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정아, 넌 아프리카 말 할 줄 아니?” “아프리카 말?” 뜬금없는 물음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래, 너네 조상은 아프리카 사람이잖아.” 정아의 말은 작은 조약돌이 되어 내 이마를 콩 때렸다. 머릿속이 띵, 울리며 멍했다. 아프리카, 아프리카……. 울창한 정글을 헤집고 다니며 사냥을 하는 흑인들, 사막을 가로지르며 타조처럼 달리는 흑인들……. 아주 오래전에 서양 사람들이 아프리카 흑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썼다는 사실, 그래서 흑인들은 백인의 노예가 되어 수백 년 동안 짐승처럼 살았고,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시켰고……. 그런 것쯤은 이미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분명 원초적인 나의 뿌리는 아프리카에도 있을 거다.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아직 한 번도 못했던 걸까? (본문 38쪽)
#2 “우리 순자 좀 찾아 줘유. 지발. 우리 순자 얼굴 한 번 보고 가게 해 줘……. 쿨럭쿨럭.” 어느새 할머니는 아빠 바짓가랑이를 잡고 흔들었다. “아이고, 내 참. 어쩌자고 자꾸 이래요?” 아빠가 발을 구르며 할머니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할머니는 아빠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잠깐 사이에 할머니 눈이 풀어지고,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리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아자씨, 잘못했시유. 지가 잘못했시유. 모든 죄는 지가 가지고 갈팅께 지발유. 야? 아자씨, 지발 부탁이유.” 할머니는 아빠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할머니 정신이 또 다른 세상으로 가 버렸나 보다. 할머니 정신을 요즘 들어 더 자주 오락가락했다. (본문 102쪽)
#3 「오늘 극장에서 벤허를 보았다. 찰턴 헤스턴은 미남 배우다. 우리 아버지도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내 이름은 김찰턴순자다. 김찰턴순자! 멋있다. 아버지를 찾으러 이다음에 커서 미국에 가겠다. 가서 아버지께 꼭 여쭤 보겠다. 왜 우리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냐고. 내가 딸인데 알아보겠느냐고.」 일기 아래쪽에는 ‘찰턴 헤스턴’으로 보이는 남자 사진이 붙어 있었다. 나는 잘 모르는 배우였지만, 얼굴이 검고 눈썹이 짙은 근육질의 남자였다. 얼굴색이 검게 보였지만 흑인은 아닌 것 같았다.(본문1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