(윤세진)은 백남준의 대표작 [TV 부처]를 어떤 한정된 경계 안에 갇히지 않는, 백남준 예술이 갖는 트랜스내셔널리티 혹은 노마디즘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저자는 ‘서구의 테크놀로지와 동양 정신의 만남’이라는 선언만으로 [TV 부처]의 특이성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보기에 TV와 불교의 접속은 근대적 사유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이자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하나의 반론이다. 이 글은 TV와 불교와 백남준이라는 세 항이 [TV 부처]에서 어떻게 계열화되는지, 나아가 백남준 미술의 탈근대성이 어떤 식으로 구현되는지 고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