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성장률은 연거푸 12%를 기록했고, 넘쳐나는 국제수지 흑자 때문에 어떻게 하면 그것을 줄이느냐가 고민거리였다. 한국경제를 걱정하는 사람은 바보였다. ---p.27
경제비서관을 지낸 한 측근의 평가는 훨씬 인색했다.
“애당초 노태우 대통령은 경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36.6%짜리 대통령’이라는 정치적 부담감이 항상 그를 잡아당기고 있었고, 더구나 총선 결과가 여소야대로 나타남에 따라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일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으니까요. 노사분규를 수습하는 태도를 봐도 그랬습니다. 노사분규에 따른 경제적 파급효과가 아무리 심각하다 해도 언론과 정치권이 시비를 걸 만한 대책은 피했습니다. 겪을 건 겪어야 한다는 정면돌파보다는 정치적으로 부담이 가는 정책은 가급적 안 쓰겠다는 쪽이었지요.” ---p.63
드디어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평민·민주·공화 야 3당은 국회가 개원되자마자 당장 16개의 상임위원장 중에서 9개를 차지하는가 하면, 국정감사 부활과 5공특위 구성 등을 관철시키며 막강한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7월 2일의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부결은 국회의 힘, 더 구체적으로는 ‘야대(野大)’의 위세가 어떤지를 여실히 보여준 첫 번째 사례였다. ---p.79~80
잘 모르거나 확신이 안 서면 여론의 향배에 크게 좌우되기 마련이다. 언론이 한번 개각의 필요성을 제기하면 십중팔구 그렇게 되었다. 실제 통계가 그 실상을 뒷받침해 준다. 노태우정권 5년 동안 크고 작은 개각을 무려 27번이나 했고 그 과정에서 장관을 통틀어 124명이나 양산했다. 평균 재임기간은 13개월 정도, 전두환시대의 평균 재임기간은 17.5개월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장관들에게 책임을 물어 사람을 교체하는 것으로 대처했다. 문책인사를 통해 여론의 공격을 모면하는 데 급급했다. ---p.109~110
키친 캐비닛의 고정 멤버는 두 사돈과, 동서인 금진호 씨, 그리고 친인척은 아니지만 이원조 씨가 단골로 끼었다.
이들 사이에 과연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무튼 과천의 경제관료들은 여느 장관회의가 열릴 때보다 이들의 회동내용을 더 궁금해했던 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p.120
6공에 들어와서도 국세청장의 대통령 독대 관례는 종전과 마찬가지였다. 노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김종인 경제수석도 국세청과 대통령 사이의 특수관계에 관한 한 모르는 일이 많았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6공 들어 국세청장의 활동범위는 과거에 비해 훨씬 공개적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투기단속이나 재벌문제 등을 다루는 공식 회의석상에도 자주 출석해야 했고, 서로 격의 없는 토론도 함께 나눴으니까요. 그러나 국세청장이라는 자리의 성격상 대통령과의 독대는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그건 어떤 수석비서관도 개입할 수 없는 경우이겠지요. 물론 나도 모르게 국세청장이 대통령과 독대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p.160
당시 노동문제를 담당했던 한 실무 관계자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초기에 공권력을 발동하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은 대통령이 대충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지금 공권력을 쓰면 일시적으로는 진정시킬 수 있지만 불씨를 완전히 끄지는 못한다. 여론도 등을 돌린다. 불순세력을 저항 없이 뿌리 뽑자면 좀 더 기다려야 한다. 정부가 내버려두면 저희들끼리 강온파로 갈려 싸울 것이다. 강성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여론이 일면 그때 공권력을 써서 추려내면 된다. 명분도 서고 실익도 거둘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상황은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더군요. 강온파끼리의 대립도 크지 않았고 핵심 멤버들도 꼬리를 잡히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기업들의 불만이 거세지고 경제도 흔들릴 조짐을 보이니까 비로소 서둘러 공권력을 동원한 것이지요. ---p.184~185
돌이켜 보면 1980년대 중반에 찾아온 이른바 ‘단군 이래의 최대 호황’ 끝에 불어닥친 집값폭등 현상은 정말 끔찍했다. 돈은 흘러넘치는데 집은 모자라고, 민주화 열기 속에 각종 규제는 맥을 못 쓰고…. 자고 나면 다락같이 오르는 집값에 속수무책이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급격한 소득증대로 대형 주택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판에 수년 동안 공급을 꽁꽁 묶어 놓는 정책을 써 왔으니 대형 아파트값이 집중적으로 폭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수습한 것이 분당과 일산 신도시 건설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문희갑과 박승이 주도한 신도시 건설은 주택정책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p.258
나중에 대통령선거에 나서게 된 정주영은 심지어 어느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김종인이 때문에 내가 정치할 것을 결심했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그에 대해 응어리가 맺혀 있었다. “대통령은 괜찮았는데, 경제참모가 문제였다”는 말도 수시로 하고 다녔다. 정주영 회장이 직접 노태우 대통령에게 100억 원을 갖다 주었다는 문제의 폭탄선언 내용도 따지고 보면 세무조사를 무마시켜 달라고 대통령에게 돈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효과를 보지 못했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p.309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는 거요. 그러면 내가 독재자란 말이오.”
아니나 다를까, 노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다. 술자리가 끝나고 김종인 경제수석은 대통령에게 불려갔다.
“도대체 어찌 된 거요. 재벌들이 어찌 그럴 수가 있소.”
“죄송합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의 힘을 정부가 제도적 장치를 통해 제대로 정리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벌이 대통령을 우습게 보았기에 이 같은 일이 벌어진 만큼, 이참에 재벌들의 기를 꺾어 놓아야 한다는 점을 김종인이 에둘러 이야기한 것이다. ---p.322
6공 들어서는 도무지 헷갈려서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 기업들의 고충이었다. 기업들로서는 돈을 잘 먹고 잘 봐주는 사람이 제일 좋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돈을 안 받거나, 받더라도 그 과정이 복잡한 상대는 싫어한다. 전 대통령이 전자에 속한다면 상대적으로 노 대통령은 후자 쪽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집권 후반에 가서는 노대통령도 잘 받는 쪽으로 돌아섰다).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뜻에서 노 대통령에게 ‘물대통령’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배경에는 아마도 이 같은 기업들의 불만도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p.330
브레이크는 엉뚱한 곳에서 걸렸다. 수차에 걸친 당정회의에서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던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통령후보가 제동을 걸었다. 여당의 차기 대통령후보가 현직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업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때부터 이동통신사업은 본격적인 정치문제로 비화하게 된다. ---p.353~354
사공일은 자신이 곧 장관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금리자유화를 강력히 추진했다. 그는 나름대로 ‘국제화’라는 전체 구도 속에서 금리자유화계획을 설정해 놓고 재무부를 떠나기 전에 오히려 서둘러 밀어붙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퇴임 직전에 실행에 옮긴 금리자유화에 대해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시작이 반’인데 자신이 그 일을 해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후임 장관, 그것도 대학 동기동창에 의해 원점으로 되돌려질 줄은 전혀 몰랐다. ---p.406~407
막상 경제가 다시 어려워지고 국제수지 적자가 통계로 드러나자 정부도 학자들도 뒤늦게 후회와 반성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86~88년의 3저 호황 때 흑자관리를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그걸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경제규모나 관리능력에 비해 과분하게 무턱대고 흑자 내는 데만 매달린 나머지 결과적으로 국내적으로는 물가상승을, 대외적으로는 통상압력을 불러왔습니다.”
양수길 당시 KDI 연구위원의 이 같은 지적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p.439~440
국내 언론들이 “정부는 UR 대책을 미리미리 세우지 않고 왜 지금 와서 허둥대고 있느냐”며 정부를 맹렬히 비판하고 나서자 서울에 주재하던 한 일본 특파원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언론들은 참 이상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 언론은 왜 그토록 잠잠했습니까. 언론 자신부터 UR에 무관심한 채 지내오지 않았습니까. 모두들 우루과이라운드에 반대만 하고 있는데, 정말 우루과이라운드가 성사되지 않는 것이 한국경제에 이롭다고 생각해서입니까.” ---p.452~453
양국의 정상회담으로 수교는 기정사실로 여겨졌으나 정작 도장을 찍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남아 있었다. 첫째로는 소련은 경제협력, 다시 말해 한국의 경제적 지원을 우선적으로 요구했던 반면 한국정부는 수교부터 먼저 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돈을 빌려주는데 그 규모를 얼마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결국 문제는 돈이었다. ---p.487
실무주역이었던 김영주의 말을 더 들어보자.
“김종인 경제수석과 이석채 기획단장의 콤비플레이가 오늘의 사회간접투자 확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제수석이 정치적으로 울타리를 쳐주고, 기획단장이 실무적으로 능란하게 끌어 나갔기 때문에 실무자들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소신껏 할 수 있었습니다. SOC투자는 타이밍이 중요한 법인데, 만약 그때 밀어붙이지 않았더라면 과연 지금의 영종도공항이나 경부고속철이 존재했을까 의문입니다. 논란 속에 시간을 질질 끌었더라면 땅값 상승으로 토지수용 부담은 훨씬 더 커졌을 테고, 민주화 열풍 속에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작업은 갈수록 힘들었을 테니까요.”
---p.499~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