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활하지 못한 마녀에게’의 세계관에 대하여
근대 유럽과 유사하지만 과학 기술이 유달리 발달한 가상 세계가 배경으로, 이야기의 주 무대는 잉그람(Ingram)이란 왕국이다. 당연히 인간이 이룩한 인간의 왕국이지만, 개중에는 마법이란 특별한 힘을 사용하는 이들이 인간과 섞여 살아가고 있다. 한때는 인간과 지난한 천년전쟁을 벌였되 이제는 화해한 마녀·마법사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별의 축복을 받아 마법을 부린다. 마법이란 인간의 빛나는 이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신기로운 힘. 따라서 마녀·마법사들은 자신에게 마법이란 축복을 내려준 별을 탄생성(誕生星)으로 여기며 마치 신을 받들듯 신봉한다. 마녀는 마법을 부릴 때마다 별에게 기도드리며, 별은 성심 가득한 기도를 들어 마법을 이루어 주는 셈이다.
예컨대 주인공 디아나의 탄생성은 암흑의 별 칼리스토, 헤스터 솔의 탄생성은 별들의 왕 둘시네아, 세드릭 자일스의 탄생성은 천칭의 별 사피겔이다. 이렇듯 모든 마녀와 마법사는 자신에게 축복을 내려 준 별을 탄생성으로 삼는다.
잉그람(Ingram).
대륙의 중부를 차지한 국가이자, 요사이 문화적 경제적으로 황금기를 맞이한 왕국. 잉그람인은 자국을 그리 평하며 자긍심을 드높이지만, 기실 왕국의 위상 따위 마녀에겐 철저하게 관심 밖의 문제였다. 본디 마녀란 자신을 둘러싼 아주 협소한 세상만을 아끼는 족속이기에, 그들이 일말의 애국심도 지니지 않은 것은 일견 자명해 보였다.
그러니 마법 사회에서 평범하게 자라난 마녀 디아나가 잉그람을 별 볼 일 없는 나라로 치부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른 마녀들이 으레 그러하듯 디아나는 지금까지 잉그람이란 나라에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스승 탓으로 여태 수많은 도시를 전전했으나, 새로이 이사한 도시에 주의를 기울인 적도 거의 없었다.
어차피 도시란 크든 작든 대체로 엇비슷하지 않던가. 이러한 무관심은 작금 툭스베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나…….”
그리하여 툭스베리 기차역. 디아나는 성급한 일반화의 대가로 통렬한 자기반성을 하고 있었다.
한낮의 볕이 내리쬐는 기차역이 하얗게 바스라졌다. 반질반질한 대리석을 곱게 쌓아 올린 벽면으로 햇살이 투명하게 반사되고, 꼭대기에 걸린 시계가 황금빛 위용을 과시했다. 심지어는 기둥마다 잉그람이 자랑하는 아홉 성인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이렇듯 분에 맞지 않게 으리으리한 기차역을 세운 여파로 도시가 처참히 파산하여 시장이 내쫓겼다는 내막을 물론 디아나는 알지 못했다.
‘기차역이란 원래 이렇게 웅장한 곳인가?’
디아나는 유달리 눈길을 끄는 금빛 시곗바늘을 관찰하며 시시한 고민을 했다. 실은 기차역에 와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은 바바라 자일스가 손수 이동마법을 부려 준 덕분에, 기차로 꼬박 닷새가 걸리는 거리도 눈 깜짝할 새 도착했었다. 애당초 어지간한 마녀들은 굳이 기차를 탈 이유도 없었다.
“예쁜 아가씨. 꽃 한 송이 사세요.”
그때, 꽃바구니를 든 어린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꽃이요?”
“예. 오늘 아침에 딴 꽃이어요. 어여쁘지 않나요?”
소녀는 그리 말하며 샛노란 튤립을 내밀었다. 가만히 꽃을 살펴보던 디아나가 홀린 듯이 지갑을 꺼냈다.
“두 송이만 줘요.”
늘 디아나를 수전노라고 야유하던 채스터티가 듣거든 아주 대경할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토록 바라던 독립의 날. 디아나는 절로 씰룩거리는 입가를 간신히 잠재우며 값을 지불했다. 물론 거스름돈을 꼼꼼히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디아나는 신문지로 엉성하게 싼 꽃송이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채스터티 덕분에 일찍 도착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여유 부릴 상황도 아니었다. 기차표를 구입하고, 오킹엄행 기차를 찾아 올바른 좌석에 앉고, 기차표를 검표받고…….
앞으로 할 일을 찬찬히 꼽아 보던 중, 디아나는 불현듯 이상한 기분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보니 역내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부인과 신사로 가득했다. 사내들은 하나같이 정장에 실크해트를 착용했고, 여인들은 팔랑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굽이 족히 한 뼘은 될 법한 구두를 신었다. 저마다 부유함을 자랑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디아나는 새삼 자신의 차림을 살펴보았다. 스스로 여기기에도 참으로 초라한 행색이다. 철 지난 외투에 무릎 아래로 껑충 내려오는 잿빛 원피스. 심지어 굽 낮은 단화는 앞코가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다.
“……언제 적 옷이길래…….”
“……유모가 입는 옷이 딱 저러했는데…….”
문득 어디선가 조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또래 여자애들이 디아나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수수하다 못해 궁상맞은 차림을 비웃는 것이 틀림없었다.
물끄러미 그편을 쳐다보던 디아나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고인물처럼 침잠된 마법 사회에서 나고 자란 디아나는 인간 사회의 유행을 이해하지 못했다. 철 따라 달라지는 무늬나 장신구는 관심 밖이었다. 그러니 볼품없는 차림새로 화려한 공작새 무리에 둘러싸인 지금도 그녀의 마음을 휘감은 것은 수치심이 아니라, 겉가죽만 그럴듯한 치에게 보내는 멸시였다.
도대체 누가 누굴 깔본단 말인가.
디아나는 무거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가볍게 손짓했다.
그즈음 창틈으로 새어 든 봄바람이 별안간 짓궂은 마녀의 손길을 받아 흉포하게 화했다. 딱하게도 조롱할 상대를 잘못 찾은 이들은 갑작스러운 돌풍을 맞아 고래고래 비명을 내질렀다. 치맛자락이 죄 말려 올라가 흉한 꼴을 보인 것은 덤이었다.
디아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뒤편에서 훌쩍이는 소리며 웅성거리는 소란이 차츰 멀어졌다.
바야흐로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대.
과거에는 부유한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기차도 이제는 민중의 손을 타고 있었다. 매끈한 선로가 어느덧 잉그람의 드넓은 국토를 동서남북으로 가로지르고, 거대한 비행선은 상용화를 꿈꾸며 매일같이 공장에서 발전을 거듭했다. 과학의 산물이 비로소 만인에게로 퍼져 가고 있었다.
그리 인간의 이성이 날로 솟아오르는 시대건만, 그럼에도 여전히 맨손으로 불을 피워 내고 주문으로 비를 내리는 전능한 자들이 있다. 빛나는 이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드높게 발전한 과학으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지고의 재능.
예부터 사람들은 두렵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우러렀다.
때로는 신으로, 때로는 귀신으로 불린 그들은 마녀(魔女)였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