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의 개념은 과연 최초의 죄의 개념과 동일한 것일까? 그것은 ‘아담’의 죄, 곧 인류의 타락과 동일한 것일까? 사람들은 가끔 그렇다고 이해해 왔다. 따라서 원죄를 해명하는 과제는 곧 ‘아담’의 죄를 해명한다는 과제와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 사유는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의 탈출로를 선택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해명을 해보려고 사람들은 하나의 공상적인 전제를 내세우고, 타락의 결과로서 그 전제가 상실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 그들에게 유리했던 것은 모사된 그런 전제와 같은 상태가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가 자진해서 인정한 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상실될 수 있는 그러한 상태가 과연 일찍이 존재하였느냐 존재하지 않았느냐 하는 점은 전혀 별개의 의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 상태의 존재 여부야말로 그들이 그것을 상실하기 위해서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다.--- pp. 43~44
그렇다면 원죄의 개념과 최초의 죄라는 개념의 구별은, 개인은 죄에 대한 그의 근원적인 관계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오로지 아담에 대한 그의 관계를 통하여서만 원죄에 참여한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아담은 다시금 공상적으로 역사 바깥에 놓이게 된다. 이때 아담의 죄는 과거보다 이전의 것, 즉 과거완료형인 것이다. 그러나 원죄는 현재적인 것이고 죄성이다. 그리고 아담만이 죄성에 물들어 있지 않은 유일한 인간이다. 왜냐하면 죄성은 아담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담의 죄를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원죄의 본질을 그 귀결을 통해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원죄에 관한 설명은 사유를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 p.45
우리가 ‘객관적인 불안’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사람들은 우선 저 순결의 불안에 대해 생각이 미치게 될 것이다(이 순결의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을 생각할 때, 자기 자신 안에서의 가능성의 반성이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이 “우리는 지금 다른 단계의 연구에 도달하였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도 그것은 충분한 해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객관적인 불안이라는 구별은 실로 주관적인 불안에 대한 대립을 전제하고, 아담의 순결한 상태에 있어서는 그런 것이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주관적인 불안이란 개체의 죄의 결과로서 개체 안에 생긴 불안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불안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시 논급하기로 하겠다.) 그러나 주관적인 불안이 이러한 의미로 취해지는 경우에는, 객관적인 불안과의 대립이라는 입장은 사라지고, 따라서 불안은 그 본래의 모습, 즉 주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불안과 주관적인 불안의 구별은 세계와 후대의 인간들의 순결상태를 고찰하는 장소에서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 pp. 108~109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피조물이 타락 속에 빠졌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마찬가지로 자유는 그릇된 사용이 정립됨으로써 비로소 정립되는 것이지만, 가능성의 반영과 연루 전율을 피조물 위에 던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또 인간은 종합이고 이 종합 속에서 그 양극이 정립될 뿐 아니라 그 대립의 한쪽 극단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이전보다도 훨씬 첨예화하였다고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일까? 이런 모든 것이 심리학적인 연구의 분야에서는 그 거처를 찾아볼 수 없다. 그것들은 오히려 교의학에, 즉 속죄의 교리에 속한다. 속죄를 설명함으로써 심리학은 죄성의 전제를 설명하는 것이다.피조물에 있어서의 이러한 불안을 우리는 정당하게 객관적인 불안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 불안은 피조물에 의하여 산출된 것이 아니고, 아담의 최초의 죄로 말미암아 감성이 죄성으로 떨어지고, 죄가 계속 세상에 들어오는 한 감성이 잇따라 더욱 죄성으로 떨어짐으로써 전혀 다른 빛이 피조물 위에 드리워져서 산출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견해가 이런 의미에서 역시 얼마나 눈을 똑바로 뜨고, 감성 그 자체가 죄성이라고 하는 합리주의적인 주장을 억제하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죄가 이 세상에 온 후에, 그리고 죄가 이 세상이 올 때마다 감성은 죄성이 된다. 그러나 감성은 죄성이 되는 것이지 본래부터 죄성인 것은 아니다. 프란츠 바더는 여러 차례 유한성과 감성 그 자체가 죄성이라는 명제에 항의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전혀 반대쪽인 펠라기우스주의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프란츠 바더는 그의 개념규정 속에서 인류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았기 문이다. 인류의 양적인 증가라는 규정에 있어서는(따라서 비본질적이다) 감성이 죄성이다. 그러나 개체 자신이 죄를 정립함으로써 다시금 개체가 감성을 죄성으로 만들지 않는 한 개체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감성이 죄성은 아닌 것이다.--- pp. 112~113
어떠한 개체도 어떤 역사적인 연결 안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자연법칙의 귀결은 예나 마찬가지로 지금도 타당하다. 단지 그리스도교는 저 ‘보다 많이’에서 우리들 자신이 넘어 나올 것을 가르치고, 그것을 하지 않는 인간에 대해서는 그대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판결을 내리는 점에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감성이 ‘보다 많이’로 규정되어 있는 바로 그 까닭으로 인해서, 정신이 이 ‘보다 많이’의 책임을 떠맡아야할 경우에는 정신의 불안이 더욱 커진다. 여기에서 야기되는 그 극단의 현상은 죄에 대한 불안은 죄를 낳는다는 무서운 현상이다. 만일 사악한 욕망이라든가 음욕 따위가 개체에게 나면서부터 부여된 것이라고 하게 되면, 양의성(이 양의성으로 인해서 개체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순결할 수도 있다)을 잃고 만다. 불안의 무력상태 속에서 개체는 쓰러지고 만다. 그러나 그럼으로 인해서 개체는 죄가 있기도 하고 순결하기도 한 것이다.
--- pp. 14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