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상처는 새로 구멍가게를 낸 아버지와 함께 물건을 떼러 간 길음시장통의 한 도매 상회 안에서 그어졌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누덕누덕 기운 정부미 포대에 아버지가 조금씩 골라내는 소주, 과자, 껌 따위를 주섬주섬 담고 있었다.
"어머 쟤 소진이다!"
학원으로 가던 우리 학급 반장과 여자애들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가지런하고 올망졸망한 새 운동화와 빛나는 구두들의 행렬.
숫기가 없는 나는 아이들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 아버지가 내게 다가와 알은체할까봐 그것이 겁났다, 내가 손아귀에 잡힌 과자 봉지들을 너무 세게 움켜쥐는 바람에 그 안의 과자들이 와드득 와드득 아프다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내 곁에 다가오지도 않았고 아이들이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도 고개를 푹 꺾은 채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한참 뒤 누군가 내 목덜미를 어루만져 고개를 드니 아버지가 싱긋 웃고 있었다.
세번째 기억은 고등학교 1학년 말 무렵일 것이다. 학교에서 학생저축 예금이 결산됐으니 길음시장 근처 은행에서 돈을 찾아가라고 했다. 나는 천원이 채 안 되는 돈을 타기 위해 은행 안의 긴 의자에 앉아 친구들과 함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도매상에 물건을 떼러 시장통에 들렀던 아버지가 불쑥 은행 안으로 들어와 내게 알은체를 하였다.
"아직 멀었니? 도매상에서 물건을 떼는데 셈을 해보니 값을 치르기에는 모자라서 말이야."
"……!"
아버지가 내 간절한 눈빛을 알아챘는지 한쪽으로 대여섯 발짝 어정어정 멀어지고 나자 누군가 물었다.
김소진은 정결한 사람이다. 그의 산문은 그의 심성처럼 정결하고 허튼 군더더기가 없으며 경기도 사투리처럼 아름답다. 짧은 소설은 허욕이 없고 속임이 없다. 환한 대낮 토방 앞에 놓여 있는 항아리처럼 무뚝뚝히 명백하다. 사람은 가고 복숭아꽃은 피었다 지고 또 글은 열매와 마른 씨앗처럼 남는다. 나도 남아 있다. 아, 슬프다. --- 성석제(소설가)
김소진 소설의 일관된 관심사는 전혀 인공낙원과 무관한 자리에서 삶을 일구어가는, 문명의 주변부를 그야말로 인간적 본성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한마디로 김소진은 언제부턴가 어느 누구에게서도 호명받지 못하던 스러져가는 주변부의 인간 존재에 대한 가장 충실한 서기관이자 대변인이었다. 김소진은 문명과 개념의 개입을 받고 주변부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통일성(권태와 일탈, 부정과 긍정, 금기와 허용의 변증법적 조화)에 주목하고 이 아름다운 통일성을 거울로 어설픈 개념화와 자연의 수탈로 점철된 문명의 악마적인 속성을 정확하게 비춰낸 작가였으며, 동시에 최첨단의 문화적 삶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한국문학사의 일면적인 성격을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비판한 '한국문학사의 반성적 거울'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류보선(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