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노스탤지어에 젖어 ‘좋았던 옛 혁명기’를 재상연하자는 것도 아니고, 낡은 강령을 ‘새로운 조건’에 맞게 기회주의적·실용주의적으로 조정하자는 것도 아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라는 조건에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1914년의 재앙으로 오랜 진보주의 시대가 정치·이데올로기적으로 붕괴한 뒤에 혁명적 기획을 다시 만들어낸 레닌의 행동을 현재의 세계적인 조건에서 반복하자는 것이다.
--- p.22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평화(나아가서 진정으로 민주적인, 진정으로 명예로운 평화)를 얻으려면, 지주와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와 가장 가난한 농민이 정치권력을 손에 쥐는 것이 필요하다. 지주와 자본가는 주민 가운데 얼마 안 되는 소수를 대표할 뿐이다. 게다가 모두 알다시피 자본가들은 전쟁에서 엄청난 이익을 얻고 있다.
노동자와 가장 가난한 농민은 주민의 압도적 다수다. 그들은 전쟁에서 이익을 보지 않는다. 오히려 파멸과 기아로 내몰리고 있다. 그들은 자본이나 자본가 약탈 집단들 사이의 조약에 묶여 있지 않다. 그들은 전쟁을 끝낼 수 있고 또 진심으로 그것을 바란다.
--- p.88
“혁명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판에 박힌 의례적 표현으로, 관습적인 통칭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본다면, 민주주의자라는 것은 소수가 아니라 인민 다수의 이익을 현실적으로 계산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혁명가라는 것은 낡고 해로운 모든 것을 가장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사람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p. 137
중간 길은 없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 혁명의 근본적 모순이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에서는, 특히 전시에는 가만히 멈추어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 전진하거나 후퇴해야 한다. 혁명적인 방법으로 공화제와 민주주의를 쟁취한 20세기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로 전진하지 않고, 사회주의를 향하여 걸음(이 걸음은 기술과 문화 수준에 의해 제한되고 결정된다. 대규모 기계 생산은 농민 경영에는 ‘도입’될 수 없고, 설탕 산업에서는 폐지될 수 없다)을 내딛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 p. 171
권력의 문제는 회피하거나 옆으로 치워둘 수 없다. 권력은 혁명의 발전에서, 그리고 대외 정책과 국내 정책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핵심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혁명이 권력 체제를 놓고 동요하면서 여섯 달을 ‘허비’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자혁명가당과 멘셰비키의 동요하는 정책 때문이다. 결국 이 정당들의 동요하는 정책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에서 프티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입장, 그들의 경제적 불안정성에 기인한다.
--- p.183~184
마르크스는 “봉기는 전쟁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술”이라는 말로 이러한 진실을 놀랍도록 명료하게 표현했다. 마르크스는 이 기술의 주요한 규칙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 봉기를 절대 장난삼아 하지 말 것이며, 시작할 때는 끝까지 가야만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라.
(2) 결정적인 순간과 결정적인 지점에 훨씬 우월한 역량을 결집하라. 그렇지 않으면 준비와 조직에서 더 나은 적에게 봉기군이 참패할 것이다.
(3) 일단 봉기가 시작되면 최대한 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공세를 취해야 한다. “방어는 모든 무장봉기의 죽음이다.”
(4) 적을 기습하여 적의 역량이 분산된 순간을 노려야 한다.
(5)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매일(한 도시의 경우라면 매 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승리를 거두려고 노력해야 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정신적 우월성”을 유지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무장봉기와 관련하여 모든 혁명의 교훈을 이런 말로 요약했다. “지금까지 혁명적 정책의 최고 대가인 당통은 이렇게 말했다. 대담하게 행동하고, 대담하게 행동하고, 또 대담하게 행동하라(de l’audace, de l’audace, encore de l’audace).”
--- p.250~251
동지들, 볼셰비키가 늘 그 필요성을 이야기해왔던 노동자와 농민 혁명이 완수되었다.
이 노동자·농민 혁명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의미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소비에트 정부, 우리 자신의 권력 기관, 부르주아는 전혀 참여하지 않는 권력 기관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억압받는 대중은 스스로 권력을 창출할 것이다. 낡은 국가기구는 그 기초까지 박살날 것이며, 새로운 행정기구는 소비에트 조직이라는 형태로 세워질 것이다.
이제부터 러시아 역사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된다. 이것은, 러시아 3차 혁명은 결국 사회주의의 승리로 귀결될 것이다.
우리의 긴급한 과제의 하나는 전쟁을 즉시 끝내는 것이다. 이 전쟁,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자본 자체와 싸워야 한다는 것은 이제 모두가 분명히 알고 있다.
우리는 이 과제에서 세계 노동계급 운동의 지원을 받을 것이며, 이 운동은 이탈리아, 영국, 독일에서 이미 전개되기 시작했다.
국제 민주주의를 향한 정의로운 즉각적 평화 제안은 어디에서나 국제적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신뢰를 강화하기 위해 모든 비밀 조약은 즉시 공표되어야 한다.
러시아 내에서 농민의 대다수가 자본가들과는 오랫동안 함께 놀았다면서, 이제 노동자들과 함께 행진하겠다고 말했다. 이제 토지 소유를 끝장내는 단 하나의 법령이면 농민의 신뢰를 얻게 될 것이다. 농민은 노동자들과 동맹을 맺을 때에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의 진정한 생산 통제를 제도화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방금 완료된 혁명이 그 근거다. 우리는 대중조직의 힘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것은 모든 것을 극복하고 프롤레타리아를 세계혁명으로 이끌 것이다.
우리는 이제 러시아에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세계 사회주의혁명 만세!(우레와 같은 갈채.)
--- p.287~289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내재적인 ‘증상’(억압된 것들의 복귀)으로서, 자본주의의 ‘정상적’ 논리의 외부에 있는 우연한 일탈이 아니라 그 ‘진리’로 들어가는 열쇠다. 이 말은 오늘날의 상황에도 적용된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그 다문화주의적 관용의 결함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신우익의 폭력과 불관용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적 보편주의와 인종적·종교적 근본주의 사이의 대립을 넘어서고자 한다면, 그 첫 단계는 자유주의적 근본주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 무지막지한 침해는 무시하면서 연쇄살인범이나 전범 용의자의 권리가 침해받았을 때는 법석을 떠는 도착적 게임 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입장은 두 극단 사이의 동요를 통해서 그 도착적 경제를 드러낸다. 즉 피해를 본 타자(무력한 아이들, 강간당한 여자들……)에게 매혹되거나 아니면 문제가 되는 타자에 초점을 맞추는 것 사이에서 동요하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타자는 비록 범죄자 등등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그이지만 내일은 우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인권을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노엄 촘스키[Noam Chomsky]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수정주의적 입장을 옹호하는 프랑스 책을 방어하고 나선 것이 아주 좋은 예다).
--- p.19~20
현상이 중요하다. 현상이야말로 본질적이다. 우리는 사물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그 방식에 무조건 반대할 수는 없다. 이런 현상은 사물 그 자체보다 더 무게를 지닌다. 왜냐하면 현상은 그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 관계를 맺는 망에 기입되는 방식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상품 물신주의’는 상품이 주체에게 나타나는 방식의 좌표를 제공하며, 이런 현상이 그 객관적인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 정신분석에서 ‘환상’은 어떤 틀을 제공하는데, 그 틀 안에서 대상이 그것을 욕망하는 주체에게 나타나며, 이 틀은 주체가 ‘실재’로서 경험하는 것의 좌표를 구성한다.
--- p.53~54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레닌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 경제는 핵심 영역이다. 전투는 거기에서 결정 날 것이며, 우리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마법을 깨야 한다. 그러나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진정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 지금은 무자비하게 이윤을 추구하는 대기업이 악당으로 등장하는 할리우드의 ‘사회 비판적’ 음모론 영화들(가령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에서 「인사이더」까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반자본주의’인 상황에서 ‘반자본주의’라는 기표는 그 전복적 자극을 상실했다. 오히려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이 ‘반자본주의’의 자명한 대립물이다. 즉 정직한 미국인들이 간직한 민주주의적 내용물이 음모를 깰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것이 오늘날 전 지구적 자본주의 세계의 단단한 핵심이며, 그 진정한 ‘주인-기표’다. 즉 민주주의인 것이다.(중략)
그래서 반지구화 운동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자명한 것으로 언급하는 태도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레닌의 궁극적 교훈이다. 역설적으로 이 방법으로만, 즉 민주주의를 문제 삼아야만, 다시 말해 그 개념 자체에서 선험적인(헤겔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사실 자본주의적인 사적 소유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으로 될 수 있다.
--- p. 268~269
중앙은행이라는 (분명히 낡은) 예를 오늘날 ‘일반 지성’의 완벽한 후보라고 할 수 있는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 www)으로 바꾸면 어떨까? 도로시 세이어스(Dorothy Sayers)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사실 선구적인 추리소설 이론이라고 주장했다. 가엾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추리소설을 몰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비극의 예만 들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레닌은 사실 월드와이드웹의 역할에 관한 이론을 개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그는 월드와이드웹을 몰랐기 때문에 불쌍한 중앙은행만 언급해야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월드와이드웹이 없으면 사회주의도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의 임무는 단지 이런 훌륭한 기구에서 자본주의적으로 왜곡된 부분을 쳐내고, 그것을 더 크게, 더 민주적으로, 더 포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낡고, 불명예스럽고, 반쯤은 잊힌, 마르크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변증법을 되살리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 p.318~319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레닌을 되풀이하는 것은 ‘레닌이 죽었다’는 것, 그의 특수한 해법이 실패했다는 것, 그것도 아연할 정도로 실패했다는 것, 그러나 그 안에 구해낼 가치가 있는 유토피아적 불꽃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레닌을 반복한다는 것은 레닌이 실제로 한 일과 그가 연 가능성의 영역을 구분한다는 뜻이다. 레닌이 실제로 한 일과 또 다른 수준, 즉 ‘레닌 내부에서 레닌 자신을 넘어선’ 것 사이의 긴장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을 반복한다는 것은 레닌이 한 일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지 못한 일, 그가 놓친 기회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레닌은 다른 시간대에서 온 인물처럼 보인다. 중앙집권적인 ‘당’의 개념 등이 ‘전체주의적 위협’으로 다가온다는 말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가 적절하게 관련을 맺을 수 없는 다른 시대에 속한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레닌이 낡았다는 증거로 읽는 대신, 어쩌면 그 반대의 추측을 하는 모험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레닌의 이런 불가해함이 우리 자신의 시대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표시라면 어쩔 것인가? 우리가 레닌을 관련이 없는 것으로, 우리의 포스트모던 시대와 ‘어긋난’ 것으로 경험한다는 사실이 우리 시대 자체가 ‘어긋나 있다’는, 어떤 역사적 차원이 우리 시대로부터 사라지고 있다는 훨씬 더 불안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주장이 헤겔의 악명 높은 경구에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헤겔은 9번째 행성(명왕성)이 발견되어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행성은 8개밖에 없다는 자신의 연역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자 이렇게 말했다. “사실한테는 그만큼 더 나빠진 셈이로군!” 우리가 거기에 다가간 것이라면 우리는 이 역설을 완전히 떠안을 준비를 해야 한다.
--- p.361~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