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사할까 봐. 그렇게 들렸다. “어?” 나는 책에서 얼굴을 들고, 몸을 비틀어 다케오를 보았다. 다케오는 끔찍하도록 심각한 표정이었다. “어디로?” 되물은 나의 말이 평스러웠던 것은, 그것이 설마 다케오만의 이사 -나와의 헤어짐 -라고는 생각 못 했기 때문이다. “상관은 없지만, 하지만 왠데? 지금 사는 이 아파트, 굉장히 마음에 든다면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멍청하다. 자기가 차였다는 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이사는 나 혼자서, 그러니까 말이지.” 그러니까, 라고 말해놓고서 다케오는 우물쭈물했다. “……그러니까 음, 그렇다는 거야.” 화창한 일요일, 우리는 매화가 한창인 공원에 있었다.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매화는 짙은 고동색 뾰족한 가지 끝으로 사방에 청결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백초원이란 과장스러운 이름에 비하면 아담한 공원, 꽃이 핀 아주 한정된 장소를 제외하면 사람들도 거의 오가지 않았다. “뭐?” 찻집 앞 평상에서 나는 책을 읽고, 다케오는 단술을 마시고 있었다. 다케오의 표정으로 보아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알았어, 라고 말했다. 마시던 주스 컵은 거의 비었고, 잘게 부서진 얼음이 엷은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8년. 물론 그것은 상당히 오랜 세월이다. 알았어, 란 한 마디로 끝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달리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 p.9~10
“다케오 씨?” 천진한 목소리가 들리고,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전체적으로 탄력 있고 자그마한 인상이다. 얼굴은 예쁜데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야만적이다. 몇 살이나 됐을까. 아주 어릴지도 모르겠다. “아 다행이다, 돌아와서. 커피 마시고 싶은데, 커피 메이커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정말 아름답고 - 청순한, 이란 형용사를 모양으로 빚은 듯한 웃음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긴 여자의 눈에도. “놀랐잖아.” 다케오가 말했다. 나는 그 얼빠진 목소리에 놀랐다. 후후후, 라고 여자는 소리 내어 웃었다. “왜?” 남자용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헐렁한 청바지에 요트 파카를 입고 있다. 물론 다케오 것이 아니다. “아니, 오랜만이라서.” 자기 집에 엉거주춤 들어가는 다케오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몹시 비참한 기분이 든다. “나, 갈게.” 문을 닫고 나는 곧바로 계단을 내려갔다. 타인의 방을 엿보고 말았다. --- p.22~23
그렇게 우리의 공동 생활은 시작되었다. 하나코가 살 곳을 찾을 때까지. 하나코는 같이 생활하는 사람으로서 뜻밖일 정도로 우수했다. 하나코는 타인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방약무인이다. 그리고 타인이 신경쓰도록 하지도 않는다. 당연한 일이듯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하나코는 동물 같지도 식물 같지도 않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그 사실을 의식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살아 있음의 거추장스러움이 없는 사람, 생기가 없다는 뜻에 아주 가깝다. 그러면서도 음침한 느낌은 없고, 오히려 건조하고 밝다. 예를 들어, 같이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난 곁에 하나코가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옆에 새 구두가 한 켤레 놓여 있는, 그런 느낌. 다케오에게서 전화가 걸려와도 나는 하나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른다. 물론 말을 꺼낼 기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어딘가에, 다케오 위에 서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나코는 나의 히든카드였다. 한편, 하나코와 함께 있으면 때로 내가 다케오의 시선을 대신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그것은 몹시 서글픈 인식이었다. 나는, 하나코에게 휘둘리고 있는 다케오에게 휘둘리고 있다. 하나코의 일상은 그야말로 수수께끼였다. 하나코는 일하지 않았다. 외출도 하지 않는다. 짐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겉옷 몇 벌과 속옷, 신발 두 켤레, 칫솔, 치약, 껌, 라디오, 책 한 권, 담요 한 장, 로션 한 병, 립스틱 한 개, 그게 전부였다. 따라서 집 안 풍경은 하나코가 출현하기 전과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언제까지 있을 건데?” 가끔 나는 물었다. “있을 수 없을 때까지.” 하나코는 언제나 그렇게 대답했다. --- p.44~45
며칠 전, 학원에서 한 학생이 남자하고 여자하고 어떻게 하면 연인 사이가 될 수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나오토란 열 살짜리 남자애, 작은 나무 상자에 마무리 니스 칠을 하고 있을 때였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나오토가 알면 가르쳐줄래?” 나오토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페로몬이죠”라고 말했다. “남자나 여자나 이때다 싶을 때, 상대방에게 페로몬을 바바바방 뿜어내서, 그래서 연인이 되는 거래요.” 바바바방.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정말이에요. 우리 아빠가 그랬어요.” 알루미늄 창틀에 괴고 있어서 팔꿈치가 아팠다. 빨갛고 긴 흔적이 남았다. 이것이 현실이다. 객관적인 나의 현실. 그리고 이제 곧 다케오가 이리로 온다. 하나코에게 페로몬을 바바바방 뿜어내기 위해. --- p.57~58
침대에 벌렁 누워 다케오를 생각한다. 다케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학생 시절. 가엾은 다케오. 하나코는 다케오를 사랑하지 않는다. 여름 캠프 떠나기 전날, 하나코는 분명하게 그렇게 말했다. 이 방에서, 이 벽에 기대어. 방에서 모기향 냄새가 났다. 하나코는 목욕을 하고 온몸에 샤워코롱을 발랐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무슨 노래 좀 해봐.” 하나코가 말했다. “다케오 씨가 그러던데. 넌 늘 노래를 흥얼거린다고.” “……늘 그런 건 아니야.” 침대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얼굴을 들고 불만스럽게 말했다. 하나코는 피식 웃었다. “그야 물론 그렇겠지만.” 방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는 몹시 답답했다. “다케오 씨, 널 굉장히 좋아하는가 보더라.” 웃기고 있네, 하고 생각했다. 웃기고 있네. 그래서 하나코에게 말했다. 너 농담하는 거니? 하나코는 그저 웃기만 했다. “다케오 씨, 자상한 사람이야.” 내가 말하자 하나코는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다케오 씨, 안 좋아해?” 좋아해, 라고 말하고 하나코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더 이상 난처한 표정이 아니다. 늘 보는 온화한 표정. “사랑해?” 다시 묻자, 우습다는 듯 후후후, 하고 웃고는, 아니, 라고 대답했다. 나는 가슴이 아팠다. 정말. “앞으로도?” 응, 이라고 하나코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나는 왠지 두려웠다. 거의 소름이 끼칠 정도로. 라디오에서 페어그라운드 어트랙션의 곡이 흘러나왔다. “노래는 다음에 불러줄게.” 내가 말하자 하나코는 미소 지으며, 그래, 라고 말했다. 한 치의 동요도 없는 아름다운 미소라고 생각했다.
--- p.70~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