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은 어렵게 만든 기회를 헛되이 놓아버리지 않도록 정신 차리고 두 눈 부릅뜬 채 지켜봐야 한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장 자크 루소는 선행의 첫걸음이 악행을 하지 않는 것이라 말했는데, 자기 이익을 가장 먼저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자들이 악한 생각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쥐가 달걀을 낳기를 바라는 일과도 같다. 어렵사리 민주주의를 쟁취했던 우리는 이명박과 박근혜가 잇달아 대통령 노릇을 하는 9년 동안 눈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국격이 땅에 떨어지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루소의 말이 옳다는 사실을 또다시 절감했다. 우리는 투표할 때만 주인이었고, 9년 동안 정치적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노예’라는 말이 비유임을 굳이 밝힌다, 악용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정도를 걱정할 만큼 유치한 세력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 비극이다. 그러니 온갖 어려움을 겪고 겨우 첫걸음을 뗀 민주정부의 지지자임을 자랑하면서 만족할 때가 아니다. 진정한 ‘운동’의 차원으로 지원해야 한다. 건강한 사람도 건강을 지키려고 운동을 하듯이, 이제 모든 것을 정상화시키는 첫걸음을 겨우 뗀 마당에 민주시민이 현실에 다각도로 참여하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 --- p. 17
민주주의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선거다. 유권자는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에게 투표하고, 그가 당선되면 세상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좋은 모습을 갖출 것을 기대한다.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면 자기가 직접 나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자신이 당선되었다 해도 수많은 당선자와 경쟁하고 자기 뜻을 관철시켜야 하는 과정이 매우 어렵다. 직접 나설 수 없는 사람들은 자기의 대표를 뽑으면서 미래를 건다. 그러나 여러 차례 경험을 한 뒤에는 실망하고 냉담해지는 경우도 생긴다. 그나마 현명한 사람은 최선이 아니라 가장 덜 나쁜 사람을 가려내려고 노력한다.
장 자크 루소도 유권자는 투표할 때만 주인이고 그 뒤에는 노예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민주주의가 제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그것의 장점을 살릴 유권자와 피선거권자들이 합심해 지켜나가야 할 까닭이 이것이다. 민주주의란 평범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여론의 도움)을 받아 잘못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라는 것이 장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제도를 악용하는 패거리가 정치적 권력과 금권력을 장악해 제멋대로 자기 주머니를 불리고 더 나아가 자기 자손의 번영에 국가를 이용하는 경우는 모든 나라에서 겪을 수 있다. 늘 경계해야 할 일이다.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2016년까지 ‘제왕무치(왕은 염치를 모른다)’한 대통령들이 국고를 사유화하고서도 대한민국을 완전히 망치지 못한 것도 그나마 국민이 여론을 형성하고 저항할 수 있는 길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이 사기꾼 패거리가 만든 ‘신화’에 속았음을 뒤늦게나마 깨닫고 평화적인 시위축제를 벌였던 것이 천만다행이다. 부디 좋은 사람을 올바로 선택하는 유권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1791년 프랑스 혁명기 언론인들의 마음과 같아서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하다.
또한 로베스피에르가 ‘몹시 중도적인 사람(극중주의자)’을 경계하라는 대목에서 2017년의 우리나라 어느 정치인이나 자칭 ‘비판적 지지자들’의 행태가 생각나 씁쓸하다. ‘극중’은 ‘순수’처럼 관념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 p. 206~207
제헌의원들은 어떻게든 입헌군주제 헌법을 완성했고, 그것을 왕에게 가져가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과연 이것이 혁명을 무난히 끝낼 수 있는 길이었을까? 우리는 1791년 이후의 과정을 알기 때문에 이것이 새로운 혁명을 시작하는 과정임을 알지만 당시 사람들은 어땠을까? 이제 헌법을 만들어 왕의 손에 넘겨준 제헌의원들이나 그것을 흔쾌히 승인한 왕은 희망을 보았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왕은 절대군주의 지위를 잃었지만 헌법이 세습적인 왕을 인정해주고, 또 지난 2년 동안 그랬듯이 행정부를 이끌 수 있기 때문에 혁명으로 새 세상이 오기를 고대하던 사람들보다는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 p. 241
6월 21일 이후 군주국가인 프랑스에는 왕이 없었다. 국회 밖에서는 두 달 이상 왕을 부정하고 폐위시키라는 여론이 들끓었음에도, 제헌의회는 입헌군주제 헌법을 마무리했다. 왕이나 국회나 지난 2년을 돌이켜보면서 실로 어렵고 험한 길을 헤쳐왔음을 실감했다. 왕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헌법에 계속 딴죽을 걸었고, 도저히 헌법을 막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도주했다. 국회는 처음부터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 헌법을 만들기로 작정하고 추진해나갔지만 왕이 소문대로 진짜 도주한 뒤 어떻게든 헌법을 마무리하려고 여론을 무시했다. 우파 의원들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지만, 마침내 왕과 타협할 수 있는 형태의 헌법을 만들어 결국 왕의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국회의장은 왕을 극찬하는 연설을 했다. 겉모습의 변화는 마음속 변화를 반영하지만, 때로는 겉모습의 변화를 마음속 변화가 따라가지 못하기도 한다. 국회의장이 왕과 나란히 앉을 수 있도록 의전을 바꾸었지만, 의장의 마음은 왕과 나란히 앉는 것이 아직 송구스럽다고 말하고 있었다. 『파리의 혁명』에서 꼬집듯이, 투레는 ‘비굴한 표현expression servile’인 ‘전하Votre majeste’라는 호칭을 썼다. 게다가 회의장 안에 있는 모든 의원과 방청객들도 왕이 직접 국회에 나와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맹세해준 것에 감격해서 환호했다. 왕의 맹세와 함께 국민화합이 상징적으로 최고조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 p. 253
왕의 거부권을 인정하는 문제를 놓고 투표할 때, 보수 성향 의원들과 진보 성향 의원들이 각각 의장의 오른쪽과 왼쪽에 모인 것이 우파와 좌파라는 말이 정치생활에 끼어든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의원들을 크게 우파, 중도파, 좌파의 세 부류로 나눌 수 있고 세분하면 극우파, 우파, 중도우파, 중도좌파, 좌파, 극좌파로 나눌 수 있다. 비록 우파라고 해서 언제나 새로운 사상에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파리에 살면서 의사당의 방청석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의원들이 앉은 자리를 보고 우파와 좌파를 구별하는 경향이 있었다. 혁명 초 재무대신이었던 자크 네케르의 딸인 마담 드 스탈은 우파를 어떤 상황에도 타협을 모르는 비타협파intransigeants, 카잘레스의 입을 빌려 의견을 표명하는 귀족, 모리 신부를 앞세우는 종교인의 세 부류로 나누고, 무니에처럼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중도파를 평원파(늪지파Plaine ou Marais)라 불렀으며, 좌파를 인민파parti populaire라 불렀다. (중략)
우파에서도 수구세력을 극우파, 그 밖의 사람들을 우파와 중도우파로 나눌 수 있다. 좌파는 중도좌파, 좌파, 극좌파로 나눌 수 있는데, 가장 덩어리가 큰 중도좌파는 대체로 입헌파이며, 따라서 입헌군주정 헌법을 주도적으로 만들어나간 집단이었다. 좌파와 극좌파는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로서 언제나 혁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남녀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관념에서도 더 진보적이었고, 심지어 공화정을 지지하는 극좌파도 있었다.
--- p. 30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