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당신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정말로 그것만은…….”
“고개 좀 들어봐요.”
그가 부드럽게 어르며 얼굴을 들어 올렸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두 눈을 꼭 감은 채 바르르 떨리는 입술만 깨물고 있는데, 그가 옆에 있던 티슈를 뽑아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거봐요, 자꾸 거짓말하니까 이렇게 눈물이 나잖아요. 그러게 왜 자꾸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에 그리고 더 부드러운 그의 손짓에 눈물이 마르고 불안한 마음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현실이 다가왔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현실이.
“김도우 씨. 당신 바보예요? 왜 나 같은 여자를 마음에 두죠? 난 결혼했던 여자예요. 아이도 있고요.”
“알아요.”
“아뇨, 당신은 몰라요. 나에 대해서 당신은 하나도 모른다고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는 것도 많아요. 우선, 음, 당신은 내가 본 여자 중 가장 매력적인 여자입니다. 게다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엄마이기도 하죠.”
눈동자가 또 흔들렸다.
“고작 그런 걸로 날 좋아한다는 말이에요?”
그가 빙그레 웃었다.
“더 이상 또 뭐가 필요합니까?”
눈동자는 아까보다 더 심하게 흔들렸다. 곧 물이 차오르고 까만 동공에서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한 빛이 났다.
“당신은 참 좋은 남자예요. 그래서 더……”
그녀가 눈을 내리깔았다. 곧 또르르 눈물 한 방울이 창백한 뺨 위로 길게 흘러내렸다.
“당신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휴우, 도대체 왜요!”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난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내게 어울릴지 아닐지는 내가 결정할 문제에요. 당신은 그저 나란 남자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만 생각하면 됩니다. 알아들어요?”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난 당신한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요.”
“아까부터 그 말뿐이군요. 정말로 내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다면, 제발 그 꽁꽁 닫힌 마음을 열고 날 있는 그대로 봐줘요.”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게 바로 당신을 상처입히는 거라고요.”
갑자기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정신없이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뭔가 생각에 빠진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불현듯 승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당신은 오로지 내 걱정만 하는군요. 한 번도 당신 자신이 어떻다는 말은 한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그 말은…….”
순간 깨달았다. 그가 이미 부서진 성벽 저 안쪽에 꽁꽁 숨겨두었던, 그래서 그녀 자신도 거기에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감정을 들춰보았다는 것을.
그녀는 그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분연히 외쳤건만, 승리에 찬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그녀를 따라 일어서는가 싶더니 별안간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럴 줄 알았어, 당신도 날 좋아할 줄 알았다고. 아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는 이제 그녀의 입을 통해서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확신에 찬 어조로 계속해서 중얼거리듯 같은 말만 하더니, 껴안을 때와 마찬가지로 별안간 목이며 얼굴이며 사방에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제발요, 이제 그만 해요.”
그녀는 억지로 그를 떼어놓았다. 그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이번에는 사과드리죠. 내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순간 그녀는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그녀가 알아온 남자라는 동물이 벌이는 행동과는.
“도우 씨…….”
입술이 저절로 벌어지며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할 말이 있어 작정하고 그를 불렀던 것이 아니었기에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멍한 시선을 던지며 생각에 잠겼다. 아아, 이제 어쩌지? 그토록 견고하게 쌓아올렸다고 생각했던 성벽이 이토록 어이없이 부서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녀를 더 놀라게 했던 것은 드러난 성벽 안에 그녀가 꽁꽁 숨겨놓았던 감정의 잔해였다. 그것은 그녀가 짐작했던 이상으로 강렬하게 빛을 내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몰랐어? 네가 이 남자에게 그토록 끌렸던 걸? 감정의 잔해는 그렇게 비웃듯 속삭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빛이 나서 눈이 부셔서가 아니었다. 앞으로 들통나지 않게 그 빛을 어떻게 감춰야 할지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정말 그를 좋아한다면 이쯤 해서 그를 떠나야 했다. 만약 지금 그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그건 그를 이용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용? 이용 좀 하면 어때서? 그가 먼저 시작한 거잖아. 네가 아니라.’
마음 한구석에서 이기적이고 사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돼, 결국 이 사람은 너 때문에 상처받을 거야. 그러길 원하는 건 아니지?’
또 다른 구석에서 이타적쳀고 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상처를 받는다고? 어떻게 그걸 확신하지? 그는 몇 개월도 되지 않아 곧 너한테 싫증을 낼 거야. 그러면 그때 안녕, 하고 떠나면 되잖아.’
‘그래도 혹시…….’
‘웃겨, 그래도 혹시? 너 설마 그가 널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믿는 건 아니지? 지금 그는 단지 호기심에, 아니 어쩌면 동정심에 널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거야. 조만간 눈에 콩깍지가 벗겨지면 현실을 직시하고는 곧 널 창피해할 거야. 그건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래, 인정해. 하지만 문제는 나야. 내가 못 견딜 것 같아, 그러니 차라리 지금 떠나는 게 나아.’
‘그래, 말 잘 했어. 넌 떠나야 해. 단지 그 기간을 조금만 늦추기만 하는 거야. 지금 네 앞에 있는 남자의 눈을 봐. 오로지 너 하나 때문에 열에 들떠 있어. 하지만 언젠가 그의 눈에 지겨움이 내려앉겠지? 그러면 그때 떠나면 되는 거야. 어차피 떠날 거라면 말이야.’
이타심은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런 이타심에게 이기심은 마지막 확인사살을 했다.
‘그는 너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피난처를 제공해줄 수 있는 남자야. 재형이를 봐. 여기서 얼마나 편안해하는지. 그런데 그런 재형이를 데리고 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생고생을 해야 직성이 풀리겠어?’
그것을 끝으로 지금까지 악을 써 대며 극명하게 다른 소리를 내던 두 개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조심스레 들려왔다.
“괜찮아요?”
지금까지 내내 멍하니 바닥만 내려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도우 씨…… .”
“그래요, 말해요.”
“난 당신께 과거도 미래도 줄 수 없는 처지예요. 그런데도 괜찮은가요?”
“대신 현재가 있잖아요. 난 당신이 과거에 무엇을 했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지금 이대로의 당신이에요. 그 외에 다른 것은 원하지 않아요.”
입술이 저절로 바르르 떨려왔다. 울지 않으려 했지만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과거도 미래도 줄 수 없다는데도 그런 나를 좋아한다니, 당신은 바보야, 바보 멍청이…….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면서도 그의 품에 얼굴을 기대고 말았다.
그는 그런 그녀를 꼭 안아주며 어린아이를 달래듯 머리카락을 어루만져주었다. 참 이상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 부모를 제외하고는 이처럼 따스하게 어루만져준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쉬이……, 울지 말아요. 도대체 뭐가 그렇게 슬픕니까?”
“슬픈 게 아니라…… 두려워요.”
“두려워하지 말아요. 나 또한 미래가 두렵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공연히 움츠러들 필요는 없어요.”
그녀가 그의 가슴에서 이마를 떼었다. 아직도 눈가에는 풀잎에 맺힌 새벽이슬처럼 눈물이 매달려 있었지만 눈물은 더 이상 샘솟지 않았다. 그녀는 맥 빠진 눈으로 확신에 찬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그의 말대로 지금 이 순간만 생각하자. 과거는 떠올리지도 말고 미래 때문에 두려워 움츠러들지도 말자. 지금의 감정에만 충실하자. 마음이 가는 대로 내버려두자.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그를 사랑하자. 나중에 헤어져서도 후회 없게 그리고 그가 나와 함께했던 이 순간만큼은 절대 잊지 못하게…….
거기까지 결심이 서자 그녀는 그제야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그의 목에 양손을 두르고 항상 만지고 싶었던 그의 뒷덜미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도우 씨.”
처음에 도우는 갑자기 적극적으로 다가온 그녀 때문에 적잖이 놀랐지만, 이내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며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네, 순영 씨.”
“이제 우리 사귀는 건가요?”
그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부탁할 게 있어요.”
그는 좀 더 그녀를 자신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뭔데요?”
“이제부터 날 정순영이 아니라,”
그녀는 몹시 숨이 가쁜 듯 깊고 거친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내뱉고는 쏟아붓듯 빠른 속도로 이어 말했다.
“미노라고 불러주세요. 이미노.”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