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의 북 호텔
북 호텔에 새벽이 깊다.
새벽은 하늘로부터 천천히 하강하여 지상의 뿌리에까지 닿는다
천사들이 북 호텔로 내려오는 새벽이면 새들의 날개 북 호텔의 환한 지붕이 된다
고독은 한 마리의 감정, 무한의 지평선 위에 걸쳐져 있다.
(…)
눈보라에 뒤덮인 새벽 열차에서 내린 손님들이 무거운 가방을 이끌고 와서는 따스한 커피로 몸을 녹이는 곳
한 잔의 술로 영혼을 덥히고 마음껏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
온 세상을 다 떠돌다 온 영혼이 허름하고 두툼한 외투 같은 육체를 걸친 채 그대로 투숙하는 곳
여기는 내 심장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새들의 북 호텔
--- p.15~17 중에서
날개 달린 발로 페이지를 넘기는 천사
여행은 왜 가느냐고 누군가 나에게 물었지. 후후. 그걸 안다면 내가 지금 이 시를 쓰고 있을까
내가 태어나 배우고 싶었던 것은 단 한 가지, 여행술
모든 것들은 움직이지, 이 세상에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지, 심지어 지금 내 감정마저도 구체적인 물질처럼 움직이고 있는 걸
마음을 열고 그런 걸 느껴봐
추상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움직임, 감정이 꿈틀거릴 땐 정말 한 마리 짐승 같다니까
--- p.36 중에서
늑대 사냥꾼
옛날, 글자가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돌멩이 편지를 보냈다고 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돌멩이 하나를 골라 상대편에게 주면 그걸 받은 사람은 돌멩이의 생김새, 색깔, 만질 때의 느낌에 따라 보내온 사람의 마음을 짐작했지
그리고 다른 돌멩이를 주워 답신을 보냈지
몇날 며칠 그 돌멩이 편지를 어루만졌을 마음이 손바닥의 체온보다 더 따스하고 눈물겹지
애틋하다는 것은 갸륵한 것이 아니고 거룩한 것
몽골에 가면 그대는 암사슴 같고 나는 늑대 같겠지, 후후
내가 그대에게 돌멩이 편지를 보내자 그대는 나에게 무를 보내왔지
그대에게 돌멩이 편지를 보내면서 내가 간절히 바라던 답신은 무엇이었을까
간절한 것은 외려 말할 수가 없지
어쩌면 그냥 그대 손을 잡고 살아 있는 동안 몽골 홉스골 호수에 가고 싶었는지도 몰라
홉스골 호숫가에 작은 천막을 쳐놓고 낮에는 나무 그늘 아래서 바람의 노래를 듣고 밤에는 등불 아래서 별빛의 문장을 읽으며 삶이라는 한 계절을 그대와 함께 보내고 싶었는지도 몰라
나는 지금 그대가 보내온 무 한 조각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지
무가 물이 되어 내 안에 갸륵한 홉스골 하나 이루려면 또 오랜 시간이 흘러가야겠지
아무것도 없는 무 아래 호수 하나 생기려면 또다시 오랜 세월이 ㄹ로 흘러와 고여야겠지
그러니 그대여, 돌멩이를 읽어줘
그것이 지금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문장이야
그리고 그대여, 읽은 돌멩이를 다시 나에게 보내줘
그게 아마 내가 그토록 바라던 답신이었을 게야
後後, 몽골에 가면 아마 그곳 사람들은 그대는 암사슴 같고 나는 늑대 같다고 말할 거야
--- p.42~44
삶의 권리
아주 넓고 긴 여름밤, 혼자서 울어본 적 있는 사람은 타인의 눈물을 이해하지
우리 모두는 행복해질 권리, 음악을 들을 권리가 있지
삶에 의미가 없을 땐 삶에서 사라질 권리 또한 있는 거지
사람들은, 사람들의 욕망이란 참 웃기고도 위대하다
내가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하지
불면의 여름밤, 세상은 언제나 잠들었거나 깨어 있지
언제나 가장 낯설고 무서웠던 건 나 자신, 순간이면서 불멸인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었던 나, 너, 우리
삶은 짧고 영롱하고 비루하다
우리는 아무튼 산다 그리고 죽는다
이것이 진실이다
--- p.81~83
리스본 공항에 착륙하기 직전의 감정
새들은 유리관 국경을 통과해 날아간다
그대를 잊어본 적 없지만 지구가 새벽 두시에 멈춘 지금 어쩌면 나는 그대를 잊을 것만 같다
새벽 두시 이후의 생은 나도 알 수가 없어서 비 오다 그친 창밖의 날씨는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아무래도 새벽 두시 이후의 그대를 잊을 것만 같다
고독이라는 질병이 창궐하는 섬망의 시간
희망과 절망은 유리관의 안과 밖 같은 것이어서 유리관 국경을 통과하는 새들의 망각, 망각의 국경을 이제 막 넘어온 열망이 멧돼지처럼 씩씩거리며 당도한 이곳
그대를 잊어야 하는 지점에서부터 지구도 멈추어버렸다
음악이 멈추고 새들의 날갯짓이 멈추고 멧돼지의 이빨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유동하는 공기들의 부동성, 움직이는 고독의 부동성, 혼동과 부동의 혼재 속에 멈춘 밤의 공중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모든 것이 함께 움직인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는 나를 고요히 접어 고독의 대항해시대로 띄운다
지금은 섬망의 계절
영혼을 삭제한 새들만이 유리관 국경을 통과해 미지의 시간으로 날아간다
--- p.116~117
다다의 별
삶이란 그대와 오래도록 입 맞추는 것이므로 나는 오래도록 삶에 대해 생각한다
또한 시간은 가고 오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인 그림자 속에 있으므로 나는 그대 형상에 걸맞는 그림자 박물관을 상상한다
장마가 시작되면 세상의 그림자들은 모두 그림자 박물관으로 간다
기억과 추억의 동시상영관인 그림자 박물관에는 태양의 오래된 기억만이 낡은 커튼처럼 나부끼고 빗방울들은 필름 속에서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흐르는 빗방울, 즉각적인 삶, 현관을 따라 흐르는 삶이라는 문제
필름 보관소, 말린 양고기 몇 점, 소금을 탄 커피, 마른 담배에서 흘러나오는 구름 몇 개, 상대적인 고통, 절대적인 그림자
그림자에도 혈관이 있어 뜨거운 피가 흐른다면 사랑에 관한 몇 개의 장면을 필름 보관소로 운반할 수 있을까, 즉각적으로 상영할 수 있을까
--- p.202~203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