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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즐거워

도시는 즐거워

: 서울은 나를 꿈꾸게 했다

장미자 등저 | 좋은생각 | 2011년 05월 2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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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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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1년 05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23쪽 | 568g | 148*210*20mm
ISBN13 9788991934900
ISBN10 899193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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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여관방 창밖으로는 함박눈이 내렸는데, 서울 여관방 창밖으로는 매서운 바람만 휘휘 몰아쳤다. 그날도 소주만 마시고 수면제는 먹지 않았다. 나는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다음 날, 늦게 일어난 나는 해장할 생각에 어제 그 식당으로 갔다.
“아가씨 아직 안 내려갔네? 이제 자고 나왔구나. 뭐 줄까? 시원한 북엇국 있는데 줄까?”
마치 간밤에 혼자 소주 두 병을 다 마시고 잤다는 것을, 하여 속이 무척이나 쓰리다는 것을 안다는 듯, 아주머니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주방으로 가더니 북엇국 한 상을 뚝딱 차려 내오셨다.
“무슨 일이 있는지 몰라도 술 마신다고 일이 해결되나. 살다 보면 별일 다 있게 마련이지. 이거 후루룩 먹고 속 푼 다음에 내일 새벽 노량진 수산시장에 나가 봐.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 보고 나면 기운 날 테니까. 청춘이 다시 오나 어디. 힘내서 살아야지.” ---「청춘이 다시 오나 어디」 중에서

아저씨는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다시 돌아와 하얀색 봉투를 내밀며 말씀하셨다.
“퇴직금이라고 생각해. 공부하는 데 도움될 거야. 많이 배워. 그래서 우리같이 길거리에서 일하는 사람들 자신 있게 팔 수 있는 옷 만들어. 내가 장사하면서 싼 옷 팔았어도 내 양심을 판 적은 없으니까. 공부하다 힘들면 또 찾아오고.”
봉투에는 500만 원 조금 넘게 들어 있었다. 2년 동안 일하면서 꾸준히 패션 잡지를 구독하는 모습, 잡지를 스크랩해 두는 모습을 보며 조금씩 모았다고 하셨다.
“내가 너한테 의미 있게 쓴 돈이 나중에 몇 배로 사회에 환원되지 않겠어? 그러니까 나를 봐서라도 훌륭한 디자이너 되어야 한다.”
1년 후, 나는 지금 패션 디자인 학원에 다니고 있다. 이제 나의 목표는 내가 버는 작은 돈을 의미 있게 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옷을 만들 것이며, 그렇게 번 돈을 나같이 희망 없는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데 쓰고 싶다. 꼭 이룰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동대문에서 보고 배운 희망이 잊히지 않고 내 마음에 따뜻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중국집 딸의 상경기」 중에서

어느 날 군대에 위문 봉사대가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분기마다 한 번 봉사대가 오는데, 이발사가 와서 머리를 잘라 준다고 했다. 내무반 고참한테 이발해 달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던 참에 잘됐다고 생각하며 이발소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거북이 이발관의 대머리 아저씨였다. 10여 년 만에 본 아저씨도, 나도 단박에 서로를 알아봤다. 어찌나 반갑던지. 군대에서 내 편을 만난 기분이었다.
아저씨는 분기마다 한 번 군부대를 돌아다니며 봉사 활동을 한다고 했다. 아저씨는 군기가 잔뜩 든 나를 보고 군 생활을 짐작했던 것 같다. 아저씨는 모든 장병의 머리를 깎고 마지막으로 내 머리를 다듬으며 물었다.
“많이 힘들지?” “아닙니다.” “거짓말 마라. 니 꼬맹이 때부터 머리 잘라 줬는데 표정만 봐도 딱 안다.”
별말도 아닌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울먹이는 나를 보고 아저씨는 슬며시 웃음 짓더니 스펀지로 머리를 탈탈 털어 주었다. 그러고는 머리를 감겨 주었다. 어린아이였을 때처럼.
얼마 뒤 내무반으로 가려 하자 아저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손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여 주었다.
“옛날에 백 원짜리 하나 주면 울음 뚝 그쳤잖아. 이거 가지고 고참들하고 맛난 거 사 먹어라. 지금은 힘들겠지만 여기서 겪은 일이 다 피가 되고 살이 될 거다. 지나고 보면 알게 된다.”
그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아저씨 말에 힘입어 차츰 군 생활에 적응해 갔다. ---「추억의 거북이 이발관」 중에서

주인아저씨는 마가린을 철판에 두르고 식빵을 굽기 시작했다. 노릇노릇하게 식빵이 익으면서 고소한 냄새가 나자, 나는 그만 이유 없이 울컥했다. 고개를 숙이고 토스트를 받아 한입 물자 너무 서글픈 생각이 들어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아저씨가 말을 걸어 왔다.
“많이 덥죠?” “예…….” “근데 뭐하느라 이렇게 땀을 흘렸어요? 이 더위에 뛰어다녔나 보지? 옷이 전부 젖었네.” “예. 뭣 좀 찾느라고 뛰었더니…….”
그러곤 나도 모르게 그날 있었던 일을 아저씨에게 말하고 말았다.
“요즘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야. 요즘 그런 회사들이 많은 모양이던데……. 힘내라고. 아직 젊은데 안 될 게 뭐 있고, 못할 게 뭐 있겠어요.”
아저씨는 리어카 아래에서 뭔가를 꺼내셨다. 큰 플라스틱 병에 든 얼음물이었다. “하루 종일 불 앞에서 일하려면 이게 꼭 필요해.” 아저씨는 웃으면서 큰 통을 흔드셨다. “자! 이거 한잔해 봐. 땀이 쑥 들어갈 거야. 토스트는 서비스야. 나중에 취직하면 다시 찾아와요.”
그때 먹었던 물맛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언제? 삭막하다는 느낌만 있었던 서울에서 그날 내게 전해졌던 시원한 얼음물 한잔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괜찮아. 넌 아직 젊잖아. 뜨거운 여름이 가면 선선한 가을이 오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따뜻한 봄이 오면 잊게 될 거야. 그렇지?” ---「한 잔의 용기와 희망」 중에서

그 봄 어느 날, 선배에게 밥을 살 일이 생겼다. 선배는 북악 스카이웨이에 가자 했다. 그즈음 그곳에서 회식을 했는데, 노을 지는 모습을 보며 밥 먹는 게 좋았다고 했다. 사실 내게 노을은 별로였다. 그 어떤 낙조도 대학 시절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보았던 풍경을 따라갈 순 없었다.
맛도 모르고 멋도 모르고 꾸역꾸역 밥을 먹고 구불구불 다시 북악 스카이웨이를 내려오는 길, 문득 따뜻해졌다. 불빛들 때문이었다. 서울의 야경을 이룬 그 불빛 하나하나가 다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아,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서울에도 오래전부터 터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구나. 그들도 처음엔 나처럼 추웠을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회사에서 집에서 저렇게 불을 밝히고 자기 자리를 찾아 저렇게 따뜻한 불빛을 밝히고 살아가는구나. 나도 언젠가 저들처럼 따뜻한 불빛을 밝힐 수 있겠구나.’
그 후로 내겐 어딜 가든 서울의 야경이 최고다. 마천루부터 나지막한 산자락까지 구석구석 들어앉은 집들, 한강을 길게 가로지르는 다리들이 밝힌 색색의 불빛들과 그 위를 빠르게 지나는 차들과 전철들이 꼬리를 물고 밝히는 불빛은 안온한 따스함이자 위안이었다.
---「온기를 품은 불빛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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