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사회학의 예술-되기
1. 여성이 될 것인가, 여성-되기를 할 것인가
1) 좌초된 ‘다른 삶’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의 주인공 ‘미녀’는 마을 처녀들의 선망의 대상인 청년의 청혼을 거절한다. 외모를 가꾸고 가사에 전념하는 여느 여자들과 달리 미녀는 오직 책과 벗하면서 살아간다. 늘 시골마을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꿈꾼다. 한편 젊고 멋진 왕자는 외모만 가꾸었지 마음을 가꾸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녀의 마법에 걸려 야수가 된다. 끔찍한 외모로도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마법은 풀리게 된다. 하지만 야수는 자신의 모습을 비관한 나머지 외롭게 살면서 성격마저 포악해진다.
미녀와 야수의 만남은 두 젊은이의 삶에 다른 선을 긋게 한다. 미녀는 야수로 인해 꿈꿔오던 다른 삶을 살게 되고 외모만큼이나 거칠던 야수의 마음에는 미녀에 대한 사랑이 싹트게 된다. 이 만남은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이나 멋진 왕자로서의 삶을 벗어던지고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계기로 작동한다. 야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에는 미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은 그들에게 본래 자신의 일상적 삶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시간들이다. 야수의 진심을 안 미녀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녀 또한 사랑고백을 한다. 하지만 그 순간, 야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평범한 여성의 삶에서 도주하려는 그 순간, 야수는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평범한 선남선녀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미녀와 야수. 일상적 삶으로부터 일탈은 종결을 고한다. 이제 왕자의 사랑을 얻게 된 미녀와 왕자가 되어버린 야수에게는 일상적인 삶을 살아내는 문제만 남게 되었다.
‘미녀’는 무언가 다른 삶을 기도하면서 쉽지 않은 사랑을 선택했지만 야수가 왕자로 되돌아와 버렸기에 결코 다른 삶을 실현할 수 없다. 삶의 여정에서의 일탈은 언제라도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일상에서의 이탈 혹은 도주는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법이다. 여성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성으로서의 삶과 여성-되기의 삶을 구분한다. 일탈은 여성으로서의 삶이겠지만 이탈 혹은 도주는 여성-되기의 삶이다. 이 글은 우선 ?천개의 고원? 10장에서 말하는 여성-되기가 무엇인지 밝혀보고, 더 나아가 현대의 여성주의 담론들이 여성-되기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궁극적으로는 여성-되기란 여성주의 담론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2) 모방을 넘어
먼저 들뢰즈와 가타리의 여성-되기를 논하기 전에 ‘-되기’가 무엇인지, 그 배경에는 어떤 철학이 숨겨져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논의는 조금은 복잡하지만 난해하기로 유명한 두 사상가의 주장을 따라가 보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
‘-되기(devenir-, becoming-)’의 개념은 들뢰즈의 생성 철학의 핵심이다. 서구의 전통철학이 본질적이고 불변하는 초월적 ‘존재(etre, be)’에 대한 사유를 기본으로 삼는데 비해 들뢰즈는 존재와 동일시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성’을 사유한다. 생성의 사유에는 존재의 사유가 지닌 고정된 이미지가 없다. 대신 생성은 움직임, 운동, 변화를 사유한다. ?의미의 논리?에서 루이스 캐롤의 작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인공 앨리스는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앨리스가 자란다’에는 동시에 커지고 작아지는 움직임, 운동, 변화가 내재되어 있다. 이것이 생성이다.
‘-되기’ 또는 생성이 들뢰즈의 사유에서 부각된 것은 스피노자의 영향이다. 스피노자는 개체들의 결합 관계에 따라 다른 모습이 되는 것을 양태라고 말하고 이 양태들의 변형을 변용이라고 한다.(SPP, 71:76) 들뢰즈는 모든 양태는 이행과 해체를 통해 관계를 맺으며 따라서 개체는 오로지 운동과 정지, 느림과 빠름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될 수 있다는 데에 주목한다. 개체들을 구별하게 해주는 속도와 운동 관계가 들뢰즈에게는 바로 되기이며 생성이다. 개체는 이러저러한 연결접속 관계 속에서 다른 개체의 부분이 되며, 이 되기의 운동은 무한히 계속된다. 되기를 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으로의 변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속도와 힘을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의 생성의 사유는 가타리와의 공동저작들에서는 ‘-되기’라는 용어로 자주 등장한다. 그들이 말하는 ‘-되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우선 ‘-되기’는 모방이 아니다. 모방은 유사, 유비, 동일시의 관계이기 때문이다.(MP,338:452) 반면 ‘-되기’에서 개체의 한 요소는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에 의해 다른 개체의 한 요소와 접속하는데 이 접속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개체는 이전의 다른 두 요소와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닌다. 두 요소가 어떤 것이었는가가 아니라 두 요소의 연결접속이 어떤 관계인가가 중요하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