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롭게도, 얼굴 그 자체는 사실상 어떤 상징이나 원형이 될 수 없다. 머리나 입, 눈은 그럴 수 있어도 얼굴은 그럴 수 없다. 왜일까? 이 이야기는 나중에 “얼굴은 지식의 총체 그 이상”이라고 했던 프랑스 철학자 임마누엘 레비나스를 다루면서 다시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류학 연구에서도 어느 정도는 답을 얻을 수 있다.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 섬의 원주민인 카낙족 노인의 말을 상기해보자. 그는 자신들을 연구하던 한 연구원에게 “당신네(백인)가 우리에게 가져온 것은 육체였다”고 말했다. 서양 문명을 접하기 이전의 카낙인들은 우주와 육체를 달리 보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있어 육체는 자연 세계의 일부였다. 그러다가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육체가 분리된 실체라는 ‘관념’을 갖게 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얼굴’이라는 개념이 생각처럼 그렇게 보편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는 본질적으로 얼굴이 왜 우리의 심오한 상상계 안에서 상징물이 될 수 없는지를 설명해준다.--- p.18
이 신화에서 우리는 페르세우스가 최소한 두 번 태양의 상징과 관계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바로 그 아버지가 제우스라는 점과 모험의 결과로 페가수스를 얻었다는 점이다(페가수스는 제우스에게 벼락 화살을 날라다 준다). 태양의 영웅인 그는 태양이 지는 곳, 서쪽 땅에 사는 괴물과 싸워야 한다. 어떤 분석가는 이 신화가 ‘겨울’에 맞선 생명력의 승리를 담은 이야기라는 그럴듯한 말을 한다(가계도에서 이미 보았듯이 고르곤은 대지와 연관된 괴물이다. 그리고 스쳐 지나는 모든 것들을 ‘얼어붙게’ 만든다). 하지만 더 흥미를 끄는 것은 이 신화 속 머리의 역할과 얼굴 상징이다. 우리는 날개 달린 마법의 신발을 신고 하늘을 나는 페르세우스에게 주어진 임무(메두사의 머리를 베는 것)에 내포된 수직성과 태양 친화성(solar tropism)에 주목해야 한다. 메두사의 머리는 뱀으로 이루어진 머리카락과 수퇘지의 이빨을 가진 존재로 매우 잔인하고 동물적이다. 하지만 페르세우스의 역할은 그 야성을 제압해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반짝이는 둥근 방패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태양의 거울이 여기서는 칼보다 더 위험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메두사는 이 태양을 닮은 방패에 비친 자기 자신,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얼굴, 즉 끔찍한 자아를 보고 ‘얼어붙는다’.--- p.44
디오니소스 숭배에서 연극이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직접적인 연극적 행위와 ‘존재’에서, 우리는 디오니소스 세계가 가지고 있는 본질 즉, 배우는 존재하지만 그 배역은 존재하지 않는 이중성(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삶과 죽음의 만남, 돌이킬 수 없는 운명, 그리고 구분하기 어려운 현실과 환상 등에 감동한다. 오토의 말처럼, “이 이중성은 가면에 그 상징성이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가면을 쓴 사람(배우)은 누군가 다른 사람, 즉 ‘자신이면서 또한 다른 누군가’인 신이나 영웅을 대신해야 할 책임을 부여받는다. 이 배우는 가면을 쓰고 춤을 추던 고대 그리스인의 현대판이다. 이들은 수호신과 소통하는 황홀경이라는 유산을 공유한다. 다른 이의 얼굴을 입은 그는, ‘이중적인 존재(디오니소스)’의 영이 내려주는 은혜에 감화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전 공동체의 주목 하에 그가 구현하고 있는 부재-존재의 신비는 기적이 된다. 하나의 미술 작품에 불과한 가면이 실체가 되고 육체가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다.--- p.76
이 유교 윤리에 따르면, 여성의 매력은 당연히 위험하고 조절되어야 하며 ‘가려져야’ 한다(조선 시대에 상류층 여인들은 집 밖을 나설 때 얼굴을 가렸다). 과부는 재혼할 수 없었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공인된 부인과 살지만 부인이나 부인의 매력과는 분리된 채 점잖게 살아야 한다. 남자는 아버지의 법(장승)을 존중해야 하고, 스스로도 아내에게 강한 남자, 즉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이런 역할이 존중받는 사회에서, 성기가 유발하는 치명적인 유혹은 통제를 받는다. 섬세하고 위험한 용모는 적당한 사회적 역할이라는 가면에 가려지고, 이 ‘얼굴들’ 또는 적당한 가면은 모두를 위한 보호 도구다. 하지만 옹녀나 변강쇠처럼 이 질서를 깨려는 이들에게는 저주다.
지금까지 이렇게 길게 이야기한 이유는 이 유명한 한국 설화에 대해 다른 식의 해석을 제안하기 위해서다. 메두사 신화와 효과적으로 비교하기에 알맞고 흥미로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가면과 성(性), 정체성, 얼굴 간의 깊은 무의식적 관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설화적 예로도 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다음 장에서 전개하고자 하는 심리적, 사회적 정체성의 정의에 있어서 ‘얼굴’의 문제를 잘 보여준다.--- p.119
말 그대로 독특한 육체적 형태는 다른 그 무엇과도 ‘동일성’이 없으므로, 육체 의식(‘자아감’)에 기반을 둔 자기애적, 개인주의적 자아에는 ‘정체성’을 부여할 수 없다. 육체적 모습에 기반을 둔 개인에게는 (여권 사진이 그렇듯) ‘다른 점’이나 특이한 점을 열거함으로써 개성이나 고유성을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의 개성의 근원일 뿐 정체성의 근원은 아니다. 여권 사진 속의 내 얼굴이라 하더라도 경찰의 검문이나 출입국 심사를 받을 경우에는 ‘본래 얼굴’(내 실제 얼굴)과 비교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 이는 특별한 점을 칭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권에 (나의 행정적 ‘정체성’에 대해) 적혀 있는 것의 ‘정체성’과 그 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나)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정의하자면, 정체성은 ‘자신만의’ 특징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거나 다른 범주에 드러내는 것이다. (중략) ‘가면’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잃게 되는 독특한 특징을 교환할 때, 그 가면은 우리에게 사회적 역할(지위)과 책임을 부여한다. 우리는 무엇에 ‘속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공적인 특징을 부여받는다. 이런 식으로 보면, 인간은 마치 가면을 통해 의미를 얻는 텅 빈 껍데기 같다. 인간 개인이 어떤 하나의 역할이라는 사회적 자아로 격하되는 사회에서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pp.136~137
이제부터 살펴보겠지만, 기독교에서는 상황이 더 복잡하다. 그리스도라는 인물에 대해 아주 오래된 문제가 하나 있는데, 알다시피 그는 신성과 인성 두 가지 모두를 갖고 있다(앞서 얼굴과 가면, 기호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급했던 이중성이 흥미롭게도 여기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그의 인성을 고려할 때, 목수의 아들로서의 예수는 언젠가는 죽을 운명을 가진 한 인간으로 표현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정당해 보인다. 특히 박해를 받았던 초기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그리스어의 머리글자를 따서 물고기 등의 추상적인 상징으로 표현하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곧 신의 아들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났고, 이는 일련의 오랜 논쟁을 불러왔다. 예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신의 자식이므로, 예수를 그리는 것은 신의 얼굴을 그리는 것과는 다르지 않을까? 그리고 또 다른 질문 하나, 예수는 잘생겼을까, 못생겼을까? 육체적으로 매력적인 이미지가 아니면서도 잘생길 수 있을까? 못생겼다면, 그 신적 완전성이 훼손되지는 않을까?--- pp.170~171
부랑자 등의 도시 대중이었다. 이 도시 대중의 출현과 함께, 부르주아 계층은 위협을 느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권력을 재확인해야 했고, ‘위험한’ 노동 계층의 정체성과 행위를 통제해야 했다. 신흥 기술인 사진술은 이 일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도구였다. 이런 움직임을 이론화한 사람은 ‘타고난 범죄자’의 이상적인 모습을 설명하고자 했던 악명 높은 이탈리아의 정신의학자 체사레 롬브로소였다. 그의 생각은 범죄자들의 얼굴을 분류해 사회의 모든 ‘타락자들’(강간범, 도둑, 광인 등)을 더 잘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 뒤에는 정체성과 골상학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그저 라바터의 이론을 발전시켜 범죄학에 적용한 것이었다. 범죄가 발생하기 전에 범죄자를 찾아 (그들을 도시나 일정한 지역 밖으로 추방함으로써) 범죄를 예방한다는 것, 그리고 많은 증거를 찾지 않고도 범죄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대부분 환상에 불과했음에도, 부르주아 계층은 이 ‘과학’에서 놀라운 수단을 찾아냈다.--- pp.206~207
얼굴의 표정은 사회에 의해 코드화된다. 사실, 인간의 감정은 전 인류가 무의식적으로 말하는 보편적 언어가 아니다. 일본인이 얼굴에 미소를 띨 경우, 이는 존경의 의미나 당황의 의미 모두 될 수 있으며 반드시 즐거움이나 기쁨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장례식에서의 눈물이나 발작적인 울음 또한 실제로 슬퍼서 나오는 것 일 수 있지만 관습에 따른 행동일 수도 있다. 이렇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언어에서조차 우리는 사회가 정한 규범을 따른다. 사실, 사회는 종종 우리의 얼굴 표정까지 통제한다. 어떤 문화는 유난히 더 억압적이고, 또 어떤 성(性)은 다른 성보다 더 심한 압박을 받는다. 동북아시아에서 유교적 영향하에 사는 남자들은 자신의 기분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무표정한 얼굴은 침착함의 표시이자, 상식 있고 진지한(그래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정신의 표시로 여겨진다. 이 비표현적 가면은 물론 표면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기표현’을 중시하고 ‘투명성’의 개념을 배우며 자란 서구인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감정의 부재, 냉담함, 심지어 잔인함 등의 표시로 여기기 십상이다.--- pp.217~218
안면 이식술의 문제 중 하나는 수술이 동반하는 고통이나 위험 외에도 환자 본인이 새 얼굴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종종 ?게 정체성의 혼란이 오거나 심지어 정체성을 잃는 시기가 찾아오고, 그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정체성을 재구축하는 실질적인 과정이 따른다. 죽은 사람에게서 장기를 이식받는 경우, 환자는 때로 이런 정체성 재구축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안면 이식은 이 문제를 새로운 윤리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심장이나 간과는 다른, 누군가의 얼굴, 즉 눈에 보이는 기관을 환자에게 주는 수술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인간의 내면은 그대로다.
--- p.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