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각 소장 왕실보첩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이다. 집중 보관했던 왕실보첩이 그대로 장서각에 전수되었기 때문에 보첩 자료가 매우 다양하다. 또 다른 특징은 연속성이다. 왕실보첩은 지속적으로 수정 보완이 이루어졌는데, 장서각에는 수정 보완되어 편찬된 보첩들이 대부분 연속적으로 남아 있다. 특히 조선 후기 보첩이 간행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왕실보첩들이 대부분 보존되어 있어 조선 초기의 보첩 편찬 체제가 후기에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주요 소장처의 왕실보첩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는 장서각은 왕실보첩의 보고라고 할 만하다. 왕실보첩에는 왕실을 구성했던 왕가, 근친인 종친, 원친인 7~9대에 이르는 왕실 후손, 그리고 왕실 인척 등의 인적사항이 담겨 있다. 이들 대부분은 조선을 이끌어간 핵심 계층에 속한다. 따라서 왕실보첩은 조선 양반사회의 구조를 밝히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또한 왕실보첩을 통해서 조선 사회의 친족의식과 족보 체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왕실보첩 조선을 다스린 거대 인맥의 기록」중에서
이본이 많지 않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홍길동전』이나 『춘향전』 같은 작품은 이본이 수십 종에 이른다. 이본이 많은 것은 민간에서 유통되고 향유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낙선재본 고전소설에는 유일본이 많다. 또한 유일본은 아니지만 이본의 수가 2~3종뿐인 작품도 적지 않다. 이본이 많지 않은 것은 우선 작품의 분량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보인다. 전자류 소설들은 책 한 권 분량이 대부분이어서 베끼거나 목판인쇄를 해도 큰 부담이 없다. 하지만 종이가 귀했던 조선시대에 방대한 분량의 낙선재본 고전소설을 베껴 쓰거나 출판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울러 궁궐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향유되었다는 것도 이본이 많지 않게 된 원인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이본이 많지 않은 것은 그만큼 작품 향유가 제한적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낙선재본 고전소설은 시중에 유통되지 않은 채 고급스러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작품들은 현대의 명품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많지는 않지만 소중한 작품이 낙선재본 고전소설이다. ---「낙선재본 고전소설 왕실, 소설에 빠지다」중에서
영조어제 가운데는 노년과 관련된 작품이 많다. 영조는 현재를 ‘모년暮年’이라 하고 예전을 ‘석년昔年’, ‘전생前生’이라 하면서 노년의 불편한 심신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부모와 자식 등 가족이 온전하던 젊은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었다. 특히 일찍부터 노환으로 집경당集慶堂에서 집무를 봐야 했던 영조는 만년에 늘 복용하였던 보약인 건공탕에 대해 애증을 드러내기도 했다. 즉, 건공탕이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공을 세웠다고 하여 본래 인삼탕인 것을 ‘건공탕建功蕩’으로 이름 지어주고, 내의원들을 ‘편작扁鵲’이라고까지 추켜세웠지만, 늘 먹다보니 질려 의원들이 나태하다고 질책하고 언제까지 건공탕을 먹어야 하느냐며 한탄하기도 하였다. 영조는 이를 확대하여 당대의 풍속을 ‘시체時體’와 ‘골동汨董’으로 비판하였다. ‘시체’는 그저 부화뇌동하여 시속에 따르는 행태를, ‘골동’은 역시 그런 자세를 고집스럽게 유지해 나가는 세태를 비판하는 용어이다. 이런 세태 속에서 영조는 늘 깨어 있고 싶어 하였다. 그러기에 스스로를 ‘자성옹自醒翁’이라 부르며 우매한 세태 속에서도 깨어 있는 인물을 자처하였다. ---「영조어제 영조의 마음에 담긴 이야기를 듣는다」중에서
이 음식발기의 마지막에 상식 음식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부묘례를 하기 전까지는 매일 혼전에 상식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상식으로 올린 음식 이름을 통해서 평소에 왕후가 먹던 음식의 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상식으로는 수라, 잡탕, 양볶기, 황산적과 잡산적, 편육, 각색좌반, 각색정과, 각색혜, 침채, 진장 등 10개의 그릇이 올랐다. 수라, 잡탕, 각색혜, 침채, 진장을 기본 음식이라고 본다면, 다섯 그릇에 여섯 가지 음식이 별도로 차려졌다. 첩수로 따진다면 5첩 반상에 해당되니, 보통 9첩 이상의 반상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과는 다르다. 현재까지 최초로 상차림을 적은 책으로 알려진 한글 필사본 『시의전서是議全書』에도 5첩ㆍ7첩ㆍ9첩 상차림만 나온다. 이 책은 1890년대에 쓰였고, 1910년대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니 9첩 이상 12첩 반상이란 개념은 조선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많다.
---「음식문화 조선왕실의 음식을 맛보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