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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왕을 만나다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탐방기 (황릉편)

김선회 저 / 김종택 사진 | 천지인 | 2011년 08월 2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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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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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1년 08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20쪽 | 380g | 153*224*20mm
ISBN13 9788993753172
ISBN10 8993753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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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책자나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는 병마용은 유약을 바르기 전의 도자기 모습처럼 황토색을 띤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원래 병마용은 대부분 채색이 돼 있었다. 병사들의 머리는 검정색, 얼굴은 분홍색으로 칠해졌으며, 갑옷과 기타 장신구들도 군청색과 초록색, 흰색과 빨간색 등으로 색깔이 입혀졌었다. 게다가 병사들의 손에는 무기가 다 들려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빈손이다. 어찌 된 영문일까? 역사학자들은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漢書』, 역도원이 쓴 『수경주水經注』 등을 종합해 볼 때, 진나라 말기 진의 수도 함양을 공격했던 항우와 그의 군대 때문에 이렇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항우의 군대는 진나라를 침범하자마자 아방궁阿房宮을 비롯해 진시황릉과 관련된 유적 여러 곳을 불태웠다. 황릉은 심하게 파헤쳐지고, 병마용갱을 발견한 군사들은 갱도에 불을 지르고 도용들을 닥치는 대로 부쉈다. 게다가 도용들이 들고 있던 실제 병장기들을 모조리 수거해 자신들의 무기로 재사용했다. 이렇게 안 좋은 상태로 매장된 병마용들은 2000년 넘게 땅속에 묻혀 있으면서 침습浸濕을 받으며 다시 한 번 수난을 당했던 것이다. 실제로 병마용박물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발굴 현장을 둘러보면 목조로 된 기둥들이 새카맣게 불에 타고 그을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역사서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오늘날 이 정도의 병마용이라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중국편 2. 진시황릉과 병마용(2)」중에서

명효릉은 조선 왕릉을 조성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26대 임금 고종이 만년에 자신의 황릉을 조성하기 위해 이곳을 참조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과 의궤를 보면 “정유년(1897)에 사람을 보내 명나라 능제를 살펴보게 했더니 모든 석물이 아주 굉장했다고 한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가 합장된 남양주의 홍릉洪陵과 비교해 보면 석물의 종류, 도상, 배치에서 비록 규모와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명효릉의 제도를 상당 부분 따랐던 것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왜 고종은 시기적으로 가까운 청대淸代의 능을 모본으로 삼지 않고 명대의 능을 참고했을까? 그것은 바로 조선이 청에 대한 거부의식과 명나라에 대한 숭배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새로운 황제국을 탄생시킨 고종이 명나라를 새롭게 세운 주원장에게 더욱 큰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저 멀리 중국에 있는 중국 황릉 한 기가 우리의 역사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 확인된 것이다. ---「중국편 3. 남경南京 명효릉明孝陵」중에서

1958년 정릉의 지하궁전 발굴이 끝나고 1959년 9월 30일 정릉박물관이 정식으로 개관한다. 그런데 개관 당일 새벽, 현장에 있던 박물관 주임이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답시고 황제와 황후의 시신이 들어 있던 관곽棺槨을 버리라고 지시한다. 관곽이 낡아 시멘트로 새롭게 복제를 해놨으니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몇몇 사람들이 말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만력제와 두 황후의 관곽은 무덤 옆에 있는 산등성이에 조각난 채 버려졌고 그 주위에 살던 농민들이 그것을 수거해서 궤짝이나 새로운 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경우인가?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1966년 중국 대륙에 엄청난 회오리바람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전무후무한 무산계급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 시작된 것이다. 모택동의 지휘 아래 100만 명이 넘는 소년ㆍ소녀 홍위병들은 천안문 광장을 떠나 사찰, 공원, 고건축물, 문화유적지를 찾아서 유물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짓밟았다. 그러다 이들이 명십삼릉에 도달해 마침내 정릉의 지하궁전까지 찾아낸 것이다. 홍위병들은 이곳이 봉건시대의 상징이며, 황릉의 주인이야말로 지주계급의 총 대표이자 ‘반동분자’라며 지하궁전 안의 유물을 정리한 다음 건물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명루 위 ‘정릉定陵’이라고 새겨진 현판에는 페인트칠을 해 못 쓰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하는 일에 더욱 자신감을 가진 홍위병들은 지하 창고에 보관돼 있던 만력제와 황후의 시신과 황제ㆍ황후의 초상화, 발굴 관련사진 등을 모아놓고 모두 소각시켜 버린다. 1966년 8월 24일 ‘혁명적 행동’이라는 이름 아래 정릉 앞 광장은 불바다가 됐다. 자신의 능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이들을 희생시켰던 황제는 그렇게 스러져갔던 것이다. ---「중국편 6. 명십삼릉(3)-정릉定陵」중에서

정동릉은 1872년 착공돼 1879년 완공됐다. 자안릉 건설에는 은銀 266만 5000냥, 자희릉에는 227만 냥이란 거금이 들었다. 이 두 능침은 건축 구조가 동일하며 면적도 2265평방미터로 똑같다. 그런데 자안이 생전에 자희보다 서열쳀 높았기 때문에 자안의 능침은 함풍제의 정릉에 더 가까이 배치돼 있고, 자희의 능은 상대적으로 정릉과 더 떨어지게 됐다. 이 때문에 자희는 자신의 수릉(壽陵, 생전에 미리 만들어 놓는 무덤) 건설에 불만이 많았다. 이런 점을 보상이라도 하듯 자희는 자안이 서거하자마자 광적으로 자신의 능묘 재건에 매달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을 모으라고 명령한다.
1895년 정식으로 자희릉이 재건되기 시작됐다. 자희는 융은전隆恩殿 앞에 있는 단폐석丹陛石부터 바꾸라고 지시했다. 원래 단폐석에는 용이 위에 있고 그 아래 봉황이 들어간 ‘용봉희주龍鳳戱珠’라는 문양이 들어가는데, 그는 봉황을 위로 가게 하고 용을 밑으로 가게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봉황은 자신을 의미하며 용은 황제를 의미하는데, 동치ㆍ광서 두 황제보다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자신의 지위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청대 황릉 중 봉황이 용 위로 가 있는 단폐석은 자희릉이 유일하다. ---「중국편 12. 청동릉(3)-자희릉慈禧陵」중에서

나비아를 지나 한참 더 올라가면 드디어 황제가 묻힌 무덤을 만날 수 있다. 뜨득 황제의 무덤은 우리나라처럼 흙과 잔디를 이용해 봉분을 쓴 것이 아니라 석조 양식으로 꾸며 놓았다. 그런데 황제의 시신이 이 석관 밑에 실제로 묻혔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당시 정부가 황제 사후 도굴을 막기 위해 황릉 조성에 참여했던 인부들은 모두 처형하고, 실제 관은 다른 곳에 매장했다는 소문이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다. 사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대로 발굴만 한다면 이런 루머는 쉽게 확인될 일인데, 이곳에서는 단 한 차례의 발굴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것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영혼의 세계를 존중하는 관습이 뿌리 깊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아쉽긴 하지만 나름대로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베트남 사람들의 지혜에 박수를 보낸다. 오늘날 이곳 사람들은 이 사후 궁전을 이렇게 묘사한다. “슬픔이 웃고, 기쁨이 눈물을 흘리는 곳.” 희비가 엇갈리는 삶을 살았던 뜨득의 모습을 더 없이 잘 묘사한 것 같다.
---「베트남편 1. 후에(Hue)의 뜨득(Tu Duc) 황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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