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김래억(본명 : 김장현)은 1930년 평북 철산 출생으로 1949년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여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 6·25 전쟁에 참전하였고 10년 넘게 직업군인으로 생활하였다. 퇴역 후에는 사업에 뛰어들어 1970년대부터 호주와 한국의 축산 교류를 활성화시켰고, 1986년에는 호주로 투자이민 후 현지서 공동 벤처로 축산업에 종사하였다. 또한 1992년부터 2011년까지 중국 연변 과기대를 거쳐 단동을 거점으로 대북 지원사업에 종사하였다. 현재는 은퇴하여 호주 시드니에서 가족 및 지인들과 함께 등산 및 글쓰기 등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2010년 12월 중순 어느 날, 세차게 불어오는 차가운 강바람이 내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압록강 강변. 겨울의 짧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저녁노을이 하늘을 빨갛게 물들게 하면서 거대한 중국 대륙에도 서서히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하였다. 같은 시각,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해지고 있는 강 건너 대안(對岸)의 신의주 쪽 북한 땅을 바라보노라니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지나가 버린 기나긴 세월의 행적들을 회상해 본다. 유년 시절부터 신의주 학생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과 온 가족들, 그리고 정든 내 고향을 버리고 월남해야 했던 추억들, 그리고 만주제국, ‘키메라’라고까지 표현되었던 괴뢰국가가 건립되었던 곳. 어린 시절,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내일의 원대한 희망이 스며있는 신천지’라고 그토록 침이 마르도록 외쳐대던 대륙이었기에 어린 나에게도 청운의 꿈을 안고 찾아왔던 이국 땅. 공학도로서의 꿈을 키워 보려고 한 적도 있었건만, 세계대전이라는 큰 소용돌이에 의해 만주제국이라고 했던 한 나라가 어느 한 순간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리면서 나의 보잘것없는 꿈도 희망도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희망을 찾아 단신 월남하지 않을 수 없었고 軍門(군문)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발발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이 발생하였다. 또한 국토는 어느 한 구석도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수많은 사상자와 수많은 피난민 그리고 부모 형제와 혈육은 물론 친지들까지도 뿔뿔이 흩어져 이산가족들이 생겨났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빈곤과 굶주림의 阿鼻叫喚(아비규환), ?塊(점괴)의 窘境(군경) 속에서 헤어나려는 몸부림 등 지난날 겪어온 悔恨(회한) 과 刻骨痛恨(각골통한)을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빈곤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일념으로 모든 국민이 하나가 되어 盡悴(진췌)매진하던 일이 기억난다. 하지만 이제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여 세계 최빈국에서 G-20 선진국 대열에 떳떳하게 설 수 있게 되었다. 원조를 받아야 겨우 연명하던 나라가 이제는 어엿이 원조를 하는 나라로 성장하게 되기까지의 역사적 사실들을, 그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고 몸소 겪어야 했던 일들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본다. 이 나라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시기에 軍門(군문)을 나서 익숙지도 않은 사회생활을 하게 된 경위, 그리고 제2의 夙志(숙지)인 축산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호주로부터 소 떼를 몰고 고국으로 들어왔던 일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예전에는 미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호주라고 하는 먼 이국 땅까지 밀려와서 가난하고 보잘것없이 나름대로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이민생활을 하면서 일어났던 구슬픈 이야기들이 하나씩 생각난다. 지난날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면서 어언 60여 星霜(성상)의 세월이 흘러 다시금 단동(丹東)의 압록강 강변까지 와 이곳에 서서 기나긴 세월을 회상한다. 착잡하고 쓸쓸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서서히 흘러가고 있는 압록강 물을 바라보며 ‘세월은 흘러가 버리고 바야흐로 가련한 鬚眉晧白(수미호백)이 되어 이곳을 다시 밟게 되었노라.’고 뇌까려본다.
불과 1,000m도 안 되는 철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이곳 단동과는 달리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두움에 휩싸인 신의주를 바라보노라니 가슴이 꽉 멜 것 같은 감정이 순간적으로 폭발되는 것 같은 激情(격정)이 복받쳐 오른다. 같은 하늘 아래에 살면서도 내 부모 형제를 비롯한 혈육들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무한한 원한과, 凍土(동토)의 땅에도 봄이 오면 지나간 해와 마찬가지로 대지에는 새싹이 돋아나고 꽃을 피우는 자연의 섭리야 어디로 갈까 모르겠지만 이곳에 살고 있는 국민의 생활인들 얼마나 괴롭고 피곤할까? 단동과 신의주 사이를 잇는 헐어 빠진 철교(1909년 착공, 1911년 10월 말 준공)를 수없이 지나다니며, 존재의 가치가 아마도 모기의 날개만도 못한 죄 없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을 굶주림에서 구해보려고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다니던 波浪萬丈(파란만장)했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필요악이란 것도 있게 마련인데, 인간적인 가치관을 송두리째 멸시당하고 누구 한 사람 거들떠보지도 않는 일을 스스로 찾아다니다 오히려 역경에 몰려 헤어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만 했던 일들, 가족들까지도 외면하여 孤軍奮鬪(고군분투)를 면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생각난다. 이를 데 없는 고독감에 휩싸일 때도 있었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누군가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기쁨이 있었기에 버텨나갈 수 있었던 일들과 생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고향 땅을 50여 년 만에 다시 찾아 오래 전 이미 돌아가신 줄로만 여겨오던 老母(노모)와 혈육들을 뜻밖에도 다시 만나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제하려 했던 사건들. 이들이 마치 파노라마와도 같이 펼쳐졌기 때문에 저승에 가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80여 星霜(성상)의 歲月을 살아오면서 새삼스럽게 기록해 보려고 記憶(기억)을 더듬어 보기는 하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기억들이 風化作用에 의해 貴重하다고 생각되었던 體驗(체험)들도 忘却(망각)된 채 사라져 버리는 듯하다. 하지만 이제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기억만이라도 더듬어 그 一部나마 내 후손들을 위해 記錄해 남겨두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