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말해서 운명이란 ‘현실’이란 말과 동의어라네. ‘내 운명이었어’라고 말하는 건 ‘나한테 그런 일이 일어났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야. 그 나머지는 믿음이거나 미신이겠지. 사실 ‘운명’과 ‘현실’은 같은 의미지만 그저 사람들이 그 ‘현실’에 대해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는 것뿐이라네. 그 의미야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겠지. 미친 듯이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서는 흔히들 운명이라고 하면서, 평범한 일에 대해서는 운명이라고 말하는 법이 없잖은가? 가령, 조금 전에 자네는 샌드위치를 먹었지?”
“네.”
“샌드위치를 먹어야 하는 게 자네의 운명이었던 거야. 미안한 말이지만 알리스와의 만남도 크게 다르지 않아.” ---pp.56~57
그 말은 맞다. 분명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했다. 문제는, 어떻게 다른 식으로 행복을 상상할 수 있는지 아는 게 아니라 지금 현재 행복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정말이지 행복하다. 그 증거로, 나는 얼마 전에 하느님에게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단어 하나마다 나의 강렬한 느낌이 실린 하나의 문장을 말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다.
그 말을 듣자 하느님은 몹시 감동하는 것 같았다. 하느님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더구나 그 때 하느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마 내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던 게 틀림없다. ---pp.100~101
“난 자네 가족이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거라고 장담하지 않았네. 자네 혼자 행복할 거라고도 하지 않았고. 하지만, 레오가 태어나고 기쁨에 들떠있던 자네는 행복하리라 믿었지. 내가 ‘그 아이는 잘 살 걸세’라고 한 말을 자네는 ‘자네들 세 사람이 함께 행복하게 잘 살 걸세’라고 말한 것으로 알아들었을 뿐이야. 레오를 통해서 자네들이 만든 가정을 생각했기 때문이지. 오늘에야 비로소 자네는 그걸 깨달았네.”
“레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 전엔 말하자면 너무 일렀어요. 보고 싶었습니다.”
“자네가 느끼는 그 모든 고통을 나 또한 느끼자니 무척이나 괴로웠지. 나도 자네가 보고 싶었다네.”---p.133
사랑에 대해서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니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하느님이 곧 사랑이라는 것은 논리적인 귀결일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되었다. 하지만 인간이면서 인간이지 않은 자들이 있다니? 이건 완전히 새로운 폭로였다.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갖는 폭로. 이제부터 직장에서나 길거리에서 ‘인간 아닌 인간’이 있는지 찾아보아야 할 지경이다. 그런 자들이 인간 사이에 섞여 있을 게 분명하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반드시 몇 명은 그런 자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건 상당히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어쩌면 그런 자들 중 상당수는 이미 감옥에 가 있을 수도 있겠지. 연쇄살인범이라거나 강간범, 기타 등등의 극악무도한 자들. 이를테면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는 셈인가? 인간과 인간 아닌 인간. 만일 세상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많은 게 바뀔 수 있을 텐데, 청천 하늘의 날벼락 같은 소동이 빚어질 텐데……. 사형선고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지. 사형선고 폐지는 요즘 대단히 인도주의적인 행위로 여겨진다. 이유야 어찌 됐든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는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인간 아닌 자들이 있다면……. 어쨌거나 그들은 인간이 아니니까 사형 선고 폐지 따위의 논리는 의미를 잃게 될 수밖에 없다. ---p.139
쾌락의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어린 아잇적에 잃어버렸던 그 길을 따라 그렇게 나에게로 돌아왔다. 우리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점점 앞으로 나아갈수록 이곳엔 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조금 더 가면 담장이 나오고, 오른쪽엔 작은 샘물이 있고, 그 아래쪽으로는 판판한 돌멩이가 있어서 거기에 앉아 혼자 훌쩍거리곤 했던 일들이 오롯이 떠오른다.
침대에 오르자 나는 애무의 손길, 귓가에 소곤소곤 들려주는 사랑의 밀어, 목덜미를 지그시 깨무는 동작 등 쾌락의 길을 익숙하게 되찾았다. 마치 바로 전날에 그 길을 갔던 사람처럼.
나는 내가 그 길을 잊고 살 수 있었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길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그다지 변한 것도 없었다. 다만 길에서 풍기는 체취만이 예전과 다를 뿐이었다. 가을 냄새가 그렇듯이.---p.149
“아들아, 잘 들어봐. 엄마가 한 사랑 같은 건 일생에 딱 한 번밖에 없어. 아빠도 엄마처럼 사랑스런 여자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 그건 아주 귀한 다이아몬드처럼 드문 거야. 아빠가 보기에 엄마가 한 사랑을 열여섯 살 무렵에 경험하는 건 힘들 거라고 봐. 아빠는 그 때 서른 살이었으니까 지금 네 나이뢺다 딱 갑절이 많았구나. 게다가 난 정말로 행운아였어. 엄마가 한 사랑, 그건 너무 드물기 때문에, 너도 알다시피 아빠가 아직도 헤어나질 못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어. 넌 벌써 엄마가 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잖아. 그건 엄청난 행운이야. 그런 사랑이 찾아오면 넌 저절로 알게 돼. 알고 나면 더 소중해지는 법이지. 매순간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테니까. 너도 언젠가 엄마가 한 사랑을 하게 될 거야. 아빠가 장담한다니까.”
“정말?”
“정말이고말고. 그러니까 그때까지 넌 그저 행복하게 지내면 돼. 열여섯 살 시절의 풋사랑도 열심히 하고. 그 사랑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넌 순간순간에 충실해야 돼. 시간이 지나고 그런 경험들이 점점 쌓이게 되면, 네가 진정으로 사랑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pp.182~183
“인간의 삶이 앞으로도 계속돼야 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건 분명 미래에 대한 질문인데, 아시다시피 죽은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지 않습니까? 저는 영영 사라질 테고, 따라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는 거 아닙니까?”
“맞는 말일세. 모든 걸 잘 이해했군. 자네들이 죽는 순간에만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네. 자네 자신의 고유한 운명, 자네의 실존이나 흥미 따위는 고려에 들어가지 않는다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보다 훨씬 강력하고, 직접적인 무엇, 일종의 계시랄까요, 좌우지간 그런 걸 기대했었습니다. 방금 전 그 질문은 너무나 모호할 뿐이군요.”
“일부러 그렇게 했다네. 하지만 자네는 그 질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아마 그 몇 마디 말 속에 모든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곧 깨닫게 될 걸세. 인간의 삶은 지속돼야 하는가, 사라져야 하는가? 바로 자네들 인간들이 결정해야 할 문제라네. ---p.209
난 그 아이들을 사랑한다. 나는 그 아이들이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고, 서로 사랑하며, 나를 사랑해준 것처럼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인간들이 믿는 여러 가지 중에서 하느님과 관련된 유일한 진실은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다’라는 것임을……. 하느님도 언젠가 나한테 직접 말씀하셨다. 맞는 말이다. 서로 사랑하는 한 우리는 남들을 위해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세상이 계속되기를 원할 것이다. 모든 것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 하느님, 사랑.
---p.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