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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 암살사건
DVD

트로츠키 암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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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2011년 05월 26일
시간/무게/크기 103분 | 크기확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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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출연진 소개 (2명)

줄거리 줄거리 보이기/감추기

* 줄거리 *
< 작품소개 >

제목 그대로, 트로츠키 암살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관객은 내내 트로츠키가 죽는 순간을 기다린다. 영화는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보여주지만 끝내 '왜' 그랬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왜 그랬는지 물을 필요가 없음을 설명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인지도 모른다. 트로츠키는 죽었고,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모든 무덤엔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는 산 자가 만들어낸 것일 뿐.

트로츠키의 부인은, 트로츠키에게 '잭'(암살자)이 아무래도 벨기에가 아닌 스페인 출신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잭은 여자 친구의 혐오감 섞인 불평에도 불구하고 투우를 본다. 누군가를 죽일 이유가 없는 자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 어쩌면 붉은 피가 좋아서. 이제와 보면 붉다는 것도 부질없는데.

트로츠키와 잭은 그렇다 쳐도, 들러리처럼 보이는 여성들의 대사가 의미심장하다. 잭의 여자 친구는 동공을 열고 두 번이나 묻는다. "나는 누구지?" "당신은 누구지?" 자신을 이용할 작정을 하고 있는 남자에 대한 여자의 공허한 직감인양.
트로츠키의 부인은 흘러가는 말처럼, '유다에게 권력이 있었다면 배신자 취급은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유다는 트로츠키일 수도 있고 잭일 수도 있다. 권력 없는 두 배신자의 기묘한 만남은 유다는 있는데 예수는 없는 시대의 신경질적인 불안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만듦새가 재밌다. 이상한 순간에 컷을 자르고, 카메라를 향해 빨간 스프레이를 뿌린다. 촌스럽지만 사랑스럽다. 지글지글거리는 화질마저도. 옛 사진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듯, 보고자 하는 자가 있는 옛 영화는 모두 곱게 발효되어 자동적인 발사믹 향이 나는지도.

1917년 혁명 이전의 트로츠키
1879년 11월 7일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야노브카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트로츠키의 본래 이름은 레온 다비도비치 브론스타인 (Leon Davidovich Bronstein)이었다. 그런데 같은 해 12월 트로츠키의 숙적 스탈린이 태어난 것은 흥미로운 역사의 우연이다. 브론스타인은 1896년 오뎃사의 고등학교를 끝으로 공식 교육을 마쳤다. 브론스타인은 대학 문턱에 가보지 않고 맑스주의를 말 그대로 독학했다. 브론스타인은 1897년 ‘남부러시아 노동자 동맹’을 조직했으며, 1898년 그 죄목으로 짜르에 체포되어 1900년 시베리아로 유형을 갔다. 유형을 떠나기 전 모스크바 감옥에서 그때까지 활동을 같이 해온 연상의 맑스주의자 소콜로브스카야와 결혼했다. 그러나 브론스타인은 1902년 소콜로브스카야의 권유로 그녀와 두딸 (지나이다와 니나)을 남겨둔채 이르쿠츠크로 탈출했다. 이 때 브론스타인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오뎃사 감옥에서 알았던 간수의 이름인 트로츠키로 바꾸었다.

트로츠키는 1902년 10월 런던에 가서 레닌을 처음 만났으며 레닌의 추천으로 러시아사회민주당의 기관지인 ‘이스크라’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03년 트로츠키는 파리에서 나탈리아 세도바 (Natalia Sedova)를 만나 다시 결혼을 했으며, 그들 사이에 두 아들 (세도바와 세르게이)이 태어났다. 트로츠키는 1903년 7월30일에서 8월20일에 걸쳐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제2차 대회에서 처음에는 레닌을 지지하는 데 앞장 서, ‘레닌의 곤봉’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지만, ‘이스크라’ 편집진에서 악셀로드, 베라 자술리치, 포트레소프를 제외시키려는 레닌의 ‘냉혹함’에 실망하고 멘셰비키에 가담했다. 1904년 트로츠키는 제2차 당대회의 경험을 바탕으로 레닌의 당조직론을 ‘대리주의’라고 비판하는 팜플렛『우리의 정치적 과제』를 악셀로드에게 헌정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트로츠키는 러시아로 돌아가 26세의 나이에 페테스부르그 소비에트 의장으로 활약했다. 트로츠키는 이 죄목으로 짜르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다시 유형에 처해졌지만 곧 다시 탈출했다. 트로츠키는 투옥 중 집필한 『평가와 전망』에서 1905년 혁명의 교훈을 토대로 하여, 러시아에서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여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를 수행하고 영속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과제를 완수해야 하며, 이는 혁명의 세계화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영속혁명론을 정식화했다. 1910년 트로츠키는 비엔나에서 ‘프라우다’를 창간했지만 재정문제로 이 잡지는 실패했다. 레닌은 같은 제목의 잡지를 이듬해부터 페트로그라드에서 발행했다. 1912-1914년 트로츠키는 발칸 전쟁의 종군기자로 활동했으며, 1915-1916년에는 멘셰비키와 협력하여 파리에서 ‘나셰 슬로보’를 발행했다.

1917년 혁명 이전의 트로츠키는 레닌의 볼셰비즘에 반대하는 활동으로 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트로츠키주의자들도 거론하기를 꺼려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볼코고노프는 트로츠키 저작 중 최상의 부분들은 1904-1917년 사이에 씌어졌다고 주장하고, 특히 레닌의 조직론은 결국 1인독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우리의 정치적 과제』를 높이 평가했다. 콕스도 비슷한 맥락에서 트로츠키가 1917년 이후 레닌주의로 다시 회귀한 것은 결정적인 오류라고 주장한다.


10월혁명과 1920년대 당내투쟁기의 트로츠키
미국 뉴욕에서 1917년 2월혁명의 소식을 들은 트로츠키는 5월 러시아로 귀국한다. 볼코고노프는 러시아로 돌아온 트로츠키가 당시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고 쓰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17년 2월혁명 발발시 뉴욕에 머물고 있던 트로츠키가 쓴 글들은 같은 시기 레닌의 ‘먼 곳으로부터의 편지’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취지의 주장들로 채워져 있다. 트로츠키는 귀국후 ‘메츠라욘카’ (Mezhrayonka)라는 중도주의적인 ‘러시아사회민주당 지구간 조직’에서 반전과 임시정부 타도를 선동하다가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해 투옥된다. 1917년 8월 볼셰비키 제6차 대회는 옥중에 있던 트로츠키를 볼셰비키당에 재영입하고 볼셰비키 중앙위원으로 선출했다. 출옥한 트로츠키는 1917년 9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7년 11월 7일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으로 무장봉기를 조직하여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를 타도했다. 이 날은 마침 트로츠키의 38세 생일이기도 했다. 무장봉기 일자의 확정을 포함한 10월혁명의 구체적 준비와 관련하여 레닌과 트로츠키간에 의견 차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볼셰비키가 즉각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레닌의 결의안을 트로츠키가 지지했다는 점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되었다. 볼코고노프는 트로츠키가 10월 무장봉기에 반대했다는 스탈린주의의 신화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쓴다. “10월혁명에 관해 아직 끈질기게 남아있는 신화의 하나는 트로츠키가 10월 무장봉기를 지연시키려 했다는 주장이다. ... 하지만 실제로 트로츠키는 레닌이 집착했던 무장봉기에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트로츠키는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다만 트로츠키는 봉기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주도하에서 소비에트 대회의 결정에 따라 수행되기를 바랐을 뿐이다. ... 트로츠키는 소련 역사가들이 반복해서 주장해 왔듯이 봉기를 지연시키려 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봉기를 더 광범위한 인민의 지지에 기초지움으로써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 (Volkogonov 1996; 76,78.) 아울러 볼코고노프는 10월봉기를 조직한 것은 스탈린의 이른바 ‘당중앙’이라는 주장을 논박하고, 10월봉기는 실제로 트로츠키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군사혁명 위원회’에 의해 조직되었음을 재확인했다. “이른바 ‘당중앙’이란 군사혁명위원회의 부서로 만들어진 순전히 명목상의 조직이었다. 그 활동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사실 그러한 기록이 발견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의 활동이란 것이 있었다 해도 그것은 실제로 군사혁명위원회에 의해 수행되었기 때문이다.” (Volkogonov 1996; 79) 스탈린 자신 1918년 10월혁명 1주년 기념 논문에서 트로츠키가 10월혁명에서 수행한 결정적 역할을 시인한 바 있다.

트로츠키는 10월혁명 직후 케렌스키와 크라스노프의 반란 진압을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혁명정부에 볼셰비키 이외의 정파도 참여시키자는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의 제안을 논파하여 레닌으로부터 “트로츠키보다 더 나은 볼셰비키는 없다”는 격찬을 듣기까지 했다. 10월혁명 성공후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내무인민위원직을 제안했지만 트로츠키는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이를 사양했다. 만약 트로츠키가 ‘악마같은 레닌주의의 적’이라는 스탈린의 중상이 사실이라면, 당장 레닌이 왜 10월혁명 직후 트로츠키에게 소련정부의 장관직을 맡을 것을 권유했는지가 중대한 의문으로 남는다. 트로츠키는 소련정부의 초대 외무인민위원에 취임하여 1918년 1월 브레스트 리토브스크에서 독일과의 휴전협상을 주도했다. 이 때 레닌은 독일의 휴전조건을 수용하자고 주장하고 부하린은 반대로 혁명전쟁을 주장했지만, 트로츠키는 강화와 전쟁을 동시에 반대했다. 1918년 트로츠키는 다시 전쟁인민위원과 최고전쟁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어 적군을 창건하고 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레닌은 막심 고리키에게 “트로츠키말고 단 1년에 모범적인 군대를 조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내게 한 번 말해 보시오”라고 할 정도였다. 1919년 3월 코민테른 창립대회에서 트로츠키는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코민테른 선언문을 기초했다.

1920년말 백군의 궤멸과 함께 내전이 종식되었다. 1921년 1-2월 노동조합의 자율성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서 지노비에프와 스탈린은 레닌 편을 들어 트로츠키의 노동조합의 국가기관화론에 반대했다. 이 당시 레닌은 노동조합은 관료적으로 왜곡된 국가에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내전후 레닌보다 앞서 신경제정책의 도입을 주장했다. 1921년 2월 크론슈타트에서 수병들이 반볼셰비키 반란을 일으켰지만 3월 유혈 진압되었다. 트로츠키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크론슈타트 봉기의 진압을 트로츠키가 직접 지휘했다면서 트로츠키의 잔인한 성격을 강조하지만, 이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트로츠키는 크론슈타트 봉기를 진압해야 한다는 중앙위원회의 결의안에 찬성했을 뿐이다. 크론슈타트 봉기가 진행되는 중에 열렸던 소련공산당 10차 대회는 레닌의 신경제정책의 채택과 함께 분파결성의 금지를 결의했다. Reiman (1992)은 1920년대 트로츠키의 반스탈린투쟁의 패배 원인은 제10차 당대회의 분파결성 금지 규정에 기원한다고 분석했다. 분파결성 금지 규정을 준수하면서 이미 당을 장악한 스탈린 분파에 대한 투쟁을 수행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1922년 3-4월에 열린 제11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는 노동자반대파에 맞서 레닌을 지지했다. 이 대회에서 스탈린은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 레닌은 이 당시 트로츠키에게 자신에 다음가는 서열의 직책이며 레닌의 권력 승계가 보장되는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Sovnarkom) 부의장을 맡으라고 권유하지만, 트로츠키는 이를 다시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고사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트로츠키의 반스탈린투쟁을 단순한 권력투쟁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1922년 11월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반관료주의, 반스탈린 투쟁을 위한 ‘레닌-트로츠키 블록’을 형성하자고 제안했다. 레닌은 1922년 12월 25일자 유언장에서 “트로츠키 동지는 현재 중앙위원회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이다”고 평가하고, 1923년 1월 4일 스탈린을 서기장 직에서 축출하라는 권고를 그의 유언장에 첨가했다. 1923년 10월 트로츠키는 지노비에프-카메네프-스탈린의 이른바 ‘3두마차’가 주도하고 있던 당의 관료제화를 비판하는 서한을 당에 보냈다. 트로츠키의 『새로운 노선』을 지지하는 ‘46인 서한’이 발표되었다. 모스크바 당조직 선거에서 좌익반대파가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결과는 그들의 패배로 조작되었다. ‘3두마차’는 스스로 고참 볼셰비키 즉 레닌주의로 자처했으며 이에 대립되는 경향에 트로츠키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기 시작했다. 1923년 안토노프 오브센코와 무랄로프 등 몇몇 군고위 장성들은 트로츠키에게 스탈린 도당을 타도하고 당내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제한된 군부쿠데타를 제의했으나, 트로츠키는 비합법적 폭력을 사용하여 당내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이에 응하지 않았다. (Broue 1992; 20) 1924년 1월 제13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무정부주의적 멘셰비키이며 볼셰비키의 조직노선을 부정했다고 비판했다. 제13차 당대회 결의안은 좌익반대파가 볼셰비즘을 수정했으며 레닌주의로부터 이탈한 쁘띠부르주아적 편향이라고 비판했다.

1924년 1월 21일 레닌이 사망했다. 스탈린은 계략을 써서 당시 조지아에 있던 트로츠키가 26일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Broue 1992; 20) 레닌 사후 ‘3두마차’의 입지는 더 강화되었다. 1924년 11월 발표된 트로츠키의 『10월의 교훈』은 ‘3두마차’가 오래 전부터 준비한 트로츠키 제거를 위한 공격이 개시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그들은 레닌의 저작들로부터 거두절미하여 발췌한 문구를 조합하여 트로츠키가 1904-1917년 노동자계급 내부에 침투한 멘셰비키 노릇을 했다고 규탄했다. 또 트로츠키는 농민의 혁명역량을 과소평가했으며 ‘공업의 독재’를 옹호했다고 비판했다. 스탈린은 더 나아가 10월 혁명에서 트로츠키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10월봉기의 핵심은 자신이 주도한 이른바 ‘당중앙’이었다고 강변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주의는 빈농의 역할을 무시하는 영속혁명론으로 특징 지워지며 볼셰비키의 철의 규율을 거부하고 레닌을 폄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레닌주의에 적대적인 사상이라고 비판했다. ‘3두마차’는 이러한 반트로츠키 캠페인을 벌이면서 트로츠키를 정부 주요 직책에서 몰아내고 당 정치국에서도 고립시켰다. 1925년 트로츠키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과 전쟁인민위원 직책에서 해임되고 한직인 ‘양허위원회’ (Chief Concessions Committee) 의장으로 밀려났다. 트로츠키는 1926년초 스탈린과 결별한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가 제안한 통합반대파의 결성에 동의했다. 통합반대파는 1926년 7월 ‘12인 선언’과 ‘83인 정강’을 발표 했으며, 10월 트로츠키를 지지하는 ‘16인 선언’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당의 출판물에는 오로지 스탈린 일파의 목소리만 게재되었다. 트로츠키는 내부의 적이며 당에 패배주의 정신을 유포시키고 분열 선동을 하면서 사회민주주의적인 제2의 당 조직을 획책했다고 규탄되었다. 스탈린은 “챔벌린에서 트로츠키에 이르는 단일 전선”이 형성되어 있으며, 트로츠키는 반볼셰비키 블록을 지도하는 야전사령관이라고 공격했다. 반면 통합반대파는 처음부터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카메네프 간의 심각한 견해 차이 때문에 강력한 반스탈린 투쟁을 전개할 수 없었다. 1926년 지노비에프는 정치국원과 코민테른 의장직에서 해임되었고, 트로츠키와 카메네프도 정치국원에서 해임되었다. 1927년 당지도부의 중국혁명에 대한 정책과 중국공산당의 국민당 입당을 비판한 트로츠키는 코민테른 집행위원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1927년 11월 15일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는 당의 통일에 반대하는 분파 투쟁을 지도하고 부르주아 지식인들과 연계하여 새로운 반레닌주의 정당을 결성하려했다는 죄목으로 출당되었다. 1928년 1월 트로츠키는 중앙아시아의 알마아타로 유배되었다. 6월 둘째딸 니나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1929년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소비에트 권력에 대항하는 반혁명시위를 주도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했다는 죄목으로 소련에서 추방했다. 트로츠키는 그해 4월 터키의 마르마라 해의 프린키포 섬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소련 각 도서관에서 트로츠키의 저작들은 사라졌으며, 각종 사진, 그림, 영화에서 그의 얼굴은 삭제되었고 역사책에서 그의 이름은 지워졌다. 이제 트로츠키는 오로지 악의 화신으로만 언급되기 시작했다.

1940년 멕시코에서 살해되기까지 트로츠키의 반스탈린투쟁
1929년 4월 제16차 당대회는 제1차 5개년계획을 결정했으며, 12월 스탈린은 신경제정책의 종언을 선언하고 강제 집산화를 시작했다. 트로츠키는 소련 국외 추방에까지 이른 스탈린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반스탈린주의 투쟁을 국제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죽이지 않고 국외추방한 것은 자신의 최대의 실수였다고 실토했다. 1929년 7월 트로츠키가 편집한 『반대파 회보』 (Bulletin of the Opposition) 제1호가 베를린에서 출판되었다. 1930년 4월에는 반대파 국제사무소가 파리에 설치되었다. 트로츠키는 그 해에 자서전 『나의 생애』를 베를린에서 출판했다. 1930년 11월 중국 공산주의자 첸뚜슈가 트로츠키를 옹호하는 편지를 썼다. 트로츠키는 1931년 『러시아혁명사』를, 1932년 『스탈린주의 날조학』을 출판했다. 1932년 2월 스탈린은 트로츠키 가족 모두의 소련국적을 박탈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했으며 트로츠키의 첫째 딸 지나이다가 베를린에서 자살했다. 1933년 7월 트로츠키는 히틀러의 집권을 조장한 코민테른의 정책의 파산을 보고 제4인터내셔날이 창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3년 7월 트로츠키는 터키에서 쫓겨나 프랑스로 망명지를 옮겼다. 1934년 6월 트로츠키는 그의 측근들에게 프랑스 사회당 (SFIO)에 입당하라는 이른바 ‘프랑스 전환’이라고 이야기되는 ‘입당전술’을 권유했으며 이 문제를 놓고 국제좌익반대파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1935년 트로츠키는 프랑스에서 쫓겨나 노르웨이로 망명지를 다시 옮겼다. 1936년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이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프랑코의 쿠데타로 내전이 시작되었다.

트로츠키는 1936년 그의 최후의 명저 『배반당한 혁명』을 탈고했다. 노어로 집필된 『배반당한 혁명』은 탈고 후 먼저 불어로 번역되어 1937년 출간되었다. 트로츠키의 측근에까지 침투한 스탈린의 첩자는 『배반당한 혁명』의 원고 일부를 몰래 복사하여 스탈린에게 보냈다. 스탈린은 그 책에서 트로츠키가 소련 인민에게 ‘정치혁명’을 선동하는데 경악하여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물리적으로 절멸시키기로 결심했다. “(스탈린의 첩자) 지보로브스키의 간계로 『배반당한 혁명』의 원고는 1937년 여름 파리에서 출판되기 전에 스탈린의 책상 위에 있었다. 그 책에서 트로츠키의 ‘정치혁명’에 대한 호소가 스탈린에 준 효과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는 스탈린이 대숙청을 단행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었다. ... 『배반당한 혁명』은 스탈린에게 트로츠키가 진정한 위협이라는 것을 최종적으로 확신시켜 주었다.” (Volkogonov 1996; 370, 371) 1936년 8월 모스크바에서 첫 번째 조작재판이 열려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스미르노프 등이 처형당했다. 이 재판에서 검사 비신스키는 트로츠키가 백군의 앞잡이이며 소비에트 권력의 최악의 적이며 소련에 아직 남아있는 착취계급의 찌꺼기들을 조직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의 첫 번째 처 소콜로브스카야는 시베리아로 유형에 처해 몇해 뒤 처형당했다. 1936년 10월 뉴욕에서 트로츠키 방어위원회가 열렸으며 같은 시기 보르쿠타에 유배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4달간 계속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1937년 1월 트로츠키 부부는 멕시코 대통령 라자로 카르데나스 (Lazaro Cardenas)가 발급한 비자로 노르웨이를 떠나 멕시코 코요아칸에 있는 화가 디에고 리베라 (Rivera)의 집으로 망명지를 옮겼다. (이 카르데나스 대통령은 얼마 전 멕시코시티 시장으로 당선된 쿠오테목 카르데나스 (Cuauhtemoc Cardenas)의 아버지이다.) 1937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두 번째 조작재판에서 라테크, 퍄타코프, 무랄로프 등이 처형되었다. 소련에 있던 트로츠키의 둘째 아들 세르게이와 조카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1937년 3월 미국의 저명한 교육학자 존 듀이 (John Dewey)를 위원장으로 하는 모스크바 재판 합동조사위원회가 조직되었다. 1937년 6월 적군 총사령관이었던 투하체프스키가 반란 음모죄로 처형되고 25,000명 이상의 군간부들이 숙청되었다. 1937년 12월 듀이 위원회는 모스크바 재판이 트로츠키와 그의 첫째 아들이며 국제좌익반대파의 주요 지도자인 세도바에게 뒤집어 씌운 죄목들에 대해 그들이 무죄라고 평결했다. 1938년 2월 트로츠키의 첫째 아들 세도바가 파리에서 트로츠키주의자로 위장한 스탈린의 첩자에 의해 독살되었으며, 트로츠키의 형 알렉산더 브론스타인은 모스크바에서 처형당했다. 1938년 3월 세 번째 모스크바 조작재판에서 부하린, 류코프, 야고다가 처형되었다. 같은 시기 보르쿠타에 유형된 트로츠키주의자 수천명이 집단처형당했다. 보르쿠타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벌인 처절한 투쟁은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에도 기록되어 있다. 1938년 9월 트로츠키의 동지들은 제4인터내셔날의 창립을 선언했다. 1939년 트로츠키는 리베라의 처 프리다 칼호 (Frida Kahlo)와 염문 때문에 리베라의 집을 나와 비에나로 거처를 옮겼다.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조약 발표후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련사회의 성격을 관료적으로 타락한 노동자국가로 규정한 트로츠키를 비판하고 그 대신 국가자본주의론, 관료집산주의론 등을 주장하면서 국제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분렬은 더욱 심화되었다.

1940년 5월 스탈린의 비밀경찰은 멕시코의 스탈린주의 화가 시퀘이로스 (Siqueiros)를 앞세워 트로츠키 부부가 잠자고 있던 침실에 200발 이상의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이튿날 스탈린에게 보내진 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작전 수행. 결과는 후에 보고.” 1940년 8월 20일 트로츠키의 여비서 실비아 아겔로프를 이용하여 트로츠키에 접근한 스탈린의 자객 라몬 메르카데르(Ramon Mercader)는 서재에 있는 트로츠키의 머리를 등산용 도끼로 찍었으며 트로츠키는 이튿날 사망했다. 1940년 8월 24일자 ‘프라우다’는 트로츠키의 사망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지지자중의 한 사람에 의해 자신이 그 동안 가르쳐온 암살과 배반의 방법에 의해 살해되었다. 트로츠키는 노동자계급의 적으로 죽었다.” 그러나 볼코고노프는 이와 같은 트로츠키 사망에 관한 소련공산당의 공식 주장을 부정하면서 트로츠키 살해를 교사한 것은 바로 스탈린 자신임을 많은 미공개 비밀자료에 근거하여 입증했다. 볼코고노프에 따르면, 메르카데르는 스탈린의 비밀경찰로부터 거사후 안전도피 보장을 받고 트로츠키를 살해했으며, 당일 트로츠키의 집 대문 옆에는 메르카데르를 미국으로 태우고 도피할 자동차가 시동을 건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 (Volkogonov 1996; 468)

볼코고노프에 따르면 스탈린은 이미 1931년 트로츠키를 없애라는 지령을 내렸다. 1931년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에 붉은 잉크로 다음과 같이 휘갈겨서 정치국원들에게 회람시켰다. “수신: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포스티세프, 세르고, 안드레에프, 쿠이비셰프, 칼리닌, 보로실로프, 루즈타크. 나는 트로츠키, 그 흉악한 갱 두목, 멘셰비키 협잡꾼의 머리를 ECCI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를 통해 짓뭉개야 한다고 생각한다.” (Volkogonov 1996; 439에서 재인용.) 트로츠키의 “머리를 짓뭉개” 죽이라는 스탈린의 지령은 9년 뒤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정확하게 실행되었다. 스탈린의 지령을 받아 트로츠키 암살을 총지휘한 소련 비밀경찰 수도플라토프 (Sudoplatov)는 1939년 봄 스탈린이 자신에게 직접 다음과 같이 지령했다고 증언했다. “전쟁이 다가 오고 있다. 트로츠키주의는 파시즘의 공범이 되었다. 우리는 제4인터내셔날에 일격을 가해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 그 머리를 잘라야 한다.” (Volkogonov 1996; 456에서 재인용.) 볼코고노프는 스탈린이 1930년대 그의 정적들을 트로츠키주의로 몰아 대량 학살하고 트로츠키까지 살해한 것은 트로츠키에 대한 단순한 보복 차원에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트로츠키와 그의 추종세력을 진정으로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 제작노트 >

1924년 Lenin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을 때 Lenin의 다음 후계자가 될 만한 사람이 2명 있었는데 한명은 Joseph Stalin 그리고 다른 한명은 Leon Trotsky 였다.
처음엔 Trotsky가 더 유리 했지만 Trotsky보다 휠씬 교활한 Stalin은 Trotsky보다 더 빨리 정권을 잡았고 그 결과 Trotsky는 러시아에서 추방되었고 Stalin은 Hitler가 죽인사람 보다 더 많은 러시아인을 죽이며 러시아의 독재자가 된다.
하여튼 추방당한 Trotsky는 멕시코로 망명 하게 되고 멕시코 망명시절 정원에 있는 부인을 보며 Trotsky는 유언장을 적는데 그 유언장의 마지막이 그 유명한 "인생은 아름다워" 였다.
개인적으로 Stalin 보다 Trotsky가 러시아를 위해 더 좋은 지도자가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의 유언장에 적힌 말에서 그가 인간과 인생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줄거리 >

스탈린에 의해 정적으로 몰려 소 연방에서 축출된 공산주의 이념의 창시자 트로츠키(리처드 버튼 분)는 멕시코로 망명을 하게 되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스탈린을 향한 비방과 정치적 행보를 멈추지 않는다. 이에 적개심을 품은 스탈린은 여러 차례 그를 제거하기 위한 암살 시도를 한다. 안가에서 언론과 매스컴을 통해 정치적 행보를 멈추지 않던 그에게는 그의 사회주의 이론을 추앙하는 무리와 세력들이 그를 보호, 지지하고 있었다. 프랭크 잭슨(아랑 들롱 분)은 그의 정부 지타 사무엘스(로미 슈나이더분)가 트로츠키와 가까운 관계임을 이용하여 그에게 접근하지만 이미 적대 세력에게 암살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트로츠키를 암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트로츠키를 숭배하는 사회주의자임을 가장하여 이론과 사상을 논의 및 자문을 구하는 핑계로 수차례의 접근을 시도하던 프랭크 잭슨은 결국 서재에 있는 그를 흉기로 암살하는데 성공을 하게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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