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고 난 후 독자들은 다음의 세 가지에 크게 공감할 것이다. 첫째는 언뜻 보기에 상당히 어려울 것 같은 주제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썼다는 점, 둘째는 인간과 공간의 관계를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일상생활의 공간을 바탕으로 전체 분량의 3/4을 할애해 설명하고 있다는 점, 셋째는 그럼에도 형이상학적 공간 개념을 전혀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공간 개념의 구분과 전개, 그리고 개인 공간의 탄생
이 책에서 주요 논점의 대부분은 5장에 집중되어 있다. 앞의 모든 내용은 5장을 전개하기 위한 서론에 불과하다. 그만큼 5장이 중요하다. 이미 앞에서 밝혔듯이 이 책의 많은 부분이 공간의 일상성을 다루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5장 전체를 그 분석 대상으로 삼는 “인간의 삶의 공간성”을 말하는데, ‘인간의 삶에 상응하는 체험 공간 혹은 살아가는 공간으로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공간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삶의 공간성 문제는 공간이 어떤 식으로 인간의 본질에 속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공간 속에 존재하는 방식은 그를 둘러싼 세계 공간에 대한 규정이 아니라, 주체로서 인간과 관련되어 있는 지향적 공간에 대한 규정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 지향적 공간 개념에서 보면 공간 속의 변화는 하나의 좌표계에서 다른 좌표계로의 이행이며, 정지와 움직임은 관습적으로만 규정될 뿐이다. 즉 인간이 공간 속 ‘어딘가’, 다시 말해 특정한 위치에 존재한다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공간 속에서 움직이면서 그 공간을 정지한 것으로 본다는, 지표면을 고정된 것으로 느끼고 인간이 서 있는 모든 자세의 토대가 되어준다고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지 못한다. 여기에서 공간은 일종의 매개체가 된다. 그것은 공간이 대상화되지 않으며 인간이 공간에 존재할 때에는 항상 ‘어떤 식으로든’ 처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공간에서의 인간의 상황적 심정성’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데 하나는 ‘던져져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거주하다’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세계-내-존재를 ‘던져져 있음’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사르트르가 ‘잉여적’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다는 뜻이다. 이 세상이 낯설고 적대적인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나이 들어 깨닫는 것이라면,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거주하다’라는 말은 그만큼 안온하고 평화스럽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일종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머무르는 것이다.
거주란 일반적으로 집에서의 거주로 이해하지만 여기에서는 거주 상황에서 인간의 마음 상태를 다룬다. 다시 말해 공간에 처한 인간의 심정성을 의미한다. 즉 ‘거주한다’는 말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 공간에 처한 그의 상황적 심정성 전체를 뜻하는 말로 일반화되었다. 이 말은 메를로퐁티에게는 “인간은 존재에 거주한다” 혹은 “영혼은 몸에 거주한다” 혹은 “의미는 낱말에 거주한다”가 된다. 이러한 말은 거주라는 개념은 정신적인 것이 신체적인 것 “속”에 “체현”되는 양자의 일체성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그의 ‘몸의 철학’이 등장한다. 그는 “몸은 영혼의 고향 공간이며 존재하는 다른 모든 공간의 원판”이 된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공간 없는 주체로서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구성물인 몸을 통해 더 크고 포괄적인 공간 속에 짜여 들어가 있다.
지금까지 공간의 문제를 일상 속의 공간, 즉 “사물과 인간이 존재하는 세계 내적이고 객관적인 공간”과 “체험 공간”으로 나누었다. 여기에서 다시 후자를 다시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눈다. “거리와 방향을 가지고 인간이라는 주체의 주변에 구성되는 지향적인 공간”과 메를로퐁티에서 그 암시를 받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간”이다. 즉 몸은 움직임을 지향하고 따라서 개인적 공간 개념이 탄생한다. 그래서 공간의 필요, 공간의 부족, 공간 과잉이라는 말을 하고 때로는 공간 낭비라는 말도 쓴다. 즉 “공간의 소유”가 탄생한다. 인간에게 배타적으로 귀속되는 공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운신의 공간이 되는 것으로 자신의 공간을 방어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의 공간을 방어해야 한다. 물론 인간이 필요로 하고 소유하는 개인 공간의 크기는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말이다.
개인 공간의 전개
‘거주’라는 말은 ‘소유’의 다른 말이다. ‘거주’라는 말의 적용 범위를 앞의 전개로부터 개관하면 개인 공간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었다.
1. 자기 몸의 공간
2. 자기 집의 공간
3. 주변의 일반적인 공간
자기 몸의 공간과 자기 집의 공간은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주변의 일반적인 공간이란? 그것은 식별 가능한 경계가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으로 구분되지 않는 모든 포괄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몸과 집의 의미를 공간적 개념에서 다시 살펴보자.
몸은 우리가 공간을 지각하는 도구로 공간을 체험하는 주체의 조직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개인 공간으로 우리가 체험하는 객체이기도 한데 둘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다. 전자의 의미는 직접적인 의미에서 나의 자아가 있는 “자리”이며, 모든 공간적 세계는 몸을 통해 처음으로 나에게 전달되었는데 이것은 내가 내 몸을 통해 공간의 세계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즉 나는 실제로 외부 공간과 구별되는 일종의 내부 공간인 것이다. 후자는 궁극적으로 “몸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인데, 일반적으로 몸은 우리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몸을 건너뛰어 우리가 관여하는 사물과 바로 접촉한다. 내 몸이 공간적 구성물로 분명히 의식되려면, 아프거나 접촉할 때와 같이 특별한 경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몸의 공간은 어떻게 주어질까?
몸은 인간이 거리를 두고 소유를 할 수 없는 것이 딜레마다. 몸은 내가 살아서 사용하는 과정에서 이미 내 것이 되어 있고 개인 속에 흡수되어 있다. 반대로 몸은 다른 소유물처럼 우리 몸을 이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우리는 몸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은 틀린 말이다. 따라서 나는 내 몸인 동시에 내 몸이 아니며, 나는 내 몸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나는 내 몸에 거주한다”는 메를로퐁티의 표현은 이러한 딜레마의 합일을 염두에 두고 나온 말이며, 그 말은 “체현되어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즉 집에 거주하는 것이다. 이때 체현은 인간의 삶의 공간성을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생산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인 자기 집의 공간은? 몸과 집의 차이점은 나는 몸과 항상 같이 다니지만 집은 고정되어 있는데 이것이 다를 뿐 평온과 안식의 장소로 보면 집에도 몸처럼 직접적인 동일시가 존재한다. 즉 인간은 자기가 사는 집에 체현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과 집의 내적인 결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집에서 나는 긴장이 풀리고 공간 관계의 지향도 느슨해진다. 인간이 공간과 융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조건은 다른 동물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의 서식지가 있고, 그 서식지에서는 안온함을 느끼고, 침입을 받았을 때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즉 동물에게도 개인 공간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은 내적으로 개인 공간에서 탈피함으로써 자신을 다시 마음속에서 되찾을 수 있다. 나그네로서 인간은 이런 내적인 자유의 상징이다. 거기엔 다른 하나의 공간이 나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단 무한한 공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무한한 공간을 우리는 전부 체험하지 못한다. 집을 벗어나 보호막이 없는 공간으로 나는 나아가지만 우리가 체험하는 공간은 유한하다. 즉 무한한 세계의 공간은 실제로 확장된 빈 공간이고 규모가 확대된 집일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집에 거주하듯이 무한한 공간에 거주할 수 있을까? 거주한다면 어떻게 거주한다는 것일까?
공간은 그 자체가 울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벽이 없으면 소리는 무한한 곳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공간은 마치 벽이 있는 듯이 작용하여 인간이 막힌 공간에 있을 때처럼 그 안에 안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 주변 세계와 공감하고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유는 울림이 “자아와 세계의 대립보다 더 근원적인” 원초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분열이 사라지고 인간이 공간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래서 거기에 거주하며 안도감을 느낀다. 따라서 체현하는 것이다.
남는 것들
지금까지 공간에 대한 인간의 이해 혹은 태도를 관찰했는데, 그 공간들은 서로를 배제하는 배타적인 공간이 아니라 공존하는 공간들이었다. 이를 인간의 공간성의 변화태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변화태를 도식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공간에 대한 소박한 믿음, 즉 안도감이다.
2. 고향이 없는, 혹은 집이 없는 상태이다. 이때 인간은 버려졌다고 느낀다.
3. 따라서 집을 지어 안도감을 회복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개인 공간, 즉 내부 공간이 탄생한다.
4. 인간이 지은 집은 공격당할 수 있다. 따라서 고정된 집에 머무르려는 집착을 버리고 무한히 넓은 공간에서 안도감을 얻어야 하는 마지막 과제가 생긴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허울뿐인 안전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즉 여기에 다른 한 공간이 나타난다. 현상학자들이 그러했고 실존주의자들이 설파했듯이 세상에는 “증오와 다툼의 공간”도 존재한다. 공간성의 두 변화태, 행복한 공간과 적대적인 공간은 동일한 차원에서 동등한 형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공간이 원초적인 공간이고 이 조건을 바탕룀로 적대 공간의 경험이 형성된 후에 다시 이것을 새로운 차원에서 극복해야 한다.
“집은 …… 인간 현존재가 만나는 최초의 세계이다. 인간은 성급한 형이상학자들이 가르치듯 ‘세계 속에 던져지기’ 전에 집이라는 요람에 눕혀졌다.” “적대적 세계는 …… 훗날에 경험한다. 초창기에는 모든 삶이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