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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엔딩 2

너와 나의 엔딩 2

별규 | 청어람 | 2017년 12월 0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7.6 리뷰 5건 | 판매지수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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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12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400쪽 | 456g | 145*200*30mm
ISBN13 9791104915062
ISBN10 1104915065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지혁은 제 방, 제 침대 위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를 짜증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베개 위에 흐트러져 있는 갈색 머리카락, 작고 갸름한 얼굴과 봉긋 솟은 이마, 부드럽게 떨어지는 콧날과 복숭앗빛 입술……. 예쁜 여자였다. 그것도 상당히 예쁜 여자였다. 하지만 그런 건 그의 분노 지수를 낮추는 데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남의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것도 모자라, 아직 어떤 여자도 누워보지 못한 침대 위에 떡하니 누워 자고 있는데, 그런 그녀가 뛰어난 미모를 자랑한다 한들 그게 대수겠는가.
“저기요.”
지혁이 신경질적으로 여자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봐요.”
여자는 남의 침대에서 자는 주제에 아무리 불러도 일어나지 않았다. 흔들어 깨워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는 모르는 여자의 몸에 손을 대기가 껄끄러워 참기로 했다.
“후우…….”
지혁은 애써 숨을 골랐다. 지금 간신히 붙잡고 있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다면 당장에라도 주거침입으로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후우우…….”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다스린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1번과 2번 숫자가 어서 눌러달라고 유혹하고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대신 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호영은 지혁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지난달부터 같이 살기 시작한 동거인이기도 했다. 전화는 음성 사서함까지 가도록 연결되지 않았다.
“안 받는다 이거지?”
지혁은 거칠게 종료 버튼을 누르고서 휴대폰을 다시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심호흡의 효과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의 미간은 잔뜩 좁아졌고 눈동자에는 분노의 열기가 일렁거렸다.
“김…… 호…… 영…….”
사람의 이름 석 자가 욕처럼 들릴 수도 있다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요즘 만나는 애가 얼굴은 예쁜데 주사가 좀 있어. 아무 데서나 막 자. 한 번은 주차장 바닥에서 자고 있다가 누가 경찰에 신고까지 했다나, 뭐라나.”

얼마 전 호영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예쁜 여자, 스멀스멀 올라오는 술 냄새……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요즘 호영이 만난다는 여자가 방을 착각하고 들어와 애먼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 그게 다였다.
“아오…….”
지혁은 여자를 번쩍 들어다가 호영의 방에 던져 놓고 싶은 욕구를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어차피 호영이 들어오기 전에는 해결되지 않을 문제였다. 끓어오르는 화를 조금이라도 진정시키려면 찬물에 샤워라도 하는 게 낫겠다 싶었던 그는 굳은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샤워를 마친 지혁의 눈썹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당연히 벗은 채로 나갔겠지만, 혹시 여자가 깨기라도 한다면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테니 그럴 수도 없었다. 피해자인 자신의 위치가 일순간에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을 터였다.
“젠장…….”
찝찝하지만 어쩔 수 없이 벗어두었던 속옷과 겉옷을 다시 챙겨 입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호영이 돌아온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욕실을 나온 지혁은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한 거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곧장 방으로 들어갔나 싶어서 호영의 방으로 가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는 짚이는 바가 있어 제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방에 들어가 보니, 침대를 차지하고 있던 여자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호영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나간 것이었다. 흐트러진 침구와 미세하게 남아 있는 술 냄새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참아줄 만했다. 어떻게 처리할 방법이 없어서 언짢았던 존재가 제 발로 사라져 주고 없으니 지금 당장은 이걸로 충분했다. 남은 분노는 호영이 돌아오고 나서 해소하면 될 일이었다.
지혁은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가 시트, 베개 커버, 이불까지 싹 벗겨냈다. 여자의 흔적을 완벽히 없애 버린 뒤에야 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혁은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집에 들어온 호영에게 싸늘하게 경고했다.
“이런 일 한 번만 더 있으면 나 바로 나간다.”
“빌어먹을 월세의 압박에서 벗어나서 이제 숨 좀 쉬어볼까 했더니, 이 무슨 산소호흡기 빼는 소리냐!”
호영이 처절하게 외쳤다. 전세 기간 만료를 앞둔 작년 겨울, 집주인이 보증금 인상 대신 반전세로 전환하겠다며, 앞으로는 매달 오십만 원씩 내라고 통보를 해왔다. 전세금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하는 수 없이 그 제안에 응했지만 호영의 월급에 오십만 원은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게다가 매달 나오는 전세 자금 대출이자도 갚아야 했다. 도저히 아파트에서 살 여력이 안 된다는 걸 인정하고 비교적 저렴한 원룸이나 오피스텔을 알아볼까 생각하던 호영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어준 건 다름 아닌 지혁이었다. 그는 당분간 지혁을 놓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모르는 사람 드나드는 거 딱 질색이야.”
급하게 돈이 필요했던 지혁은 살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호영의 집으로 들어온 지 이제 한 달째였다. 호영의 아파트 보증금 절반과 매달 월세의 절반을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내가 미쳤었지…….”
지혁은 제 사정도 제 사정이었지만, 만날 때마다 죽는소리를 해대는 호영의 사정을 봐준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는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배려라는 것을 한답시고 쓸데없는 짓을 한 것에 대한 후회가 벌써 물밀듯 밀려오고 있었다.
“알았어, 알았어. 모르는 사람 아무도 못 오게 할게. 아는 사람도 못 오게 한다. 우리 엄마도 오지 말라고 하면 되잖아. 응? 응?”
호영이 능글맞게 웃으며 지혁에게 윙크를 날렸다.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지혁의 얼굴이 단숨에 구겨졌다. 두 사람은 공통점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정반대 캐릭터였다. 지혁이 시크, 까칠 등으로 대표되는 성격이라면, 호영은 유들, 능청 등으로 표현 가능한 성격이었다. 성격뿐만 아니라 외모까지 판이했는데, 지혁은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날카로운 반면 호영은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인상이 유했다. 교집합이 전혀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열여덟 살 때부터 서른셋이 된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것을 두고,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아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한 번만 봐주라, 인마. 됐다는데도 자꾸만 밑반찬 좀 갖다준다고 하길래 현관 비밀번호 알려줬던 거란 말이다. 말만 해놓고 한 번을 안 오더니 술 취해서 자고 갔을 줄이야 낸들 알았겠냐?”
지혁이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술을 마셨으면 집에 가서 잘 것이지, 왜 아무도 없는 집에서 자고 가는 건데? 집 없어?”
설마 집이 없겠냐……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호영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지혁을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참고 제 추측을 말했다.
“어제 싸웠거든. 그래서 오늘 하루 종일 연락 한 번도 안 했는데 화해하자고 왔다가 술김에 졸렸나 보지, 뭐. 술 깨니까 마음이 바뀌었는지 전화도 안 받는다.”
“나랑 같이 산다는 말은 안 했냐?”
“……요새 만날 때마다 싸워서 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 너 혼자 사는 집 아니니까 오지 말라고 확실히 말해놔.”
정색하며 못을 박는 지혁에게 호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너 없을 때는 괜찮지……?”
지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지만, 호영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물었다.
“내 방만도 안 되냐……?”
지혁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졌다.
“알았다…….”
호영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늘어졌다.
“사귄 지 이 주도 안 된 남자네 집에 와서 자고 간 것도 어이없다만, 이건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다 치자. 근데 술 취하면 아무 데서나 막 잔다면서? 그 정도면 술을 못 마시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술 마시지 말라는 잔소리 되게 싫어해. 내가 사귀자고 하니까 딱 잘라 말하더라, 자기한테 아무 터치도 하지 말라고.”
침통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 그를 보며 지혁이 물었다.
“넌 무슨 상전 모시냐?”
“상전 맞아.”
“뭐라고?”
지혁이 인상을 구긴 것과 반대로 호영은 여유롭게 씩 웃었다.
“예쁘거든.”
그랬다. 호영이 여자를 만나는 기준은 오로지 외모 한 가지뿐이었다. 그는 예쁜 여자를 짧게 만나는 걸 좋아했다.

이튿날, 지혁은 은행 일을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근처 카페에 들렀다. 호영의 집으로 이사 온 이후, 종종 들르는 곳이었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그가 직원이 건네준 커피를 받아 들고 입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거기 싫어요.”
뒤편 어디쯤에서 청아한 음색의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우뚝 멈춰 선 그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작 한 번, 그것도 잠깐 보았을 뿐이었지만 뇌리에 각인되다시피 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호영의 여자친구이자, 어젯밤 그의 침대를 점령했다가 귀신처럼 사라져 버린 진상녀…… 그녀가 언제 술을 마셨나 싶게 말끔한 얼굴로 한 남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방음 잘 되고 깨끗하다고 너도 좋아했잖아.”
지혁의 시선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몇 번 본 적이 있어 얼굴을 알고 있는 카페 사장이었다.
“그건 침대가 삐걱거리고, 뜨거운 물이 뜬금없이 안 나온다는 걸 알기 전에 한 말이었잖아요.”
“아, 맞다. 우리 그날 같이 씻다가 얼어 죽는 줄 알았지.”
지혁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그럼 다른 데 잡을게.”
“그래도 안 가요. 저 요새 컨디션 별로예요. 밤새 한숨도 못 자게 괴롭힐 거면서…….”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지혁은 근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냥 갈 수가 없었다. 어젯밤 그녀의 이야기를 하던 호영이 왠지 다른 남자가 있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호영의 의심을 제 눈으로, 제 귀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안 괴롭히고 소중히 다뤄줄게.”
“지난번에도 그 말 했거든요?”
여자는 밀당에 상당히 능숙했다. 남자를 애태우는 법을 아는 여자 같았다.
“정말 안 갈 거야?”
“갈 거예요, 집에.”
남자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단호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혁은 카페를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지혁은 카페에서 나와 아파트를 향해 걸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호영에게만은 쉽사리 선을 그을 수가 없었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아파트에 들어선 지혁은 자신보다 앞서 카페를 나갔던 여자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고 제 눈을 의심했다.
‘뭐지, 이 여자……?’
일부러 제 동선을 파악하고 한 걸음 앞서가서 준비하고 있다가 나타나는 게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지혁의 시선이 여자를 떠나 남자에게로 향했다. 시동이 걸려 있는 밴 앞에 서 있는 걸 보니 연예인인 것 같았다. 하얗고, 마르고, 얼굴이 주먹만 했다. 연예계 쪽에 관심이 없어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풍기는 이미지 자체가 일반인과 사뭇 다르다는 것이었다. 호영과 카페 사장에 이어 새롭게 등장한 연예인까지, 세 남자를 농락하고 있는 여자의 능력과 재주가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얼굴값을 한다는 게 이런 건가?’
지혁이 호영에게 여자의 정체에 대해 알리기로 마음먹은 그때, 남자가 여자를 감싸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반걸음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데 들리지는 않았다. 남자가 여자의 말에 씩 웃는 것만 보였다. 호영에게 알리는 걸로 끝내려던 지혁은 마음을 바꿔 두 사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남녀 사이에 제삼자가 끼어드는 게 얼마나 큰 오지랖인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쯤 되면 진상 꽃뱀은 누구에게든 지탄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얘기 좀 합시다.”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고 있을 때도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눈을 뜨고 있으니 예쁘다는 말보다는 신비롭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외모였다. 이국적인 느낌이 드는 회갈색 눈동자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얼굴, 몸매, 조금 전 들었던 목소리까지 외형적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썩어빠진 정신 상태가 문제일 뿐이었다.
“저요?”
여자가 자신을 부른 게 맞느냐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눈이 마주치고 있는데 모른 척하는 게 어이없었지만, 그는 일단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그쪽 말입니다.”
하지만 적의에 가득 찬 눈빛은 숨길 수가 없었다.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고 사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에게 연예인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물었다.
“아는 분이야?”
“아니.”
여자가 남자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쪽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그쪽을 아주 잘 아는데?”
지혁의 목소리가 더욱 냉랭해졌다. 어느새 말도 짧아졌다. 그는 지금 그녀의 말간 눈에 홀린 호영과 앞에 있는 남자가 안 됐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카페 사장의 얼굴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를 아신다고요?”
여자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좋아. 네 요망한 정체를 밝혀주지.’
이 남자, 저 남자에게 꼬리 치고 다니는 여자를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더 많은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해 낼 수도 있다는 정의감까지 발현되고 있었다.
“알지, 김호영 여자친구.”
지혁은 되도록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여자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누구요?”
호영의 이름을 들으면 기겁할 줄 알았던 그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태연했다. 콧잔등의 주름이 더 깊어졌을 뿐이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지혁이 되물었다.
“김호영 몰라?”
지혁은 뻔히 알아들어 놓고 모른 척 되묻는 그녀가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알아요.”
여자의 시인을 받아낸 지혁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감돌려던 찰나, 여자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사촌 오빤데 왜 그러시죠?”

수현은 당혹스러운 마음 반, 짜증스러운 마음 반이었다. 이사 온 주소를 어떻게 알고 불쑥 찾아와 엉겨 붙는 세진이 귀찮아 죽을 지경인데, 이건 또 뭔가 싶었다.
‘뭐야, 이 남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지혁에게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사촌 오빠라고요.”
그가 자신을 사촌 오빠인 호영의 여자친구로 오해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리를 지키고 살라는 말은 무엇이며, 왜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 건지는 그의 입으로 들어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드린 것 같은데, 더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수현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싸늘했다. 무슨 이유가 있으니 오해를 했을 거라고 이해해 보려 해도 다짜고짜 반말을 듣고 경멸하는 눈빛까지 받아야 했던 게 분해서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한참 만에 열린 지혁의 입에서는 수현이 원하는 사과 대신, 본인의 의혹을 명확히 하기 위한 질문이 나왔다.
“호영이 사촌 동생이라고?”
“네.”
그녀는 일단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눌러 참고 짧게 대답했다. 그와 호영의 관계를 알 수 없어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이름이?”
지혁의 질문이 이어졌다. 아니, 질문이라기보다는 명령조에 가까웠다. 그의 말에 순순히 따라줄 생각도, 의무도 없었기에 수현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변수가 있게 마련이었고, 이번 일의 변수는 세진이었다.
“수현아.”
눈치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세진이 나서서 그녀의 이름을 당당하게 공개한 것이다. 수현이 인상을 찡그리며 바라보자, 세진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황급히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맞다, 수현이.”
지혁의 웃음기 밴 목소리에 수현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향했다. 뜬금없는 친한 척이 당황스러웠다.
“오랜만이네.”
지혁의 기억은 고등학교 2학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문학 조별 발표 수업 때문에 그를 포함한 조원 여러 명이 호영의 집으로 몰려갔던 날이었다. 그날, 지혁은 수현을 처음 보았다. 허세가 심하고 음담패설을 즐기는 권영석이란 놈이 그녀를 보자마자 눈알을 굴려대며 탄성을 터뜨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와! 인형같이 생겼다!”
지혁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의 말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인형 같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어디 한군데 모난 구석 없이 부드럽게 떨어지는 얼굴선과 이목구비의 조화로움이 인상적인 아이였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뒤로 땋아 내린 수현은 또래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청순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호영이 동생? 이름이 뭐야? 몇 학년이야?”
그녀는 영석의 관심 어린 질문을 무표정하게 듣고 있다가 제 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잠시 무안해하는가 싶던 영석은 호영을 졸라서 그녀가 다섯 살 어린 사촌 동생이며 이름은 ‘수현’이라는 대답을 얻어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지혁도 덕분에 그녀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수현을 본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절 아세요?”
수현의 또렷한 목소리가, 과거를 추억하던 지혁을 현실로 끌어냈다. 그는 어린 시절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응시했다. 여성미와 성숙미가 더해지긴 했지만, 전체적인 이미지는 예전 그대로였다.
“알지.”
두 사람은 조금 전 주고받았던 질문과 답을 반복했다. 아느냐고 물었고 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건 지혁의 대답이었다. 수현이 누구인지 알기 전에는 호영의 여자친구로, 이번엔 호영의 사촌 동생으로 안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자기만 날 알고 있으면 다야?’
본인을 소개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에게, 수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신분을 밝혀주시겠어요? 전 그쪽이 누군지 몰라서요.”
“나 몰라?”
지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내가 그렇게 쉽게 기억에서 지워질 얼굴이 아닌데?’
그는 수현이 자신을 못 알아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그녀를 알아봤으니, 당연히 그녀도 자신을 알아볼 거라는 생각이었다.
“네. 몰라요.”
그런데 모른단다……. 지혁은 내심 자존심이 상했지만, 모른다는 사람에게 기억해 내라고 다그칠 수는 없어 순순히 제 이름을 밝혔다.
“류지혁.”
그는 호영이 고등학교 때부터 가장 친하게 지내온 제 이름을 수현에게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수현이 기억을 더듬듯 눈망울을 굴리자, 지혁은 구차한 설명을 덧붙였다.
“호영이랑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
“아…….”
시큰둥한 표정과 높낮이가 전혀 없는 감탄사. 수현의 영혼 없는 리액션에 지혁의 눈썹이 불만스럽게 휘었다. 기억이 났다는 건지, 예의상 내뱉은 말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수현이 곧바로 답을 내주었기 때문이었다.
“전 누구신지 잘 모르겠네요.”
지혁이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신선한데?’
굴욕적인 처지에 놓인 그는 나름 색다른 감정을 느꼈다고 자위하고 있었다.
“지금 호영이랑 나랑 같이 살고 있다는 건 알고 있나?”
“그러세요? 친구랑 같이 살게 됐다는 말은 들었어요.”
수현과 호영은 사촌지간이었다. 두 사람은 친남매만큼이나 가까운 사이였지만, 대부분의 남매들이 그렇듯 그들도 모든 일을 시시콜콜 떠들며 지내지는 않았다. 사실 수현이 호응해 주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수현아…….”
세진이 냉랭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두 사람 사이에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너 아직도 거기 있었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찌그러져 있다가 그마저도 무심하게 까인 그는 수현에게 육 년째 들이대고 있는 남자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톱스타 한세진이었다.
수현은 안 가겠다는 세진을 억지로 떠밀어 보내고 지혁과 대치하듯 마주 보고 섰다. 서로가 누구인지 알았다는 것은 조금 전의 일을 언급하지 말아야 할 어떤 이유도 되지 못했다.
“저를 오빠 여자친구로 오해하셨나 봐요?”
지혁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할 거 하시죠?”
“할 거?”
“사과하셔야죠.”
수현은 그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받아낼 참이었다.
‘어딜 은근슬쩍 그냥 넘어가려고.’
그냥 흐지부지 넘길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해야지.”
그녀의 냉소적인 얼굴을 보면서 그가 말을 덧붙였다.
“너한테 먼저 받고.”
“뭘 받아요?”
“사과.”
‘뭐라는 거야, 사과를 먼저 받겠다고?’
수현은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자신을 열 받게 하려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싶기까지 했다.
“내 침대에서 무단으로 취침한 것부터 사과 받겠다고.”
“누가 어디서 뭘…….”
말을 하던 그녀는 왠지 모를 싸한 전율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없는 말을 지어내서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빠 방이 부엌 옆…….”
지혁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방 바꿨어. 거기 이제 내가 써.”
화장실 앞에 있는 방은 절대 쓸 수 없다고 우기는 그에게 호영은 자신이 쓰던 방을 양보했다. 방 크기는 어차피 비슷했고, 예민한 지혁과 달리 공사장 한복판에서 살라고 해도 살 수 있을 만큼 무딘 호영은 방이 어디든 별 상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난히 깔끔했던 방과 정돈된 침구들이 수현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호영의 방을 보고 개집이냐고 타박을 했던 게 불과 얼마 전이었건만, 그새 그의 습성이 변했을 리 없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왜 남의 방에서 자고 간 건지 해명을 듣고 싶은데?”
수현은 자신을 취조하는 듯한 말투에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실수는 실수였고 해명은 해야겠다 싶었다.
“어제 집 열쇠를 안 가지고 나와서 같이 사는 친구가 집에 올 때까지 기다릴 데가 필요했어요.”
여자 둘만 사는 집이라 불안해서 이사 오던 날 추가로 보조키를 설치했고, 웬만하면 보조키까지 잠그고 다녔다. 보안은 강화됐으나 열쇠를 두고 나가기라도 하면 어제와 같은 난감한 일을 겪게 된다는 큰 단점이 있었다.
“감기 기운이 있어서 몸이 좀 안 좋았던 데다가, 저는 당연히 그 방이 오빠 방인 줄 알았고요. 친구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집으로 간 게 다예요.”
“감기 기운이 아니라 술 마시고 뻗은 건 아니고?”
그녀에게서 풍기던 술 냄새를 떠올린 지혁이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술집은 갔지만, 술은 안 마셨어요. 조금 전에 여기에 서 있던 친구가 제 옷에 술을 쏟았을 뿐이에요. 그래서 술 냄새가 났나 보네요.”
자신이 왜 이런 것까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어야 하는지 어이가 없으면서도, 수현은 최선을 다해서 해명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꼬치꼬치 캐묻는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그렇군.”
지혁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근데 이 아파트 살아?”
굳이 다른 동네에 살면서 여기까지 왔을 리 없었을 테니 말이다.
“오빠한테 못 들으셨나 봐요. 지난주에 1202호로 이사 왔어요.”
“우리 앞집?”
“네.”
‘오빠는 깃털만큼 가벼운 입으로 왜 이런 얘기는 안 하는 거야?’
수현은 호영의 입이 할 줄 아는 건 밥 먹는 것밖에 없는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동시에 지혁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단 거짓말은 아닌 것 같네.”
수현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다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실감이 갔다.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해 줘서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그녀의 심기를 상하게 하는 질문을 재차 던졌다.
“근데 진짜 나 기억 안 나?”
“안 나요.”
정색하며 대답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사실 수현은 그가 본인의 이름을 밝히기 직전에 그를 기억해 냈다. 지혁의 생각대로 그는 쉽게 몰라볼 수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십오 년이라는 세월과 당혹스러운 상황이 겹쳐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나를 몰라볼 수가 있느냐는 뉘앙스가 거슬려서 기억이 났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잘난 걸 알고 있는 남자한테는 무시가 최고의 복수지.’
수현은 입술을 더 꾹 다물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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