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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말할 수 없다

함부로 말할 수 없다

허영한 | 새움 | 2017년 10월 23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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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10월 23일
쪽수, 무게, 크기 216쪽 | 338g | 136*200*20mm
ISBN13 9791187192619
ISBN10 118719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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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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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장 밝게 웃는 친구의 사진을 프린트하기 전 그가 물고 있었던 담배를 포토샵으로 지웠다. 건강을 잃어 먼저 간 자식의 부모가 볼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진에 사실을 들먹일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사진 속 그의 존재는 그의 부재를 말해줄 뿐이었다. 그 사진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존재도, 부재도 아닌, 그사이 어디쯤이었다.
---「사진이 증명하지 않는 것들」중에서

하얀 홀씨 하나가 바람 한 점 없는 허공에서 비스듬히 날아와 아이의 반짝이는 두 눈 위 머리에 내려앉았다. 눈 흰자위에는 가는 핏발이 섰지만 맑고 깊은 눈은 호수 같았다. 남은 한 줌 기력으로 카메라를 들어 아이의 얼굴을 그 속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는 우주를 이고 있었다.
---「사막의 작은 우주 - 사하라에서 1」중에서

버스를 내린 나는 ‘내가 내 외연으로서의 사진으로 누군가에게 아카시아 향수 한두 방울 정도의 위안을 줄 수 있을까. 아니면 누군가 절절한 시간을 견디는 데 한 줌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비 그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시간은 각자의 것이라 받아들이는 다양한 부피와 변화무쌍함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아카시아 향기와 시간 여행」중에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래된 연인들의 사진을 얻어 들고 혼자 산천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오래전 찍힌 사진의 장소에서 바라본 현재의 모습을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세상보다 무겁기도 하고, 깃털보다 가벼울 수도 있는 인간의 관계, 그것도 연애의 순간이 오랜 시간의 더께가 덮어진 이후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 사진적 단상으로 남겨보고 싶었다.
---「사진 속의 시간, 사진 밖의 시간」중에서

불 켜진 창문들은 긴 서간체 소설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편지들처럼 각기 다른 빛을 낸다. 어스름 저녁, 버스나 전철 안의 얼굴들은 모두 다른 빛을 지닌 편지의 발신자이면서 수신자이다. 나는 이런 무렵 낯선 도시에서 드물게 그 순간들을 사진으로 찍기도 했다.
---「창이라는 시간의 통로」중에서

언어의 역할이 직설과 진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암묵적으로 합의된 도덕적 메시지나 교훈들을 사진에 담는 일은 이제 흥미가 없어졌다. 내가 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이다.
---「10년 묵은 약속?사하라에서 2」중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천천히 지나가며 바라보는 주변 풍경과 시속 400킬로미터로 달리는 고속열차 창가에서 보이는 바깥 세상은 많이 다르다. 천천히 지나가서 보이는 것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빨리 지나가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억울한 소피 마르소」중에서

우울은 회의를 낳았고, 우울과 회의는 나를 포함한 현실의 풍경을 유체이탈 상태에서 바라볼 수 있는 제3의 눈을 갖게 했다. 둘은 닮은 듯 달랐다. 새털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사진을 찍는다면, 확신의 눈을 가진 건강한 사람은 하늘만을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만을 취하려 하기 쉽다. 확신하지 못하고 우울한 사람은 좀더 넓은 눈으로 어두운 그늘을 함께 바라볼 것이다.
---「우울과 회의가 할 수 있는 것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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