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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정원의 마리오네트 세트

그림자 정원의 마리오네트 세트

[ 전2권 ]
유미엘 | 뮤즈 | 2017년 10월 27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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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10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816쪽 | 140*210*60mm
ISBN13 9791104914720
ISBN10 1104914727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헤이젤은 자신의 과거를 알지 못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건 주로 사후에 접한 일들이었다.
낡은 저택을 떠도는 유령이던 소녀는 제 과거는 몰라도 자신이 어떻게 남자가 만든 오토마타(자동기계장치, 복수형) ‘인형’ 안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만큼은 아주 선명하게 떠올릴 줄 알았다. 그리고 그 계기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작은 사고였었는지도.
그 기억의 시작은 온통 하얀 방이었다.
하얀 벽지에 하얀 가구로 통일된 내부는 무균실을 떠올릴 만큼 꾸민 이의 병적인 집착이 엿보였다. 유백색 대리석 바닥 위에는 털이 도톰한 카펫이 발소리를 삼킬 만큼 푹신하게 깔려 있었고 높은 천장에는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여자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소원할 만한, 아기자기한 꿈으로 가득한 방이었다.
방의 주인은 하얀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였다. 반짝이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가 보석처럼 아름다운 그녀는 하루 대부분을 새하얀 소파 위에 앉아 보냈다. 가끔 창문이 열리면 얇고 부드러운 흰색 모슬린 커튼이 바람에 투명하게 나부끼는 장관을 이루었으나 바깥의 복잡한 세상은 그녀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지 그녀는 결코 뒤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이 새하얀 방에 매료된 헤이젤은 주인 몰래 숨어들어 오고는 했다. 스치기만 해도 때가 탈 것처럼 방을 꾸며둔 탓에 다리도 제대로 뻗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몸을 웅크린 채 구석에 숨어 있었는데, 이렇게 꾸며놓지 않았더라면 소녀 같은 괘씸한 방문자 수는 분명 더 늘었을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었다. 아주 가끔, 차가운 인상의 덩치가 큰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새로운 장식품을 가지고 나타나거나 청소를 하고 사라지고는 했다.
‘이곳의 관리자인가 봐.’
그런 것치고는 방의 주인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는, 어딘가 좀 거만한 느낌이 나는 사내였지만 말이다. 남자의 존재감은 정적인 미녀와 상반된 느낌을 주었다. 그 이유가 어쩌면 단순히 그가 어두운 색의 옷을 즐겨 입는 탓일 수도 있었겠지만 헤이젤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큰 키의 남자가 지나가는 곳마다 유독 선명하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는데, 그 모습을 볼 때면 알 수 없는 공포가 스멀스멀 발목을 타고 올랐기 때문이었다.
고요하던 방의 균형은 남자가 등장하는 순간 깨졌다. 새벽에 켜켜이 쌓인 눈처럼 침잠한 공기는 순식간에 흐트러지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거친 약동감이 꼬리를 남겼다. 단단하고 힘찬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강한 에너지가 어딘지 불길했다.
‘저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 돼.’
소녀는 어째서인지 그를 피하고 싶었다. 상대도 자신처럼 이곳과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동질감을 느낄 법했는데도 친근함을 느끼기는커녕 무서워서 몸을 사리기에 바빴다. 그래서 헤이젤은 늘 남자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방에 숨어들었다. 아예 이 장소를 멀리하는 것도 방법일 테지만 전부 포기하기에는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소녀가 찾은 몇 안 되는 안전한 장소이기도 했다. 창문에는 방범창이 둘러 있고 아가씨 근처에도 유리문과 튼튼한 철제 울타리가 쳐져 있어서 그녀의 곁에 있으면 보호받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나이대인 소녀는 혼자 있는 시간이 두려웠다. 그래서 흰 드레스의 아가씨가 자신을 귀찮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무척이나 기뻤다.
그때는 실내에 울타리가 쳐져 있는 모습을 보고도 어째서 이상하다고 의심해 보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가씨가 앉아 있는 소파 곁에 자리를 잡은 헤이젤은 오늘도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예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미모였다. 바다처럼 찰랑거리는 파란 눈동자는 보는 이를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플래티나 블론드의 곱슬머리를 리본으로 묶고 가녀린 어깨와 허리를 강조한 우아한 실크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며 헤이젤이 되뇌었다.
‘웃으면 더 예쁠 텐데…….’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아가씨는 결코 웃는 법이 없었다. 조각처럼 단정한 얼굴에 드리워진 긴 속눈썹의 그림자는 애수에 젖은 표정과 어우러져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헤이젤은 그 슬픔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가씨를 보러 얼마나 자주 이곳에 왔는지 이제 셀 수도 없었다. 우연히 그녀를 발견한 뒤로는 홀리듯 날마다 이곳을 찾은 것을 보면 한 달,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랫동안 찾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헤이젤이 아가씨에 대해 아는 것은 극히 작은 것들이었다. 그녀는 작은 소녀에게 자신의 고민을 상담하는 일 없이 담담히 슬픔을 억누를 뿐이었다.
그러나 가까이 가거나 말을 나누지 못하면 또 어떤가. 그저 지켜보고 또 봐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그녀는 아름다웠다.
‘민트와 닮았어.’
문득 예전에 어머니가 생일 선물로 사다주신 곱슬머리 인형이 떠올랐다. 물론 민트는 눈앞의 아가씨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라 동그랗고 통통한 볼이 사랑스러운 아기 인형이었다. 닮은 기분이 드는 건 아마도 저 뽀얀 우윳빛 피부와 홍조를 띤 도톰한 입술이 닮아 보였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매일같이 찾아오는 헤이젤을 봐서라도 눈인사 정도는 건네도 좋으련만, 아가씨는 미동조차 없이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팔걸이에 한쪽 팔을 올리고 등을 곧게 세운 채 애수에 젖어 있는 모습이 어딘가 걱정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슬쩍 내리뜬 시선이 문 쪽을 향한 걸 보면 누군가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걸까. 그래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는지도 몰랐다.
헤이젤은 뒤늦게 그녀 손에 들려 있는 것이 꽃다발이라는 걸 알았다.
「부케. 그렇구나. 웨딩드레스였구나.」
미녀가 입은 하얀색 가운(Gown)이 단순한 흰 드레스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보고 다시 보아도, 그녀가 입은 옷은 결혼식 예복이었다. 왜 지금껏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새하얀 방 안에 사는 아가씨라 흰옷을 입은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있던 제 단순함에 어이가 없었다. 몇 번이나 보러 와놓고는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시야가 좁은 걸까, 생각이 짧은 걸까 아니면 그 두 가지 모두일까. 이러니 아가씨가 저를 쳐다봐 주지도 않는 거라고 소녀는 중얼거렸다.
“또 너냐.”
멍하니 인형을 들여다보는 소녀의 등 뒤에서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헤이젤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신기한 듯 유리 너머를 바라보는 그녀를 발견한 누군가가 짜증을 내며 혀를 찼다.
“쫓아내도 매일같이 오는군. 그렇게 마음에 들어?”
저음의 남자는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것이 혼잣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한 질문이라는 걸 깨달은 헤이젤이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예뻐.」
“어디가 마음에 드는데?”
「전부 다. 이곳에서 가장 예쁜 언니야.」
여전히 남자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남자 역시 무시당하는 것에 그리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만하게 팔짱을 낀 상태로 손가락을 두들기는 그는 귀찮은 아이를 쫓아낼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하, 조막만 한 게 보는 눈은 있어서. 그래. 여기서 가장 예쁜 건 사실이지. 그래도 네가 가질 순 없을 거다. 내 인형은 비싸거든.”
아. 헤이젤이 입을 동그랗게 만들어 감탄사를 뱉었다. 이제야 왜 지금껏 그녀가 자신을 아는 체 해주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저 예쁜 언니는 인형이었구나. 그래서 민트랑 닮았다고 생각했던 거였구나.’
소녀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남자가 물었다.
“민트?”
「내 인형이야. 어머니가 사다주신.」
“비스크 인형인가 보군.”
비스크가 뭘까. 처음 듣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한 소녀가 뒤늦게 뒤를 돌아보았다. 애쉬브라운색 머리의 키가 큰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젊은 남자였다. 키만이 아니라 체격 또한 남달리 큰 남자는 눈매가 사나워 얼핏 보면 화가 난 듯 보였다. 아니, 남자는 헤이젤이 방에 들어온 것을 발견하고 이미 화가 난 상태였다.
「언니랑 닮았어.」
“언니? 저 인형을 말하는 건가?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이 아가씨랑 닮은 인형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맞아. 민트는 작아. 품에 쏙 들어오는 아기 인형이야. 얼굴보다도, 분위기가 닮았어.」
“얼굴과 팔다리만 도자기처럼 딱딱하고 몸은 헝겊이라 푹신할 테지? 안기 좋게 하려고 그리 만든 거야. 비스크 돌들은 특성상 비슷한 분위기를 갖고 있어. 이 아가씨는 그런 인형과 달라. 전신이 특수 재질로 만들어진 최고급 인형이지. 우리 애들과 얼굴이 닮았다면 네 인형도 어느 정도 가격대가 있을 거야.”
「얼마인지는 몰라.」
“애들은 그런 거 몰라도 돼.”
「그래.」
남자는 소녀를 무시하는 투로 설명했지만 헤이젤은 개의치 않았다. 어머니가 인형을 주며 해준 말도 비슷했다. 금액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남자의 말을 듣고 다시 보니 하얀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는 소파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신부 같았다. 그녀를 위해 흰 방을 준비한 건가, 하며 인형에게서 눈을 떼고 방을 둘러보다가, 소녀를 바라보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는 귀찮음과 호기심이 적당히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풀 스케일 인형이 낯선가?”
「풀 스케일…….」
“라이프 사이즈라고도 하지. 실물 크기 인형은 이제 꽤 흔히 보잖아? 백화점의 마네킹 같은 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요즘 애가 아닌 건가. 죽은 지 좀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뭐라고 했어?」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헤이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뭐가 어떻게 되든 이제 좀 나가. 누가 멋대로 들어와도 된다고 했지?”
「더 있으면 안 돼?」
“안 돼, 이제 나가!”
「방해하지 않을게.」
“네 존재 자체가 방해다. 썩 꺼져! 왜 안 떠나고 이런 데 박혀 있는 거야!”
「가라고? 어디로?」
“말귀도 못 알아듣고. 순순히 내쫓기는 글렀나, 귀찮게 됐네.”
남자가 짜증이 섞인 짧은 숨을 토했다. 이런 데 허비할 시간이 없다며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헤집던 그는 시선을 흰 드레스의 아가씨 쪽으로 옮겼다.
“재미있는 걸 알려줄까. 저 인형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있어.”
「비밀?」
“그래. 엄청난 비밀이지. 어때, 얌전히 나간다고 약속하면 보여주마.”
그는 조끼 주머니에서 금장이 화려한 열쇠를 꺼냈다. 철제 울타리의 자물쇠를 열고 그 안에 한 겹 더 둘린 두꺼운 유리 전시장 문도 조심스럽게 열었다. 철망과 유리문이 전부 열리자 그 안에 앉아 있는 실물 크기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신부가 앉아 있는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소파 밑에 바퀴가 달려 있었는지 의자와 인형은 부드럽게 앞으로 밀려 나왔다. 카펫이 깔린 바닥 덕분에 움직이는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인형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기쁨에 헤이젤이 활짝 웃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곁으로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유리 전시장 너머가 아닌, 실물로 직접 보는 인형은 차마 만져 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저기, 정말 예뻐.」
“나도 알아.”
감격한 소녀가 내뱉는 환호성에 남자는 건방진 대답을 했다. 그러면서도 소녀의 반응에 내심 만족했는지 줄곧 일자로 굳어져 있던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는 소녀가 인형에게 섣불리 손을 대거나 덤벼들지 않고 조심스럽게 지켜보자 안심한 눈치였다.
“그녀는 오토마톤(Automaton, 오토마타의 단수형)이야.”
「오토마톤?」
“그래. 움직이는 인형이지. 동작도 아주 섬세해.”
「움직인다고?」
“손대면 가만 안 둔다.”
차가운 한마디에 헤이젤은 손을 냉큼 뒤로 감췄다. 쫓겨나지 않으려 한 걸음 뒤로 떨어져 눈치를 보면서도 기대에 차 얼굴이 반짝였다. 평소라면 귀찮은 일을 무엇보다도 경멸했을 남자 역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랜만에 인형을 움직여 볼 생각을 하는 듯싶었다.
그는 소파 옆으로 다가가 인형 뒤에 섰다. 긴 백금발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늘어진 인형의 옆구리 쪽에 손을 대고는 무언가를 찾았다. 손가락이 조심스레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었다. 허리에서 조금 윗부분을 더듬던 남자의 커다란 손가락이 숨겨져 있는 태엽을 감자, 위잉― 하는 작은 신호음이 들렸다. 한참 태엽을 감는가 싶었던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세상에!」
한곳을 응시하던 인형의 눈에 빛이 들더니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내리뜨고 있던 눈꺼풀이 바짝 들리며 반가운 사람이 찾아온 양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쪽으로 몸을 돌린 신부는 양손으로 부케를 쥐고 수줍은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동작으로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이 마침내 돌아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입꼬리에 걸리는 부드러운 호선, 예쁘게 접히는 눈매까지. 신부가 바라보는 저편에서 연인이 다가와 그녀에게 키스해 주는 장면이 절로 연상되는, 섬세한 몸동작이었다. 단순한 동작 몇 개로 감정 변화를 이토록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대단하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정말 행복해하는 모습이야!」
인형의 움직임은 간단하지만 아름다웠다. 연인의 부름을 들은 듯 고정되어 있던 눈동자와 고개가 살포시 돌아갔다. 곧이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쥐고 있던 꽃다발을 가슴께로 올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고개가 움직이는 각도, 어깨의 기울기, 곧추세우는 허리의 작은 동작과 설렘에 부푸는 가슴 들썩임 같은 작은 디테일이 그녀를 살아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부케를 다시 쥐는 조심스러운 손 움직임에서 한편의 모노드라마를 관람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말 없는 몸짓만으로 사랑에 빠진 처녀가 연인과 재회하는 설렘을 완벽하게 연기해 냈다.
“아름답지? 그녀는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존재야.”
「응, 당신은 천재야.」
남자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헤이젤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 아름다운 공간의 주인이자 창조자라는 걸 소녀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뜻밖이었는지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남자의 눈썹이 슬쩍 휘었다.
“18세기에는 시계태엽으로 움직이는 오토마타들이 존재했지. 물론 비슷한 인형이야 전에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단조로운 동작들만 가능했고. 18세기 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볼만한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에 올랐지. 그들은 피아노를 치거나 편지를 쓰고, 카드를 뽑아 점을 쳤어. 종이를 넘기며 책을 읽는 아름다운 인형들이 왕과 귀족들의 유흥을 위해 제작되던 시절이었어. 가끔은 움직이는 동물도 만들었지. 황금 알을 낳는 거위, 오르골 기능을 접합한 노래하는 카나리아 같은 것들도 있었어.”
남자는 한 편의 동화를 들려주듯 설명했다.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인형을 마주 보던 그는 꽃다발을 든 신부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살짝 들어 손등에 입맞춤했다. 보는 이가 한숨을 내쉴 정도로 다정한 시선이어서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이 바로 그가 아닐까 착각되는 정중한 몸짓이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도, ‘그녀’ 같은 인형은 존재하지 않아.”
엄숙한 한마디는 선언 같았다. 헤이젤은 의아했다. 그가 만든 인형이라면, 원한다면 다시 하나 만들 수도 있지 않은가.
「또 만들면 되잖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소녀가 묻자, 남자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을 보는 시선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세상에는 단 하나로 충분한 것도 있어.”
하나밖에 없는 유니크한 아름다움이기에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존재가 된다고 남자가 설명했다.
“그녀를 만든 몰드(Mold)는 단 한 체의 완성품을 복제한 후 파기했지. 이제 같은 인형은 만들 수 없어.”
「그렇구나. 아쉽네.」
저렇게 사랑스러운 인형을 더는 볼 수 없다니 안타까웠다. 한숨을 쉬는 소녀를 본 남자가 미간을 구기며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선심을 썼다.
“보는 눈이 나쁘진 않군. 당장 내쫓기는 힘들 것 같고 이걸 어쩐다……. 쯧. 제 발로 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귀찮게 되었군.”
남자의 말에 소녀가 눈을 크게 떴다. 쫓아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얌전히 있겠다고 약속한다면 아주 잠깐은 봐줄 수도 있어. 대신 오래는 안 돼. 적당히 만족하면 냉큼 떠나라.”
「정말 괜찮아?」
“……대신 말썽을 일으키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가랄 때 반드시 나가.”
「알았어!」
헤이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있을 곳을 내어준 남자에게 감사 인사를 반복했지만 그리 귀담아듣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고맙다는 말을 들을 생각이 아니었는지, 오히려 귀찮다는 듯 인상을 쓴 남자는 다시 버튼을 조작해 인형을 의자에 앉혔다. 인형은 처음 그녀를 발견했을 때의 자세로 돌아가기 위해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는 도중 평소 드레스 소매에 가려 보이지 않던 부분에 시선이 갔다. 소파 팔걸이 안쪽에는 은으로 세공된 매달리온 라벨(Medallion Label)이 붙어 있었다.
[The May Bride]
‘오월의 신부’라는 타이틀 외에 따로 이름을 지어주진 않았을까. 남자라면 그녀에게 특별한 애칭을 지어주고도 남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친김에 이름을 물어볼까 망설이던 헤이젤은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저기압의 남자는 늘 미간에 주름이 져 있어 말을 걸기 수월한 상대는 아니었다. 전신을 새카만 색으로 두른 그의 거친 표정이 무서웠던 소녀는 귀찮게 굴어 주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며 질문을 삼켰다. 자칫 잘못 말을 걸었다가 노려보기라도 하면 등골이 서늘했으니까. 이곳에 있도록 허락을 받은 이상 인형의 이름 정도는 나중에라도 언제든 물어볼 기회가 있을 터였다.
무뚝뚝한 남자는 예상외로 섬세한 면이 있었다. 머리에 얹은 베일의 풍성한 볼륨이 눌리지 않도록 인형의 옷매무새를 다듬는 손길이 정성스러웠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반짝거리는 비즈가 달린 베일이 샹들리에 불빛에 빛을 반사했다.
「와아…….」
소녀가 무엇을 보고 감탄했는지 깨달은 남자가 피식 웃었다.
“베일에 달린 라인스톤(Rhinestone)은 전부 스와롭스키야. 일반 모조 보석과는 빛 반사가 다르지. 자수 놓듯이 하나씩 전부 따로 바느질했어. 브로치는 크실리온 컷으로 다듬어진 알렉산드라이트고 귀걸이와 목걸이는 진짜 다이아몬드와 진주로 만들어진 거야. 드레스와 베일에 달린 스톤 가격만 해도 작은 집 한 채는 나올걸.”
「비싼 거야?」
“개념을 모르는 건가. 뭐, 결코 싸다고 할 수는 없는 가격이지.”
설명하던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집값이니 보석이니, 경제관념 없는 철부지 소녀에게 이런 건 큰 의미가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듯했다. 꺼낸 김에 흠이 있는 곳은 없는지 이곳저곳 세심하게 들여다보던 남자는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남자가 낮게 혀를 찼다. 아이에게 인형을 구경시키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던 그는 행동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인형이 제대로 소파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는 발걸음을 돌려 급하게 방을 나갔다. 다른 생각에 마음을 점령당했는지 곁에 있던 헤이젤에게 인사 한마디 없이 재빨리 떠났다.
남자가 인형을 유리장 안에 다시 넣지도 않고 그대로 사라지려 하자 깜짝 놀란 헤이젤은 그를 부를지 망설였다.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중한 인형을 안전한 장소에 돌려놓는 걸 우선으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보려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남자에게 갑자기 급한 사정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지켜본 바로는 그의 집에는 방문객도 거의 드나들지 않았다. 커다란 저택은 황량하리만치 텅 비어 있었지만, 보안만큼은 철저해서 조용하고 안전한 공간이었다. 잠시 정도는 꺼내두어도 괜찮을 터였다.
헤이젤은 바빠 보이는 남자를 귀찮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불청객 주제에 주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기에도 눈치가 보였다. 그가 마음을 바꾸고 다시 쫓아내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으리라. 남자가 사라지고 조용해진 공간에 홀로 남은 헤이젤은 소파 옆 바닥에 편하게 자리를 잡고 다시 인형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이 모습이 정말 인형이라니.’
살아 있는 사람과 다른 점이라면, 아마도 실존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었다.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새삼 감탄이 터졌다.
‘특별한 재질이라고 했지.’
도자기 인형과는 달리, 피부색도 탄력도 사람과 똑같아 보였다. 그녀가 사실은 사람이고, 마녀의 저주를 받아 하루 중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움직일 수 있는 마법에 걸려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진짜 같았다. 뭘 어떻게 하면 이런 걸 만들 수 있게 되는 걸까.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남자가 인형을 만드는 과정도 구경하고 싶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라고 했는데도 아직도 만져 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염치없이 굴어서 쫓겨나면 제 손해니까 예의 있게 행동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헤이젤은 이대로 종일 바라볼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곁에서 인형을 구경할 수 있다는 작은 행복만으로도 충분했다.



상속받은 낡은 저택은 쓸데없이 넓고, 지나치게 낡았다. 워렌에게는 골칫거리가 따로 없었다. 좋게 말해서 역사적인 전통이 담긴 건물이지, 집안 대대로 내려온 저주받은 폐가에 가까웠다.
‘다 낡은 폐가 주제에 전통문화유산 어쩌고 내셔널트러스트 등록 어쩌고 같잖은 소리를 늘어놓으며 철거 허락도 안 내주고 상속세는 또 더럽게도 많이 받아 처먹었지.’
정부는 워렌에게 돈 나올 구멍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건물을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귀찮아서 팔려고 내놓아봐도 무지막지한 세금과 관리 비용을 댈 엄두가 나지 않는지 관심을 두는 이가 없었다. 살던 집을 팔고 소유물 대부분을 처분해도 상속세를 충당할 수 없었던 워렌은 결국 빚더미에 깔려 이곳으로 이사 오게 되었다. 가진 걸 다 팔아도 부족한 부분은 나랏돈을 빌려 채운 뒤 이자를 붙여 갚으라는 소리나 들었을 뿐, 팔지도 버리지도 못할 낡은 저택만 손에 남긴 워렌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는 쓸데없이 넓은 이 저택에 인형 쇼룸을 꾸미고 작업실과 주거도 함께하게 되었다. 매일 부지런히 일하는 그를 지켜보던 헤이젤이 물었다.
「이 넓은 저택에 왜 하인이 안 보이는 거야?」
“빚쟁이 주제에 하인은 무슨.”
그럴 여유가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한 그는 다시 일에 몰두했다. 관리인도 없는 커다란 저택에서 혼자 건물을 돌보며 일하게 된 덕분에 하루하루가 바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폐허가 된 정원과 낡은 건물의 우울한 분위기가 그가 만드는 인형들을 전시하기에 둘도 없을 정도로 훌륭한 시너지 효과를 연출했다는 것 정도였다.
어둡고 긴 복도를 지나 현관 근처에 있는 작은 방에 들어간 워렌은 등을 켜고 문을 닫았다. 낡은 서재처럼 꾸며진 볼품없는 방이었다. 방을 둘러본 그는 불을 피운 지 오래되어 재만 남은 작은 벽난로 앞으로 다가갔다. 벽난로 위에는 낡고 수수한 도자기가 놓여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그 도자기를 응시하던 워렌은 그것을 정확히 반 바퀴 돌렸다. 뒷면에 그려진 그림이 나타나자 육중한 소리와 함께 책장으로 가득 찼던 한쪽 벽이 뒤로 젖혀졌다.
반대편에서 나타난 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버튼들이 달린 계기판이었다. 이 작은 방이 사실은 건물 전체의 보안 경비를 담당하는 핵심적인 공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저택의 주인인 워렌밖에 없었다.
‘경비 체제를 심야용 무인 시스템으로 바꾸고…….’
이것이 워렌이 지독하게 넓은 저택을 홀로 관리하는 방법이었다. 경비 시스템이 강화되자 현관과 전체 창문에 고풍스러운 철제 펜스가 낡은 쇳소리를 내며 내려왔다. 낮에는 창틀 사이에 숨겨져 있던 보안 쇠창살들이 밤이 되면 모든 출입문을 단단히 봉쇄했다. 창살이 내려진 것을 확인한 그는 만족한 듯 다시 화병에 손을 뻗었다. 그림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계기판은 자취를 감추고 원래 있던 책장이 돌아왔다.
방을 이전과 같은 모양으로 돌려둔 워렌은 작은 등을 끄고 밖으로 나갔다. 바쁜 걸음으로 지하에 마련된 작업실로 향했다. 그 망할 놈의 빚 폭탄을 갚기 위해서는 오늘도 늦은 시각까지 작업해야 할 듯싶었다.
‘미친 듯이 일해도 부족할 시간에 유령 상대로 인형 자랑이나 하고 말이지.’
어린 소녀 유령이 저택에 출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한 달 정도 전이었다. 그가 신부 인형을 보관한 ‘화이트 룸’에 누군가가 찾아온다는 걸 알게 된 시기가 그 정도일 뿐이지 어쩌면 소녀는 이전부터 대대로 이 집에 남아 있던 존재일 수도 있었다. 소녀의 모습은 희미했다. 연한 회색빛을 띤 안개 같은 존재였는데, 선명하지 않은 외양에도 유독 그 목소리만큼은 확실하게 들렸다. 유령을 직접 목격한 게 난생처음이었던 워렌은 초반에 소녀를 발견하고 심하게 놀랐으나 경악한 건 소녀 쪽도 마찬가지였다. 유령 주제에 그가 근처라도 갈라치면 부리나케 도망갔다. 처음 말을 걸었을 땐 유령 쪽에서 먼저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기까지 했던 터라, 소녀를 향한 그의 경계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는 원래 중요하지 않은 일에 깊게 고민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이 정도 낡은 저택이니 유령 한둘 정도 덤으로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했다. 소녀 유령은 겁이 많은 데다 누군가에게 해코지하지도, 폴터가이스트 같은 현상을 일으키지도 않는, 말 그대로 무해한 존재였다. 그는 유령이 있든 없든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히려 심심풀이 수다 대상이 되어주고 있지.’
어쩌다 보니 소녀를 상대로 잡담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오늘은 인형을 자랑하다 못해 꺼내 보여주기까지 했다. 사람과 섞이는 걸 귀찮아하는 워렌이지만 온종일 혼자 작업하다 보면 아주 가끔은 누군가와 말을 나누고 싶어지기도 했던 터라 최근에는 소녀의 존재가 방해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워렌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러지 말고 고양이라도 한 마리 키워야겠어.’
아무리 외롭기로서니 유령을 상대로 대화를 나눌 마음이 드는 건 아니지 않은가. 워렌은 다음에 장에 나가면 새끼 고양이나 수소문해 봐야겠다며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휘영청 달 밝은 밤이었다. 만월인지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만으로도 은은하게 실내가 밝혀지는 기분이 들었다. 인형 곁에서 한가로이 누워 있던 헤이젤은 한밤중에 눈을 떴다.
‘무슨 소리지?’
한밤의 정적을 깨는 소리가 소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각사각사각. 무언가를 갉아내는 소리 같기도 했다. 무얼 어떻게 하면 저런 소리가 들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들려서는 안 되는 소리임에는 분명했다. 위험 신호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순간 어디선가 낮은 속삭임이 들렸다.
전부 남자 목소리였다. 그 수는 둘, 아니 셋. 이 저택 주인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바쁘게 서로를 격려하고 있었다. 불안감에 고개를 든 소녀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방은 아닌데.’
소녀는 가까이서 들려오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러 창가로 달려갔다. 창밖을 둘러보다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헤이젤과 인형이 있는 방 아래, 1층 창문을 통해 누군가가 침입하려 들고 있었다. 밝은 달빛 아래 남자들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부터 들려오는 사각대는 소리는 톱으로 쇠창살을 갉아내는 소리였다.
“조금만 더 빨리 움직여. 이런 쇠창살 이야기는 없었잖아! 잭, 이 자식은 염탐 보냈더니 일은 안 하고 술이나 처마시고 돌아왔어. 도움 안 되는 새끼.”
“낮에 둘러봤을 땐 없었다고! 정말 못 봤단 말이야.”
“지랄하고 있네. 눈구멍이 뚫려 있다면 이 커다란 걸 못 보는 게 말이 돼? 연철에 속이 비어 있으니 망정이지. 까딱했다간 톱질로 날 샐 뻔했잖아, 이 머저리야!”
“시끄러워. 둘 다 닥치고 얼른 자르기나 해. 실수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아이고, 예. 걱정하지 마십쇼, 도련님. 이런 건 금방 땁니다.”
“물건이 커서 훔치기도 수월하지 않을 텐데 이런 곳에서 시간 낭비나 하고 있다니.”
말싸움하는 두 남자를 꾸짖은 세 번째 남자는 작업복 차림이 아닌 매끈한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였다. 귀족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은 짜증이 나는지 검은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창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들어오려 하고 있어. 무언가를 가져가려고 해.」
당황한 헤이젤이 창가에서 멀어졌다. 저택을 관리하는 남자에게 알려줘야 할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지? 소녀가 평소 이 저택에서 머무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다른 곳에 가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터라 건물 구조는 물론 남자를 찾을 방법도 몰랐다. 아래층부터 훑으며 남자를 찾아야 할까, 이곳이 몇 층짜리 건물이더라? 조금 더 자세히 주변을 둘러봤으면 좋았을 거라는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이 사태를 빨리 알려야 할 텐데. 헤이젤이 남자를 찾을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고민하는 동안 창밖에서는 다시 커다란 쇳소리가 들려왔다.
「쇠창살을 떼어냈어!」
그 두꺼운 쇠창살을 떼어낸 거라면 이제 정말 어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남자들은 무언가 큰 물건을 훔칠 예정인 듯 세 명이나 몰려왔다. 이 낡은 저택에서 훔쳐갈 만한 값진 물건이라면.
눈을 커다랗게 뜬 헤이젤이 뒤를 돌아보았다. 유일하게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흰 드레스의 인형이 달빛에 표표히 빛나는 모습을 응시하며, 혹시 그들이 노리는 건 이 아가씨가 아닐까 짐작했다. 낮에 남자가 뭐라 했던가. 인형뿐만이 아니라 부속품까지도 값이 상당하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불길한 생각은 한 가지로 정리되어 갔다.
「저들은 인형을 훔치려고 온 거야!」
헤이젤은 자신보다 큰 인형을 어떻게 하면 망가뜨리지 않게 잘 안아 옮길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팔을 뻗었다. 남자들이 이 방을 찾아오기 전에 빨리 숨겨야 했다.
「어?」
소녀가 내뻗은 손은 인형에 닿지 않고 허공을 갈랐다. 헤이젤은 놀란 얼굴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만질 수 없었다. 당황해서 다시 인형을 안아보려고 팔을 움직였다. 인형을 감싸 안으려던 헤이젤은 인형을 통과하고 소파마저도 거침없이 지나쳐 밖으로 튕겨 나갔다.
「이게 뭐지?」
바로 눈앞에 있는 물건을 만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소녀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인형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인형을 안을 수 없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헤이젤은 아버지의 서재에 마련된 프로젝터 빔을 떠올렸다. 신식 기계라는 영사기를 사용해 필름 영화를 보는 방법이었다. 하얀 스크린 벽에 35㎜ 필름을 투영시켜 기록된 영상을 언제 어느 때고 감상할 수 있다며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설명해 주었던 일이 기억났다.
그는 구하기 힘들다는 아동용 영화 필름을 수소문해 헤이젤을 위한 상영회도 열어주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소녀가 뭘 보든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헤이젤에게 필름의 내용은 상관없었다. 항상 바쁜 아버지와 같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이 무엇보다도 행복한 사치였기 때문이었다.
‘그건가. 영화, 영사.’
인형의 존재가 혹 영사기에 투영된 허구인 걸까 싶어 다시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인형과 소파는 평면이 아닌 입체였고, 방 자체가 하얗다지만 스크린으로 생각될 법한 너른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낮에 남자가 인형을 만지는 걸 분명 보지 않았던가. 남자 역시 필름에 기록된 영상이 아니라면 그도 인형도 모두 실존하는 물건일 터였다.
「그런데 왜 나는 만질 수 없는 거지?」
뚫어지게 손을 들여다보던 헤이젤은 그제야, 제 손이 달빛에 투명하게 빛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실존하지 않는 건 제 쪽이었다. 그제야 낮에 남자가 중얼거리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요즘 애가 아닌 건가. 죽은 지 좀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때는 저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뒤늦게 이해가 갔다. 그는 소녀가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던 거였다. 실존하지 않는 쪽은 어쩌면 그나 인형이 아니라…….
‘내 쪽이었어? 무슨 일이지. 대체 내 손은 왜 이렇게 보이는 건데?’
남자는 분명 ‘죽었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게 정말일까? 사실이라면 대체 언제, 어떻게?
스스로 죽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엊그제도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본 기억이 있는데 갑자기 죽었다고 해도 믿기 힘들지 않은가. 어제. 아니, 그게 정말 어제 일이 맞나? 내가 죽었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지? 지금쯤 나를 애타게 찾고 계시지는 않으려나?
남자가 보기에 자신이 죽은 게 확실하다면, 아니 그 말도 이상했다. 그는 죽은 사람을 대체 어떻게 알아본 걸까? 유령과 태평하게 대화를 나누고 인형 구경을 시켜주는 건 또 뭐란 말인가. 헤이젤의 고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내가 정말 죽은 게 확실한 거야?」
갑자기 깨달은 사실에 혼란스러웠다. 헤이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투명하게 보이는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자문했다. 이렇게 바닥이 비쳐 보일 정도로 존재감이 흐린 걸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한데 그것이 아무리 진실이라 해도 쉽사리 믿어지지도 않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혼란 속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헤이젤의 귀에 남자들이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차!」
당황스러운 현실에 부딪쳐 잠시 잊고 있던 일이 생각났다. 도둑! 그랬다. 이 저택에 숨어든 사람들이 있었다. 창살을 부수고 들어온 도둑들이 인형을 훔치기 위해 온 데를 헤집고 있었다. 급박한 상황 탓에 지금은 제 죽음보다도 당장 인형을 숨기는 데 먼저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헤이젤은 무거운 현실에서 잠시 도피하기를 선택한 걸지도 몰랐다.
‘눈에 안 띄는 곳에 숨겨야 하는데.’
복도 저 끝부터 방문을 열고 뒤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차츰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겁이 났다. 무서운 거로 말하자면 이 집의 주인 역시 위협적인 체격에 날카롭고 인상 사나운 남자였다. 무뚝뚝한 데다 툭툭 던지는 말투 역시 그리 살갑지 않았다. 그러나 헤이젤에게 여기 있어도 좋다고 말해준 사람이었다. 온정을 베풀어준 사람 편을 드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이 아름다운 인형을 도둑맞도록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도둑들이 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 소녀는 인형을 향해 몸을 던졌다.
‘어떻게든 움직여야 해!’
쿵!
인형을 옮겨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정신없이 덤벼들었다. 온 힘을 다해 몸을 부딪친 헤이젤은 무언가를 들이받는 소리와 함께 충격을 ‘느꼈다’. 큰 자극에 정신이 아득해져 잠시 눈을 감자 감각이 더욱 예민하게 전해진다. 온몸이 울리는 진동에 멀미가 났다.
‘몸이 아파.’
죽은 자도 고통을 느낄 수 있던가. 만일 이게 아픔이 아니라면, 대체 무얼까 싶었다. 밀려드는 강한 두통에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갔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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