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 5층 아파트
모든 것이 정지 상태로 놓여있다. 사진이 그런 줄 알았지만, 윤병임의 과천 5층 아파트는 더욱더 고요하게 정지되었다. 무엇이 이토록 침묵속으로 우리의 시선을 불러들이는가? 사진은 평화롭고 조용하며 부드럽지만, 어떤 대상에 눈길이 멈추면 깊은 생각에 잠겨 무겁게 침잠 한다. 그녀는 시선 없는 목소리를 들려준다.
버려진 것과 남아있는 것
벚꽃은 떨어지고 비워 있는 집 ‘공가’ 현관문은 굳게 닫치고, 어린이 자전거는 계단 앞에 친구를 잃은 듯 기다리고 서있다. 누군가의 기념일 이었을 화환은 햇빛에 말라 바구니채 드라이플라워가 되었다. 아파트 뒷켠 한 귀퉁이에 정성들인 텃밭에 꽂아 둔 바람개비도 멈추었다. 실내 온실에서 자랐던 식물은 마지막 가지치기를 한 듯 커다란 잎사귀 두 장 만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벌써 아파트 ‘공가’ 현관 문 앞에는 풀들이 자라고 주인 없는 아파트에 누군가 다녀간 듯 계단 위에 막걸리 한 통과 먹다 남은 참치 캔, 찢어진 태극기, 버려진 공단 이불과 배게, 망가진 우산이 버려진 듯 남아서 우두커니 기다린다.
오래된 5층 아파트는 어김없이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었으나 인적이 없고, 금이 간 담벼락에 땜 방 질이 선명하다. 멀리서 보아도 5층 자리 아파트 한 동에 위 아래 ‘공가’라는 딱지가 여기저기 붙어있어 단박에 아파트는 텅 비웠음을 알 수 있다. 베란다 창사이로 사람이 사는 흔적이 거의 없다. 몇 가구가 사는 지 세어본다. 하나, 둘. 목련 꽃에 가려서 셋쯤 되나 싶은 데 몇 집이 남지 않았다. 그나마 널어놓은 빨래도 간출해서 이웃 없는 노인이 사는 가 싶다. 이 아파트는 얼마나 오래 되었을 까? 과천에 제2 정부종합 청사가 들어서고 아파트 붐이 일기 시작한 80년대 초 지어진 5층 자리 주공아파트 30년이 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금도 살만 한 곳인데 곱게 늙었다. 101호는 굳게 닫힌 현관문 경고문에 빨간색 스프레이로 도장 찍듯 원을 그리고, 스카치 테이프로 질기게 붙어있는 e마트 선전 팜플렛 수박 사진은 고색창연하다. 창문과 베란다 유리문 마다 붉은 색 페인트 엑스 자는 왜 이리도 선명한 지. 그 흔적들은 강렬하다.
그래도 남은 사람들에게 일상은 유지되는지 공공 화단에 사적인 이불 빨래와 속옷 내의를 널었다. 아웃 집 창에 붉은색 ‘공가’ 표시는 여전히 선명하고 나무들은 초록을 물들이는데, 이삿짐사다리도 짐꾼도 사람이 없어 한가하기만 하다. 마치 아무 일이 없는 듯, 소녀는 꽃을 배경으로 셀카도 찍고, 아빠는 아이와 잠자리도 잡는다. 놀이터 앞 빈 공터에 야구(최소 9명이의 선수가 구성되어야 하는 운동경기)하는 소년 두 명. 노인들은 어제처럼 또 혼자 각자 아파트한채를 독차지 한 듯 출입구에 한가로이 앉아있다. 그들은 모두 아직 집을 비우지 않았다. 윤병임의 사진 중에서 유일하게 방에서 밖을 바라보는 노인 한 분이 있다. 그녀의 어머니다. 오래전 이곳에 이사와 어쩌면 딸을 시집 보내고 이제 혼자 되었을 지 모른다. 사진의 모든 장면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해도 보이는 것이 전부 사실대로 밝혀지지 않는다. 하물며 대상이 품고있는 사연인 들 누가 말해주기 전에는 어찌 알겠는 가.
윤병임의 사진은 그 이미지만 보면 다분히 시점이 정해지지 않은 과거다. 미래에 대한 현재의 의식작용이 없다. 다만 추측만이 부재하는 과거의 시간 속으로 흐른다. 그것은 미래가 없는 비장함 이고, 우울함이다. 사진은 비 변증법적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부재의 ‘응시’될 수도, 반사될 수도, 내면화될 수도 없는 변질된 무대이다. 아니면 부재의 죽은 무대이고 비극의 축출이다. 그것은 모든 정화, 모든 카타르시스를 배제한다. 그것은 어떤 풍경이 사연 없는 물신들과 결합 시킴으로써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을 회피 할 때에만 혹은 그것이 나를 바라보는 것을 피할 때만 관조적 풍경이 된다. 그것은 감상적으로 위안을 줄 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몽환적으로 볼 위험이 있다. 그러나 윤병임의 사진 속 버려지고 남겨진 흔적과 오브제들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다. 떠나야할 것을 알면서도 박제된 듯, 정지된 모습으로 붙박인 장면들은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의 도피, 차라리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윤병임의 사진은 조심스럽고 정직하다. 그것은 부드러운 톤과 밝은 색채의 나른함으로 스며들어 다리에 힘이 없는 상태를 만든다. 그 흔한 재개발 사진들이 보여주는 장면들 즉, 사회적 메시지만 집착하는 과잉정보와 불필요한 대상의 몸짓과 목소리가 없다. 그녀의 사진프레임은 장면 속 대상들을 무심한 듯 바라보면서 대상 스스로가 말을 하도록 섬세하게 다루었다. 조용히 멈춰 서서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 대상의 목소리에 노출되면 우리는 그 장면에 붙들릴 수 밖에 없다. 목소리의 출처는 어쩌면 시작되는 모든 것은 그 끝이 있다는 자연적 허무의 긍정이라면 좋겠지만, 개발의 경제적 논리가 만든 욕망의 결과 기억이 소멸되는 장소에서 산다는 현대인의 불행이다.
이영욱(상명대 사진과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