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묻는다. 왜 문래동에서 작업하세요? 예술가들이 문래동에 많이 들어오게 된 이유가 무엇이죠? 그 질문에는 문래동에 와봤지만 도무지 이곳에서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회의와, 이렇게 낡은 공장 지대에서 무슨 작업을 하겠다고 예술가들이 들어왔을까 하는 호기심이 들어 있다. 문래동의 어떤 매력 때문에 예술가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단다. 이런 질문에는 임대료가 저렴하니까, 교통이 편하니까, 퇴락한 공단의 낡은 풍경이 좋으니까, 예술가들이 많이 있어 교류하기 좋으니까, 철공소 아저씨들의 장인적 노동이 예술 작업에 자극이 되니까 등 여러 대답이 나오지만, 어떤 답도 적절하지는 않다. 오히려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글로 쓰여질 수 없는 무언가가 예술가들을 끌어당긴 것이 아닐까. ---p.10 중에서
산업 구조의 재편과 도심 산업 시설의 수도권 이전 정책으로 철재상가 단지 안에 빈 공간이 생기고 장기간 방치되면서, 저렴한 작업 공간을 찾고 있던 예술가들이 임대 창작실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기에 정착한 예술가들은 지인의 소개를 받아 둥지를 튼 뒤 개인 작업에만 몰두했을 뿐 이렇다 할 구체적인 활동은 없었다. 그러다가 2007년부터 ‘경계없는 예술행사’와 ‘물레아트페스티벌’ 등을 통해 문래동이 알려지면서 점점 더 많은 예술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현재는 1층 철재상가를 제외한 2, 3층에 빈 공간이 드물 정도로 창작실이 늘어났다. 그 결과 약 80여 개의 창작실, 소공연장, 연습실, 전시 공간이 몰려 있고, 활동하는 예술가 숫자도 200여 명에 이르게 됐다. ---p.23 중에서
벽화의 내용은 1인 사장이자 노동자인 철공소 사장의 하루 일과를 담았다.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철재를 정리하고, 거래 업체의 주문량만큼 철재를 자르고, 자른 철재는 다시 크레인을 이용해 트럭에 옮겨 싣고 보내는 내용이다. 덤으로 사장의 낡은 승용차에도 그림을 그렸다. 벽화를 제작하는 동안 사장이 내어놓은 두어 차례의 조촐한 막걸리 파티가 있었고, 예술가들과 철공소 노동자들은 그만큼 친숙해졌다. 그 벽화를 그리는 데 들어간 돈이라고 해봤자 그저 약간의 물감 값과 막걸리 값이 전부지만, 예술가의 마음과 철공소 사장의 마음이 눈에 안 보이는 든든한 밑받침이 돼주었다. ---p.51 중에서
부엌의 존재감은 우리에게 다른 기억과 경험을 가져다주었다. LAB39에서 진행한 전시의 오프닝이나 이벤트의 요리는 늘 부엌에서 직접 준비했다. 요리에 들어간 재료비는 십시일반으로 모았다. 음식을 조리하고 나눌 수 있는 공간 때문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였고, 누군가는 문래동 사람들을 위해 요리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그렇게 음식을 통해 우리는 특별한 기억을 간직하게 됐다. 또한 BAR로 변한 부엌에서 우리는 술과 함께 흘러가는 수다를, 때로는 깊은 토론을 나누기도 했다. ---p.75 중에서
문래동에는 벽화와 설치 작품 등 예술 작품들이 많은데 화단이 뭐가 중요하냐고 물을 수 있겠다. 물론 문래동에 화단이 조성된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철공소 노동자와 예술가가 함께 만든 화단이라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만드는 과정에서 예술가와 노동자의 소통이 시작되고, 이것을 기반으로 주변 예술가와 노동자 사이의 작은 커뮤니티가 형성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작은 관계의 시작은 작업실과 철공소 사이의 작은 협력의 상황과 사건을 계속 만들어가고 있다. 예술가의 작업에 필요한 기술을 철공소 노동자에게 배우고, 철공소의 부족한 일손을 예술가가 지원한다. 한 동네에 이웃해 있지만 작업실 예술가와 철공소 노동자가 관계를 형성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세대가 다르고 하는 일이 달라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예술가와 노동자가 각자 지닌 재능과 시간을 나누고 격려하는 사소한 일에서 좋은 관계들이 형성되고 있다. ---p.110 중에서
세현정밀이 위치한 58번지 골목의 빈 철공소에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몇 개 들어서고 나서 덕진 씨는 본업보다 예술가들과 하는 놀이에 흠뻑 취했다. 골목의 쓰레기장이던 빈 공터를 화단으로 바꾸는 데에는 덕진 씨의 경험과 기술이 큰 몫을 했다. 겨울이면 화초들이 얼어 죽지 않게 온실로 꾸미는 것도 덕진 씨의 기술에 힘입어 손쉽게 해결됐다. 작업실에 난로의 연통을 설치하는 일, 얼어 터진 수도를 녹이는 일, 전기 배선을 빼 주는 일 등 문래동 예술가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들이 덕진 씨에게는 일도 아니다. 덕진 씨는 그렇게 예술가들을 도와주며 즐거워한다. 서울시 창작 공간인 문래예술공장과 문래동 예술가들이 공동으로 진행한 ‘예술 간판 프로젝트’에도 참여해서 조각 철판으로 세현정밀 철문 옆에 예술 간판을 직접 제작해 달았다. 이 간판은 철공소 종사자이자 예술가로서 덕진 씨가 만든 첫 번째 작품이다. ---p.141 중에서
개발 계획의 수립이 불가피하다면, 그 계획을 수립하고 현실화시킬 때 현재 문래동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기본 정책 과제로 삼고, 토지 소유주이든 세입자이든 문래동의 어떤 주체도 소외되지 않게 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정부 정책은 지역의 삶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폭력’이 아니라 구체적 삶과 연동돼 대안적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우리 전체의 실천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문래동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돼야만 한다. 문래동이 한국 사회의 리트머스 시험지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171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