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는 가난한 교회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도 아니다. 〈루가〉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회에 널리퍼진 성직자 중심주의에서 군국주의 냄새가 심하게 난다. 천주교회를 군대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신부를 장교로, 신자를 사병으로 비유하면 안 된다. 개신교가 자본주의 방식을 교회 운영 원리로 도입한 잘못처럼 천주교회는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수입한 잘못이 있다. 내가 사는 제주에 강정 해군기지가 있다. 평화의 섬 제주가 기지촌 경제권에 편입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자비를 말하면 훌륭한 신학자라 하고, 정의를 말하면 사회주의에 물들었다고 한다. 사회 적폐 청산을 말하면 용기 있는 신학자라 하고, 교회 적폐 청산을 말하면 교회에 대한 애정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런 엉터리 말에 나는 찬성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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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권력자를 심판하고 부자를 내쫓으며 가난한 이를 편드는 분이다(〈이사〉 2,11-17 〈욥기〉 12,14-25).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을 구원하는 하느님뿐만 아니라 부자와 권력자를 버리는 하느님을 강조해야 한다. 원래 그리스도교는 부자와 권력자에게 불편하고 까다로운 종교다. 그런데 어느새 그들은 교회에서 잘 대접받는다. 교회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부자나 권력자가 얼마나 될까.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그리스도교는 부자와 권력자를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40쪽
행복이 약속된 가난한 사람의 대표로 굶주리고 우는 사람이 소개된다. 불행이 약속된 부자의 대표로 배부르고 웃는 사람들이 소개된다. 지금 배부르고 웃는 사람은 슬퍼할 이유가 있다. 지금 굶주리고 우는 사람은 기뻐할 이유가 있다. 성서는 우리 상식과 가치 기준을 뒤엎는다. 지금 배부르고 웃는 사람은 그것으로 끝이다. 지금 배부르고 웃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돈으로 천국을 어떻게 사겠는가.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는 말은 거짓이요 사기다. 예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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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바라봄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슬픔, 세상의 악을 똑바로 봐야 한다. 그 눈길에서 약자와 희생자에 대한 자비가 생긴다. 자비는 우리를 정의로 안내한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반대하는 세력과 기꺼이 싸우고 희생한다. 자비와 정의는 함께 상승하고 함께 추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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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만 5000명가량이라는 말은 여성 군중과 여성 제자를 제외한 숫자일까. 배고파보지 않은 사람이 배불리 먹었다는 말의 의미를 알까.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 성서를 잘 이해할 처지에 있다. 예수와 제자들은 가난하게 유랑한 동아리다. 자기들 먹을 것도 부족하지만, 예수는 제자들에게 군중의 먹을 것을 염려하도록 가르쳤다. 가난한 교회가 가난한 군중을 보살피라는 뜻이다. 예수는 “여러분이 먹을 것을 주시오” 하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독자는 제자들이 어떻게 할지 지켜본다. 사람들은 교회가 어떻게 할지, 성직자가 어떻게 할지 지켜본다.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성직자에게 듣고 싶지만, 그보다 먼저 성직자가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실천하는지 지켜본다.
--- p. 201
29절에서 율법 학자는 예수에게 다시 물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예수는 이웃이 누구인지 개념적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 반문하고 싶었다. ‘당신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예수는 교리라는 내용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 다가서는 방법을 함께 다룬다. 이 장면에서 주체는 율법 학자가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이다. 예수는 내 입장이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 입장에서 봐야 한다는 생각의 전환을 강조한다. 고통 받는 사람을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 학자의 그리스어 질문은 ‘누가 내게 가깝습니까’라고 번역할 수 있다. plesion을 형용사로 보느냐, 부사로 보느냐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진다.
--- p. 260
33절 “여러분은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는 왜 나왔을까? 〈루가〉 저자가 속한 공동체에는 부자가 상당수 있었다. 루가는 부자 신자와 가난한 신자가 있는 공동체에서 부자에게 권고하고 경고한다. 바울로도 부자에게 요구한다(〈로마〉 15,25 〈1고린〉 7,30 〈2고린〉 8,4). 오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제들은 부자 신자에게 루가처럼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가. 교회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가. 재산을 나누지 않으면 개인도, 교회도 회개하기 어렵다. 재산을 나누지 않고 생각과 마음만 바꾸는 것은 예수가 말한 회개가 아니다.
--- p. 331
성서 독자와 그리스도인은 부자를 비판하는 말이나 이야기가 성서에 왜 그리 자주 나오는지 궁금할 수 있겠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가난한 사람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메시지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둘째, 당시 유다인과 예수를 따른 사람은 이 메시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했다. 오늘 그리스도인도 당시 유다인이나 초대교회 사람과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다. 두 가지 이유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거나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교회나 성직자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을 선택했지만, 교회는 부자를 선택한다. 부자와 권력자를 선택한 성직자가 여전히 많다.
--- p. 423
예수의 감정이 15절처럼 그대로 드러난 구절은 복음서에서 찾기 어렵다. 예수의 솔직한 인간성이 잘 보이는 곳이다.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라니 예수는 얼마나 뭉클했을까. 19절에서 “이것은 여러분을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입니다”라는 표현은 놀랍다. 우리에게 전해진 어떤 유다인 식사 기도에도 이런 말은 없다. 19절에서 동사 ‘주다didonai’가 두 번 나온다. 예수는 주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교는 받는 종교가 아니라 주는 종교다. 19절에서 연결 동사 estin은 ‘동일’, ‘일치’를 뜻한다. 예수의 몸을 상징적으로 준다기보다 정말로 주는 것이다. 물리적·문법적으로 상징을 뜻할 수밖에 없지만, 정말로 예수의 몸을 나눈다는 뜻이다. 몸을 나누는 것은 생명을 나눈다는 말이다.
--- p. 548
예수의 재판은 단순히 사법재판이 아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유다교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정무적 판단이 개입된 재판이다. 나는 사법 살인이자 정치 살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재판이 예수 시대 유다 땅에만 있었을까. 성서를 연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정치 경제까지 살펴보게 된다. 정치 감각과 역사의식이 부족한 사람이 성서를 전공하면 정말 큰일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강하게 든다.
--- p. 608
자신을 보는 만큼 예수도 보이고, 예수를 보는 만큼 자신도 보인다. 가난한 사람을 보는 만큼 예수도 보이고, 예수를 보는 만큼 가난한 사람도 보인다. 가난한 사람을 보는 만큼 자신도 보이고, 자신을 보는 만큼 가난한 사람도 보인다. 모든 것은 아름답게 이어진다. 이 세상 어떤 존재도 무관하지 않다.
--- p. 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