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기술주의의 망상을 머릿속에서 과감히 지워내려면, 우리의 뇌리에 자명하게 자리 잡고 있는 ‘기술은 무고하다’, ‘기술은 순결하다’는 기술 중립론을 지워내야 한다. 기술은 너무 좋고 쓸 만한데 이용하는 특정 인간들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당신의 순진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알고 보면 기술은 온갖 사회적 맥락과 권력 관계 사이 촘촘하게 연결된 망들 한가운데 놓여 있다. 예컨대,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마트폰만큼 복잡한 물건이 어디 있겠는가. 하드웨어만 두고 보아도 디자인, 표준과 특허 전쟁, 국제 노동 분업에 의한 중국 공장 노동자의 자살과 ‘죽임’(사회적 타살), 통신사의 약정계약 종속 등 스마트폰의 정치경제학이 그 안에 처절하게 자리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보면, 앱 시장 경쟁, 운영 체제 전쟁, 이용자 해킹과 탈옥 문제, 저작권과 로열티 배분 등이, 그리고 기술문화 면에서는 신모델 출시와 소비 구매의 지칠 줄 모르는 욕망, 언제 어디서든 가능한 연결에 관한 신화, 이동하는 기계-신체의 수렴(이른바 포스트휴먼의 탄생), 자발적 감시의 일상화 등이 이 작은 모바일 전자기계에 웅크리고 있다. --- p.27∼28
오늘날 우리가 눈여겨보는 데이터는 기존의 공식적 지식과 상징적 질서에서 논의되었던 의미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들을 넘어선다. 오히려 인간 내면의 은밀한 감정과 표정의 비정형적 흐름이 전자적으로 치환된, 누군가에 의해 분석을 기다리는 새로운 형식값에 가깝다. 이들 데이터는 공식화하고 객관화된 지식을 구성하는 요소라기보다는 끊임없이 갱신되고 조합될 운명의 불안정한 개성 없는 재료들과 같다. 즉, 개별로는 특정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지만 쌓이고 관계 맺으면서 지식 이상의 값을 만든다. 데이터는 이를 근간으로 기업 이익을 산출하는 시장 안에서 암묵적으로 홀대받던 지위로부터 벗어난다. 데이터는 이제 자본의 가치 기제를 떠받치는 새로운 비물질 에너지가 되고 있다. --- p.42∼43
데이터 알고리즘 사회는 인간을 포스트휴먼의 단계에 적정한 생체-정보기계로 진화하도록 유도하면서, 동시에 말과 글로 발화되지 않는 인간의 생체리듬 깊숙한 부분까지도 데이터 신호로 포착되도록 변형한다. 몸의 땀, 수분, 혈압, 맥박, 뇌파, 감정의 기복, 생체리듬, 건강 상태 등 모두가 실시간 데이터로 전환된다. 이들 생체 데이터는 개별 신체와 연결된 생체-정보기계 알고리즘에 의해 해석되기 위해 저 멀리 어딘가로 흘러들어 집적된다. 이러한 생체 정보는 디지털 헬스케어를 업으로 삼는 다국적 기업들은 물론이고, 보건 당국, 건강보험공단, 복지 시스템, 수사 기관 등 생체-정보기계의 형성에 관여하는 국가와 관련 기관들에 매순간 공급되고 분석된다. --- p.65
헉슬리가 예언했던 데이터 과잉의 오늘날인 ‘멋진 신세계’가 보여준 바처럼, 전통적 방식의 오웰식 통제와 전자 감시 또한 꾸준히 무한 확장하고 있다. 인간 신체에 작동하는 현대 권력의 모습은 오웰식 광학 전자 장치의 무작위 정보 수취와 함께, 이제 보다 은밀하게 진행된다. 개별화된 바코드 각인, 신체 피부 아래 삽입된 칩, 인간 동공 및 홍채 인식과 식별의 데이터베이스, 위성 인식 장치를 통한 신원 관리, 인간 게놈지도 매개형 생체 정보의 관리 등은 상상에서 현실의 통치 기술로 점차 자리 잡고 있다. 이 모든 기술이 대단히 불쾌한 것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도통 감을 잡기 어려운 비가시권의 영역으로 감시와 통제의 발원지를 점점 더 숨긴다는 데 있다. --- p.87
무엇보다 제4차 산업혁명의 가장 큰 문제는, 실제 이것이 일상 시민들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 것인지 그 어느 누구도 해명하거나 이해시키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그저 대세의 논리요, 고용과 국부의 문제일 뿐이다. 국내 정보통신 정책사를 다 훑어봐도, 동시대 시민 대중의 기술 참정권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시민의 기술에 대한 참정권 없이 진행되는 현재 디지털 혁신론이나 비판론은 맹목으로, 이는 결국 현실 지배적인 기술 권력의 지형을 오히려 공고화할 공산이 크다. 테크놀로지 혁신과 혁명이란 이름으로 또 다른 야만의 시장을 미화하는 효과 또한 가세할 것이다. --- p.118
국내 유통 시장의 틈새를 밀고 들어와 우후죽순 격으로 생성되고 있는 플랫폼 사업자들, 예컨대, 여기어때, 직방, 요기요, 배달통, 배달의 민족, 알바천국, 알바몬 등은 중소 상인들과 이용자를 연결해 유통 수익을 남기는 새로운 유형의 O2O 기업들이다. 이들 플랫폼들은 대체로 이미 존재하는 시장에 브로커로 참여해 유통 효율성을 증대시키면서도 이윤 배분의 옥상옥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더 우려되는 부분은 O2O 플랫폼을 위해 오토바이 배달과 알바 일을 하는 수많은 프리랜서들이다. 알바 노동자들은 밑바닥 노동을, 그리고 대부분의 중소 가맹 점주들은 본사의 ‘갑질’은 물론이고 플랫폼 사업자가 강요하는 유통 수수료의 큰 부담까지 떠안게 되었다. --- p.134
메이커 문화는 사회적 지배 권력이 강요하는 블랙박스의 암흑 논리를 벗어나 기술 대상을 뜯어보고 요리조리 살펴 우리의 성찰적 설계를 행하는 행위, 즉 또 한 번 이른바 ‘역설계’의 지혜와 맞물린다. 역설계는 디지털 문식과 관련해서 앞서 짚어본 것처럼, 닫혀 있는 상업 기술과 기계의 설계 방식을 이해하고 이를 주체적 의도에 맞게 완전히 새롭게 재설계하는 행위를 지칭한다. 이와 같은 역설계의 현대적 장인 감각을 키우는 일은 향후 인간의 생존과 연결된 지속가능한 기술의 생성적 지혜를 키우는 데 필수적이다. 역설계는 오직 소비만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시장 상품 논리를 우회해 우리 스스로 만들고 고치고 쓸 수 있는 자생의 메이커 문화를 추동한다는 점에서 급진적 함의를 지닌다.
--- p.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