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딸리아 남부 쏘렌또의 해안에는 그리스인이 건설한 쿠메(Cumae)라는 식민도시가 있었다. 그곳의 아폴론 신전에는 씨뷜라(Sibylla)라는 아름다운 무녀가 살았고, 그녀는 아폴론과 하룻밤을 지내는 조건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젊음을 같이 달라는 말을 잊어버린 탓에 세월이 갈수록 그녀의 몸은 늙어 대추씨만 하게 쪼그라들어 나중에는 몸을 잃고 목소리만 남게 된다. 신화는 그 목소리를 “죽고 싶어. 죽고 싶어.”라는 울음으로 전한다. 신화를 조금 더 밀고 나가자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몸을 잃은 목소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리산의 시는, 그 무녀의 목소리가 한줌의 모래알의 수만큼 살아, 바람에 실려 떠돈 내력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아마도 리산에게 있어 그 목소리를 실어나른 힘은 바람이 아니라 ‘고독의 말/馬/言’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고독의 말을 타고 ‘허망함과 허무’를 여행하고, ‘흙과 뿌리와 이슬의 맛’을 만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집에서 광기와 도발과 충격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시인은 우리에게 아무런 맛도 나눠주지 않고 나아간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言이 된 말들이 그저 우리 옷자락을 흔들어놓을 뿐이니까. “방금 뭐였지?” 이 시집은 그 느낌에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