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향림 시인의 「꽃들은 경계를 넘어간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화자에게 각별한 존재는 작은 꽃들입니다.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꽃을 대할 때도 그러합니다. 빛깔과 자태가 화려한 꽃일수록 극진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와 반대로 작고 보잘것없는 꽃은 푸대접을 받습니다. 때로는 ‘꽃’이 아니라 ‘풀’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그런 편견에 맞서 이 작품의 시인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세상은 아주 작은 것들로 시작한다”라고. 작은 것이 모여서 큰 것을 이룹니다. 작은 것이 있기에 큰 것들이 크다고 인식될 수 있습니다. 작건 크건 생명의 가치는 동일합니다. 시인의 말처럼 작은 것에도 여린 내면이 있고 차고 맑은 슬픔이 있습니다. 내면과 감정의 크기는 겉으로 드러난 크기와 무관합니다. 아니, 크기를 재는 일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아름다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꽃미남이 되는 법」중에서
하루 일 마치고 해질녘/ 막걸리 한 잔에 붉게 취해/ 돌아오는 원둑길 풀밭/ 다 먹은 점심 도시락 가방 베개 하여/ 시인도 눕고 선생도 눕고 추장도 누워// 노을 지는 하늘에 검붉게 물든 새털구름/ 먼 허공에 눈길 던지며/ 입에는 삘기 하나 뽑아 물었을까/ 빙글빙글 토끼풀 하나 돌리고 있었을까/ 하루해가 지는 저수지 길을/ 바퀴는 몰라//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다/ 너무 오래 달려오지 않았나 -윤재철,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다」 부분
윤재철 시인의 작품은 김기택 시인과 김광규 시인이 비판적으로 형상화한 삶을 끝내는 법, 즉 근대화와 도시화로 인해 자연과 멀어진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것을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다”는 간단한 말로 압축합니다. 자기 자신과 자연을 외면하고 오직 달리기만 했던 삶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과격할 수도 있는 주장이지만, 이 작품은 부드럽고 완만한 어투를 통해 그에 동참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동차의 기본을 ‘잘 달리고, 잘 돌고, 잘 멈추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빠르게 달리기만 해서는 좋은 자동차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삶을 위협하는 흉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삶 또한 그러합니다. 쉬지 않고 일만 하거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곁을 돌아보지 않는 삶은 위험합니다. ---「지하철에서의 하루」중에서
쉬르마허의 견해는 일방적인 옹호나 매도에서 벗어나 가족을 새롭게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가족이 문제시되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는 ‘가족 이기주의’였습니다. 혈연 중심의 가족은 집단 내의 배타적 권리만을 추구하여 가족과 사회에 부정적인 결과만을 초래한다는 것이 종래의 지배적인 견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기적이지 않은 가족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가족이 이타적이고 그 이타심이 사회로 확장될 수 있다면, 가족은 반사회적이라는 멍에를 벗게 될 것입니다. 이타적인 심성은 상대방을 억압하지 않으므로 가족 내부의 억압성 또한 해소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가족이 존재한다면 가족을 이루려는 사람들 또한 지금보다 늘어날 것입니다. 가족의 이타성을 복원하는 일은 어떤 출산 장려책보다 가족의 몰락을 막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