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민주주의는 아르케(arche, 원리)를 갖지 않는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인민에 의한 지배라는 원리 이외에는 속이 비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평등, 자유, 권리, 관용 등의 가치는 교육을 통해 채워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교육 사이의 긴장이 발생한다. 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라고 하여 인민에 의한 지배라는 원칙이 훼손당해서도 안 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 없이 속이 빈 민주주의는 지속되기 어렵다. 특히나 지금처럼 어마어마하게 복잡해진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교육받고 사려 깊고 민주적인 감각을 지닌 인민을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필요한 교육을 받은 인민이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교육에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판단력이 포함된다.
이는 교육이 민주주의에 늘 내재된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민주주의교육은 인민에 의한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시민의 양성이라는 교육 목표가 서로 만나면서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친다는 것, 그리고 민주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은 영원한 떨림이다.
--- p.8~9
민주주의가 ‘민중의 힘’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좋은 교육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꽃피우지 못하는 것은 좋은 교육을 하지 못하는 이유와 다를 게 없다. 좋은 교육을 할 수 없게 하는 사회, 그리고 그에 순응하는 학교가 문제다. 물론 여기서 학교는 바로 우리다.
--- p. 31
본래 민주주의는 탁월함에 저항하는 것이다. 탁월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나라를 다스리고 정치를 하는 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자격이 없다고 여겨져 온 사람들이 평등하게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정치는 시작된다. 정치는 열등한 존재에 대한 우월한 존재의 지배를 전제하는 아르케(arche) 논리와의 단절이며, 유식한 정신과 무지한 정신, 똑똑한 자와 바보 같은 자로 분할되어 있는 신화 속에서 무지하고 바보 같다 여겨지는 자에게서 정치의 가능성을 찾는 일이다. 그러므로 정치의 조건은 평등이고, 평등은 해방을 향해 나아간다. 스스로 지능에서 열등하다고 믿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그들이 빠져 있는 늪, 즉 자기 무시의 늪에서 빼내는 것이 바로 교육이 해야 할 일이다.
--- p. 36
문제는 시민교육의 방법에 관한 합의가 없었고, 가장 심각한 건 강사들이 학생들을 시민으로 만들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설령 내가 좋은 시민의 삶을 살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 삶과 판단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다. 사실 시민으로서의 삶이란 학습되는 게 아니라 경험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최상의 교육은 내가 시민의 삶을 더 열심히 살아 그 삶이 주변에 울림을 만드는 것이다. 굳이 따라오라 설명하지 않아도 공명할 수 있는 교육의 관계, 그것이 민주주의 아닐까?
--- p.56~57
흑역사 그 이후 내가 마음에 각인시키려 한 것은 선정을 베푸는 온화한 임금의 얼굴을 벗고 나도 공동체의 1/n이 되자는 것이었다. 일단은 관료적인 통제 방식의 권력을 쓰지 않기로 했다. 상벌점을 매기거나 생활기록부에 기재하거나 칭찬 스티커를 주는 식으로 나의 ‘교육적’ 목적을 학생들에게 관철하고 싶은 유혹과 싸우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물론 이미 조·종례 시간과 수업 등을 통해 교사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 나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권력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 지식이나 지위를 권력으로 활용하는 것을 꼰대 짓의 중요한 지표로 삼고 경계하면서 공동체의 1/n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 p.91
한편으론 교육과 민주주의가 본질적으로 완전히 양립 가능한지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예컨대, 교육 활동의 핵심 중 하나는 교육과정이다. 국가 차원의 교육과정까진 아니더라도 개별 수업 내에서라도 학생이 스스로 교육과정을 짤 수 있는가(교사가 열어 놓은 선택의 장 내에서 학생이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 활동에서 교사가 주도적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또 모든 사안(그것이 학생들의 다수결로 결정된 사안이라도)을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하고 행동케 하는 것을 무조건 지지할 수 있을까. 물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도 위험한 길로 빠지지 않는 학생들이 있다. 허나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많다. 이 경우 교사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존중’과 ‘방기’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 p.130
나는 민주시민교육이 별개의 교육과정으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학교를 비롯한 사회에서의 일상이 청소년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여 구성되는 것만으로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전달하는 내용에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내용이 이야기되는 과정에서부터 민주주의는 작동한다. 세월호를 추모하라며 학생에게 노란 리본 달기를 강제하는 학교와 노란 리본을 단 학생에게 벌을 주는 학교 그 어느 쪽도 민주적이지 않다. 민주주의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를 경계하는 사상이다. 한 조직, 사회를 구성하는 존재 자체가 있는 그대로 존중되고, 존재들의 의사가 충분히 이야기되며 결정 과정에 반영되는 것이 민주적인 게 아닐까.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것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각 주체들 사이에서 발현된다. 이것은 유보할 수도 실험할 수도 없는 속성의 것이다.
--- p. 155~156
나는 민주시민교육이 교실에서의 ‘수업’이 아니라 학교생활 그 자체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민주주의가 단순히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학교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삶의 한 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학교 내 의사 결정 시스템이나 지배(통치)의 민주성뿐 아니라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과정과 생활의 민주성이 민주시민교육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될 수 있다.
--- p.176쪽
민주시민교육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민주 시민으로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다 되지 않는다. 학생들의 삶은 학교 안에서만 이루어지지도 않고, 또 학교 안에만 갇혀서는 시민으로 산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두에서 학교교육 자체의 한계를 언급했다. 이는 학교교육의 결함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학교가 모든 것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민주시민교육은 ‘뺄셈’을 통해, 학교교육의 부담을 덜고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다양한 삶을 살 수 있게 보장함으로써 가능해질 것이다.
--- p.186
18세 선거권 반대 주장 중 가장 빈도가 높은 것이 ‘학교가 정치판이 될 수 있다’라는 이야기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말 자체는 청소년과 학교에 대한 편견을 담고 있다. 노동자들에게 참정권을 보장하면 일터가 정치판이 될 것이라거나, 여성에게 참정권을 보장하면 (여성이 가사 노동을 주로 한다는 편견 속에) 집안이 정치판이 될 거라고 우려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이를 차치하고라도 학교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반대의 상황을 우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18세 선거권이 실현되더라도 학생들의 정치 활동이나 발언 등을 학교에서 금지하고 변화를 거부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청소년들에게 정치적 자유가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면 18세 선거권 자체도 그 의미가 무색해지기 쉽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의 과정 역시 부정 선거를 막고 공정하고 직접적인 선거 제도를 쟁취한 것이 전부가 아니다. 언론의 자유 보장이나 정당 활동 보장, 고문 금지 등 인권 보장 역시 민주화의 중요한 한 축이었다. 애초에 자유롭게, 두려움 없이, 말하고 듣고 모일 수 없다면 선거에 과연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겠는가?
--- p.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