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세상에서 한 줌 가진 것을 빼앗긴 원한을 칼에 실었을 때, 그 칼은 결국 누구를 향하던가. 창포검을 휘두르며 천한 것들이 귀해지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그들의 칼은 결국 누구를 베었던가. 인간 세계에서 칼을 드는 자는 순수할 수 없었고 순수한 자는 칼을 가까이해서는 아니 되었다. 반대로 영의 세계에서 칼은 한 점의 불경함도 없는 자만이 들 수 있는 신령의 도구였다. 영의 세계에서 칼을 드는 자는 순수해야 했고 순결한 자만이 칼과 가까이할 수 있었다. 하여 가혹한 세상을 끝장내고 미륵의 세계를 여는 그 시작은 영의 칼이어야 했다. 인간의 칼이어서는 아니 되었다. --- p.54
정원태는 혀를 끌끌 찼다. 세상을 쓸어버린 큰비는 한낱 이야기이고 전설일 뿐이었다. 어젯밤 축령산에서의 빗줄기가 정원태의 얼굴을 세차게 때리며 세간에 닿았지만, 세상을 쓸어버릴 큰비는 아직 정원태의 마음에 닿지 않았다. 이 세상에 내린 적이 없는 큰비가 와 세간을 쓸어버릴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가 그리 쉽던가. 신령의 힘만으로 세상사, 그것도 천지를 쓸어버리는 거사를 도모하는 것이 그리 쉽던가. 그 일은 그처럼 아스라했고 아스라했기에 위험했다. 필시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면 더 명확한 방편에 서는 것이 맞았다. 인간이 부릴 수 있는 최고의 힘, 칼의 힘을 써야 했다. --- p.77~78
미륵님과 석가님, 두 거인신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지금의 세상이 있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내 신어머니의 신어머니, 그 신어머니의 신어머니가 말씀하셨단다. 세상의 시원과 그 세상을 뒤덮은 죄악의 시원을 우리 만신들은 알아야 하느니라. 사람들이 서로 속이고 괴롭히고 빼앗고 죽이는 일이 왜 일어나는지 알겠느냐? 석가님의 부정과 정결치 못함이 그 뿌리인 것이다. 미륵님이 사람을 주십사 하늘에 축원한 그 뜻이 더럽혀졌다. 분별 없이 태평했던 세상이 흔들리고 있다. 말세인 것이다. --- p.94
언제부터인가 처의 눈빛이 짙어졌다. 그리고 깊어졌다. 그러더니 매워졌다. 짙고 깊고 매운 눈빛이라, 황회는 다시금 머리가 저릿저릿해짐을 느꼈다. 어진만이 아니었다. 계화도, 계화의 신딸 진덕도, 어진의 신딸 소율도, 양주의 성인무당이라 불리는 십여 명의 무녀들 모두 그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세상의 가장 깊은 곳을 함께 들여다본 눈빛,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을 함께 건너온 그 눈빛. 황회는 더듬어보았다. 그랬다. 원향이 양주에 온 두어 달 전부터였다. 다른 신령을 몸주로 받잡고 다른 굿판을 벌이고 다른 춤을 추었던 무당들이 언제부터인가 모두 같은 눈빛을 하고 같은 춤을 추었다. --- p.157
양반들이 그러했다. 겉으로는 예를 숭상한다며 무녀의 일을 음사로 여겼다. 허나 유학의 예가 인생의 마디마다 턱턱 걸리는 우리네 삶을 구제해주더냐? 태어나고 죽고 병에 걸리고 이별하고 사별하고 배곯고 벼락을 맞는 삶의 마디마다 사람들이 기대어온 곳이 어디더냐? 우리 무녀들이었다. 그들도 결국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일 앞에서 우리 무녀를 부르지 않더냐? --- p.164
밥그릇이 비어가고, 쌀독이 비어가고, 논밭의 작물이 비어갈 때,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지금처럼 사는 것 말고 다르게 사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아니, 다른 길로 내몰리고 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었다. 그 다른 길이 곱고 화사할 리는 없었다. 빈 밥그릇에는 울분과 증오가 담겼다. 쌀독이 비어갈수록 가혹한 세상에 대한 원한이 차올랐다. 빈 논밭을 보며 사람들은 금수의 삶으로 내모는 세상을 끝장 낼 힘을 얻었다. 죽어라 일해도 자식들에게 밥 한 끼 배불리 못 먹이는 그런 세상이라면, 무너뜨려야 한다는 파괴의 심성을 피워냈다. --- p.177
사대부들은 유학의 예를 새로운 신령으로 받잡고 사람들을 지배하려 한다. 그들의 순수한 예법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이가 누구이겠느냐? 바로 무녀들이다. 수천 년 동안 하늘과 통하고 신령과 통하면서 인간사에 스며들었던 힘을 가진 무녀들이다. 땅에 사는 비천한 이들이 땅의 삶을 하소연하고 하늘의 뜻을 알게 하는 문이 되어준 무녀들이다. 그 힘을, 신령스러움을, 무녀에게서 빼앗으려 한다. 하여 무속의 신령과 예의 신령이 다투는 것이다. 신령의 쟁투이다. 너는 그 쟁투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다. --- p.190
-하랑님에게 솜옷을 입히고 화로를 얹히고 불타게 하고 죽게 했던 이들을 잊어버리신 겁니까? 저는 보았습니다. 홀로 죽어가는 하랑님의 모습을. 하랑님은 그저 한 사람의 만신이 아니라 죽음으로 몰린 숱한 무녀들이었고 여인의 몸으로 쓰이다 죽임 당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원혼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무녀를 겁박하는 세상을 뒤엎고 싶습니다. 다시는 그렇게 무참히 죽어가는 무녀들이, 참혹하게 내쳐지는 여인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20세기에 들어 겨우 무격(巫覡) 존재와 삶이 민속학이라는 학문의 대상이 되었으나 어디까지나 미개문화로서거나 기껏해야 민족 통합용 혹은 문화인류학의 하위 범주로서였다. 그러나 언제나 연구의 ‘대상’이었을 뿐 어디에서도 그들에게 주체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이번에 옹색한 그 대상성에서 벗어나 그들이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세상을 관통해내는 화살로 비행할 수 있었던 데는 소설이라는 매력적 장르에 힘입은 바 크겠다. 무엇보다 그들이 제 힘으로 부활해서 제 입으로 말하고 권부의 핵심을 향해 진격하도록 내버려두는 작가의 자기은닉이 참으로 미덥다. 『큰비』를 쓰느라 정말 공부를 많이 했을 텐데, 티 나지 않는 공부가 진짜 공부 아니던가. _구효서(소설가)
17세기 숙종 연간 하늘의 뜻을 살고자 했던 열아홉 무녀 원향의 숨결과 목소리가 낮고 깊은 가운데 놀랍도록 생생하다. 아마도 역사에서는 조금 더 뒤에 올 후천개벽의 민중 종교, 그 오래된 혁세의 꿈으로 이어질 소설 『큰비』의 이야기는 원한과 분노의 칼날 대신 한 올 한 올 베옷을 짜는 노동과 보살핌의 시간으로 도래할 여성성의 후천을 조용히 지시한다. 당장은 가망 없는 기다림 속에서만 살아 있는 그 꿈이 너무도 섬세하고 아련하다. 정확하고 명징한 서술이 지긋이 맺고 푸는 유연한 문장의 호흡 속에 단단하게 감싸여 있다. 그 문체가 결국 소설 『큰비』의 현재성이자 글쓴이만의 사상이고 고유성일 터이다. _정홍수(문학평론가)
『큰비』는 우리 곁에 있었으나 어느새 주류문화에서 사라진 믿음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큰비』에 형용된 그 세계는 분명 낯익었으나 어느새 외국어나 외국문화보다도 낯설어진 우리의 어떤 먼 풍경을 비춘다. 이는 우리 문학에서도 어느새 먼 곳으로 사라진 언어이기도 하다. 『큰비』는 그 실종되어가는 언어와 문화, 분위기를 살려내 마치 오래된 가구가 새로운 건축 양식 안에 자리 잡은 듯한 새로움을 보여준다. 원향이라는 인물에 대한 진지하고 진중한 작가의 탐구적 태도는 이 새로움에 신뢰를 보탠다. 결국, 소설은 삶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_강유정(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