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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이름’에 이끌린 구원의 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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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12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498쪽 | 864g | 180*250*30mm
ISBN13 9791188740031
ISBN10 1188740032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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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속 ‘진리’는 인간의 ‘윤리ㆍ도덕’이라는 외투를 입고 있다.

그때였다. 그가 느닷없이 내 손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빼 내 손에 쥐어주었다.
“자, 이걸 하나님 말씀이라고 생각해 보자고. 하나님은 기록자에게 이 금을 주며 인간 세상에 전하라고 하시지. 그런데 그냥 주라고 하시지 않는 거야. 옷을 입혀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지.”
“옷을 입혀라?”
“그렇지. 그래야 소중한 진리를 보호할 수 있을 거 아냐. 만일 진리를 날 것 그대로 준다고 쳐봐. 어떤 이들은 그걸 팔아 술 사먹을 수 있고, 어떤 이들은 먹을 수도 없는 걸 줬다며 욕을 할 수도 있어. 그러니 포장이 필요한 거지. 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어때, 같은 말 같지 않아?”
이렇게 얘기한 그가 내 손에 있던 반지를 다시 가져갔다. 그리고는 반지를 손수건으로 쌌다. 손수건에 싸인 반지. 그걸 다시 내 손에 쥐어줬다.
“그래서 이렇게 예쁘게 옷을 입혀 전해 주라 하시는 거지.”
진리에 옷을 입힌다....... 막 그의 말을 음미할 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속사포처럼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럼 듣는 이들은, 내용물은 모른 채, 그저 손수건으로만 알고 이걸 갖게 되는 거야. 그리고 둘 중 하나로 살게 되는 거지. 영원히 손수건으로만 알고 살거나 아니면 그 안에 보석을 발견하거나 말이지.”
무슨 얘기인지 알 것 같았다. 보석은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이고, 손수건은 삶의 지혜로서, 그 진리를 감추는 포장지 역할을 한다는 말이었다. 그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진리는 인간 윤리로 감춰져 있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게 성경의 기술 원리 중 하나야. 인간 윤리에 감춰진 진리. 진리는 보이지 않도록 숨겨져 있다는 거지. 나는 그것에 ‘윤리/진리 원리’ 또는 ‘겉옷/속옷 원리’라고 이름을 붙여봤어. ‘속옷’도 ‘보석’이나 ‘정금(正金)’처럼 성경에서 진리를 상징하거든. 결국 ‘속옷’과 ‘진리’는 모두 ‘겉옷’과 ‘윤리’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의미지. 그렇다면 각각은 보이지 않는 세상과 보이는 세상을 표상하는 거야. 보이는 세상, 마귀가 통치하는 세상, 보이지 않는 세상,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
[중략]
“내 생각에, 사람들은 겉옷만 보는 것 같아. 성경에서 윤리적, 도덕적, 역사적 일들만 본다 이거야.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일종의 상식처럼 말이지.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성경에 대한 상식적 해석체계를 갖고 있는 것이고, 그 덕에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중략]
“내가 보기에, 이 겉옷을 벗겨 내고 ...... 속옷을 보면 말이지,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주신, 구원을 위한, 일종의 가이드북이야.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암호지령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나 할까. 하나님은 당신 백성에게만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코드를 알려주시지. 영적 코드를. 그래서 다른 사람은 아무리 읽어도 그 뜻을 알 수가 없는 거야. 이사야서에 그 말 있잖아. 그들의 귀를 닫고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듣고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라.”
말을 마친 그가 천천히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소주 한 모금을 마치 몇 십 년 된 고급 와인 음미하듯 마셨다. 그리고는 슬며시 내 눈을 쳐다봤다. 그 눈. 내 말 어때? 맞는 것 같아? 이렇게 묻고 있었다.
--- p.177~178


■ 금식할 때는......

“금식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이 구절, 어떻게 생각해?”
“글쎄, 말 그대로 아닐까.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에게는 금식할 때 외모를 단장하는 게 금기였어. 그러니까 예수 말씀은 그 금기와 형식, 율법을 깨버리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 하지만 요즘은 그런 금기가 없잖아. 그러니 현대적 의미의 해석은 달라져야 할 거야. 보통은 금식하면서 너무 힘들다는 티를 내지 말라는 정도로 알고 있지. 그게 일반적인 해석이야.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금식할 때는 아무래도 사람이 초췌해지잖아.......”
“맞아. 그런데 그건 겉옷 아닐까? 난 이 말의 ‘속옷’을 찾아보다가 정말 엄청난 반전을 보게 됐지.”
“속옷? 반전?”
“이 구절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지.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어. 여기서 말하는 ‘금식’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금식’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갑자기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 너는 이제 내 백성임을 알았다, 그러니 이제 하늘의 양식만 먹고 세상의 양식은 금해야 한다, 이렇게 말이야.”
“뭐? 세상 양식을 먹지 말라는 의미에서의 금식? 그럼 금식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데.......”
“맞아. 그런데 그렇게 해석해 보면 금식뿐 아니라 구절 전체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지.”
“어떻게?”
“머리에 기름을 바르다, 뭐 떠오르는 거 없어?”
“있지. 성경에서는 왕이나 제사장을 임명할 때 그 말을 쓰잖아.”
“맞아. 마태복음에는 ‘금식할 때 네 머리에 기름을 바르라’고 나와 있어. 그리고 성경은 성도를 지체라고 하잖아. 그럼 머리는 누구일까?”
“예수?”
“그렇지.”
“예수에게 기름을 발라라?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이런 거지. 내 백성아, 너는 이제 세상 양식을 금하여라, 그리고 나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새로웠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해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이 됐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머리가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 p.188~189


■ 신은 왜 폭력을 쓰시는 것일까......

“신의 폭력성. 그게 기독교의 정수(精髓) 아닐까?”
그런데 한 술 더 떴다. 하나님을 폭력과 연결시키는 게 귀에 거슬렸었다. 그런데 그게 ‘정수’라고까지 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에게 물었다. 왜?
“선악과 따 먹은 인간은 선악을 자기마음대로 정하잖아. 신처럼 말이지. 하나님 백성이라 해서 하나님 말씀을 순순히 따를 리가 없어. 그러니 폭력을 쓰시는 거지. 당신 백성을 바른 길로 데려가자니 어쩔 수 없는 거야.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 아닐까?”
인간은 교만하다, 자신을 하나님으로 안다, 당연히 하나님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나님은 폭력을 쓰실 수밖에 없다, 그래야 당신 백성을 올바른 길로 데려갈 수 있다....... 꼭 틀린 말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난 여전히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그가 쏜살같이 말을 이었다.
“반드시 죽으리라! 하나님이 선악과 따먹은 아담에게 하셨던 말씀이지. 이건 결국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 뜻이잖아. 그렇게 해서 펄펄 살아 날뛰는 육(肉)을 죽이고, 죽어 있던 영(靈)을 살리신다는 거 아닐까? 예수처럼. 하지만 인간은 누구도 죽고 싶어 하지 않잖아. 그게 문제야.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 뜻에 저항할 수밖에 없어. 결국 하나님은 폭력을 쓰실 수밖에 없는 거지.”
[중략]
“글쎄.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당연하지. 왜냐하면, 인간은, 육이 펄펄 살아 날뛰는 인간은, 절대 육적인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거든.”
“죽는다......”
“‘환란’의 의미를 생각해 봐. 많은 이들이, 콩 한 알을 맷돌에 넣고 형체도 없이 갈아버리는 것, 그게 ‘환란’이 갖는 진정한 의미라고 말하지. 인간의 자아가 완전히 으깨지는 거야.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은 옳고 그름을 스스로 정하는 존재가 됐어. 자신을 신으로 여기는 거지. 성경은, 그 환란의 과정 없이, 인간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수 백 번도 더 얘기하고 있다고.”
“죽는다....... 그건 그저 세속에 대한 욕심을 버린다는 정도로만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세속에 대한 욕심을 버린다? 그게 되겠어? 하나님은 말이야, 욥에게 하셨던 것처럼, 성도의 소유 모두를 빼앗아 버리신다고. 그래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만드시는 거지. 그 과정에서 폭력이 쓰이는 거야. 그리고 그게 바로 ‘죽음’이 갖는 의미지. 성도는 이 땅위에서 그 과정을 반드시 겪어야 해. 그래야 절규하듯 토해 낼 수 있는 거야. 하나님, 저는 신이 아닙니다, 신은 당신이십니다! imu! 이렇게 말이야.”
“글쎄.......”
“글쎄? 인간이란 말이지, 그렇게 죽었다 살아나도, 변하기 어려워. 여전히 육체를 갖고 있는 탓이지. 인간은, 육신을 갖고 있는 인간은,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욕심을 결코 완벽하게 버릴 수가 없다고. 세상 사랑과 욕정이 다시 스멀스멀 일어나게 돼 있어. 그게 인간이야. 사랑의 매? 그것 갖고 되겠어? 어림없는 얘기라고.”
“글쎄, 난 꼭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해. 하나님께서 매를 드시기 전에 순종하면 되는 거지. 나도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설교 해.”
[중략]
“아니야, 그렇지 않아.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 백성을 죽이신다고. 폭력적으로.”
“왜 꼭 그렇게 생각을 하지?”
“그게 진리거든, 진리.”
“진리?”
“그래 진리. ‘진리’가 히브리어로 뭔지 알아? 알레프(?), 멤(?), 타브(?)라는 자음 세 개로 만들어진 문자, 에메트(???)야. 에메트의 첫 자음 알레프는 ‘신’을 뜻하지. 그리고 메트(??)는 ‘죽음’이란 뜻이야. 놀랍지 않아? ‘진리’란 결국 ‘신’과 ‘죽음’의 연합인 셈이지.”
“신과 죽음. 그게 진리의 의미라고?”
“그렇지. 신과 죽음.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신의 죽음, 신이 함께 하시는 죽음, 신이 이끄시는 죽음, 신이 실행하시는 죽음. 하나님은 하나님 아들 예수를 죽이신 뒤,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 밖아 죽이신다고. 반드시. 그로써 성도를 진리로 만드신다는 거야.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잖아. 너희는 자기 십자가를 메라. 십자가에 달아 죽이시겠다는 얘기야. 그게 ‘사랑의 매’로 되겠어?”
어느새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화난 사람 말투였다.
--- p.206~209


■ ‘복(福)’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건 불행이야. 큰 복을 받았다? 그건 저주야, 저주. 인류 역사 상 하나님의 가장 큰 복을 받으신 인간 예수. 인간의 시각에서 보면 달라.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저주를 받은 인물이라고. 티끌만한 죄도 없는 그가 가장 고통스럽게 돌아가셨잖아. 그런 삶, 누가 살고 싶겠어?”
[중략]
여기까지 말한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흥분한 듯 보였다. 억지로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내게 말했다.
“결론. 나, 성경 말씀, 받아들이기 어려워. 왜? 그렇게 살기 싫으니까. 하나님은 그게 축복이라고 말씀하시지. 하지만 인간에게는 아니야. 그건 저주야. 예수 믿고 예수처럼 살겠다? 99%는 착각이거나 위선이야. 살 수도 없고 살고 싶어 하지도 않아. 하지만 성령께서 그런 삶을 이끄신다는 거 아냐.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성도를 반드시 십자가에 달아 죽이신다는 얘기라고. 99%의 성도는 목숨 걸고 저항할 거야. 저 제발 좀 내버려 두세요. 저, 죽기 싫어요. 십자가에 달리기 싫어요. 이렇게 외치면서 말이야.”
이 말을 한 그가 또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한 번 더 숨을 몰아 쉰 뒤 얘기를 이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마태복음, 7장 14절. 우리나라 성경은 모두 ‘적다’라고 썼는데, 영어는 두 가지야. ‘only a few’ 즉, ‘적다’와 ‘few’ 즉, ‘거의 없다’지. 원어 헬라어를 찾아봤어. ‘올리고스(?λ?γοζ)’인데, 많은 신학자들은 이를 ‘few’ 즉, ‘거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그럼 다시 생각해 봐야 해. 예수의 제자, 예수의 후손은 거의 없다는 얘기라고. 예수 믿는다? 대부분 거짓말, 착각, 자기기만일 수 있다는 거지.”
함부로 할 소리가 아니었다. 예수 믿는 신자가 대부분 거짓이거나 착각일 수 있다니. 큰일 날 소리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됐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진다는 게 보통 일인가 말이다. 신자만 그런 게 아니다. 목사 중에도 가짜가 많다. 세속적 성공과 복을 약속하며 교세를 확장시킨다. 그런 목사 아래에서 교인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생명의 길로 가는 이가 거의 없다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예를 하나 더 들까?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더라. 마태복음 22장 14절.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렇게 돼 있지. Many are called, but few chosen.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은데 선택된 자는 거의 없다는 거야. ‘거의 없다’. 그게 중요한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수쟁이 대부분은 시쳇말로 ‘가짜’라는 얘기야. 거짓 믿음이라는 거지.”
거짓 믿음.
왠지 모르게 그 말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은 극소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순교를 요구하시는 거야. 하나님은, 무덤에서 건져낸 성도를 다시 사지(死地)로 몰아가시는 거라고. 그러니 누가 그 길을 가겠어? 누가 그 길을 가고 싶겠어?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거지.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누가복음 18장 8절!”
[중략]
이 말을 하면서 그는 더 흥분한 듯 보였다. 목소리도 떨렸다. 하지만 낯설었다. 순교라니. 과연 요즘 세상에도 그런 게 있을까? 요즘 그런 거 없어, 걱정하지 마.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가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 그것뿐이 아니라고 했다. 또 있다고 했다. 불신자에 대한 성경의 혐오감. 그 역시 도를 지나쳤다고 했다.
“개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돼지우리에 살던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왔다, 자녀들의 빵을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매지 말라....... 성경은, 2000년 전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대하듯, 또 19세기 백인이 흑인을 대하듯, 불신자를 개나 돼지로 여기고 있어.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이?”
그는 이 얘기를 하며 몸서리를 쳤다. 성경의 인간관은 지나치게 차별적이라고 했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했다. 담담했던 목소리 톤이 다시 높아졌다.
“선지자가 불신자, 즉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여호와 앞에서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사야서 40장 17절! 한국어 번역은 심심해. 영어 번역을 볼까? worthless and less than nothing! 존재할 가치가 없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닌 것보다 못하다! 예수께서 가롯 유다에게 하신 말씀, 안 태어나는 게 좋을 뻔 했다, 그 말씀과 같아.”
거기까지 얘기한 그가 말을 멈췄다. 잠시 숨을 고르는 듯 보였다. 그리고는 숨가쁘게 또 말을 이어갔다.
--- p.221~224


■ 성경의 서술구조 ...... ‘다중의미구조’와 ‘무관커뮤니케이션구조’

다중의미구조.
이런 이름을 지으니 이해가 한결 수월했다.
[중략]
“다중의미구조에 대해 또 할 말이 있어. 이건, 당연한 얘기겠지만,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는 거지. 가장 단순한 ‘2중 의미구조’를 생각해 보자고. 예를 들어 A는 겉옷의 의미로 얘기하는데 B는 속옷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거야. 대화가 되겠어? 한 사람은 인간적 언어로, 또 한 사람은 영적 언어로 말하고 있는 거지.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렇게 말한 그가 웃기는 얘기를 하나 해 주겠다고 했다.
돈 많은 할아버지가 환전을 하러 은행에 갔단다. 그러자 젊고 예쁜 여성 은행원이 엔화 드릴까요, 달러 드릴까요 했단다. 할아버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왈. 아들 낳아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엔화’와 ‘달러’를 ‘애 낳아’와 ‘딸 낳아’로 잘못 들었다는 것이다.
웃겼다.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 얘기가 성경 말씀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까?
이 우스갯소리를 마친 그가 성경 구절 하나를 보여줬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자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 19-22).

“요한복음의 이 말씀, 내가 보기에, 너무 너무 중요해. 다중의미구조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중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의미 해석이 명확해질 때 비로소 그 오해가 해소된다는 걸 보여주지. 요한복음 기자는 바리새인과 예수께서 쓰는 ‘성전’의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거야. 바리새인은 일반 의미로, 예수께서는 비유로 쓰셨다는 거지. 달리 말하면 바리새인은 ‘겉옷’, 예수께서는 ‘속옷’의 의미로 쓰신 거야.”
여기서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숨을 고르는 듯 보였다. 그리고 강한 어조로 또 말했다.
“이 해설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지금도 이 ‘성전’이라는 단어가 진짜 성전을 가리킨다는 해석과 예수의 육체를 가리킨다는 해석으로 나뉘어 격렬하게 싸우고 있지 않을까? 제3의 해석도 나올 수 있겠지. 이때의 성전은 성도를 가리킨다는 식으로 말이야. 그리고 많은 이들은 이렇게 결론짓겠지. ‘성전’이라는 단어에는 이러 저러한 두세 가지 해석이 있다고 말이야.”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 나왔다. 맞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육신을 성전에 ‘비유’하셨다. 그러면 예수의 죽음은 성전의 파괴로, 그리고 사흘 후 부활은 성전의 재건으로 얘기될 수 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말씀을 ‘문자’로 받아들였다.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네가 어떻게 사흘 만에 짓겠느냐며 거짓말쟁이에, 사기꾼 대하듯 했다. 제자들 생각도 같았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여자 은행원의 대화처럼 서로 핀트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은 이거야.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특정 단어나 문장을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하거나 받아들일 경우 엉뚱한 대화가 이뤄진다는 거지. 우리말로는, 말 그대로, 동문서답(東問西答)이야. 이 말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학문적 개념을 하나 만들어 보자고. 무관(無關)커뮤니케이션구조. 이게 어떨까 싶어. 서로 관계없는 의미의 단어나 문장을 쓰면서 전혀 관계없는 대화를 나눈다는 뜻이지. 더 쉽게는 ‘동문서답구조’라고 말할 수 있을 거야. 영어로는 ‘irrelevant communication structure’ 정도면 되지 않을까?”
“무관커뮤니케이션구조, 동문서답구조....... 서로 관계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커뮤니케이션 구조 또는 대화구조라는 얘기네.”
“맞아. 성전을 헐라, 3일 만에 다시 짓겠다. 이 구절이 대표적이야. 바리새인과 예수는 모두 ‘성전’이라는 공통된 단어를 쓰고 있지만 의미면에서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단어지. 결국 대화 주체들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는 거야.”
그는 또,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기자에게 크게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팁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적지 않은 구절의 해석을 두고 논란을 벌이고 있을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한 그가 예를 하나만 더 들겠다고 했다. 요한복음 4장 31~34절이었다.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또 웃음이 나왔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에 비유한 것인데 제자들은 이를 진짜 먹을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동문서답, 또는 그가 말한 무관커뮤니케이션구조, 맞다.
하지만 그의 얘기는 그 정도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아 보였다. 궁금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물었다.
“그런데?”
“이 같은 동문서답, 또는 무관커뮤니케이션구조로 쓰인 성경구절, 또 있을까, 없을까?”
“글쎄.......”
“있어. 당연히 있지. 요한복음 기자는 독자에게 힌트를 준 것일 뿐이야. 이건 동문서답 구조야, 여기서는 힌트를 주는 거니까, 다른 곳에서도 찾아 봐, 그걸 찾으면 너희는 깨달을 거야, 하늘의 비밀을 알게 되는 거지. 이런 설명이 들리는 것 같지 않아? 난 분명 그런 말로 들려. 그러니 해설이 붙지 않은 동문서답구조를 찾아야 하는 거야. 그럼 하나님의 진짜 말씀, 즉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거지.”
“그럴까?”
“당근! 그리고 난 이 대목에서 확신을 하나 갖게 됐어.”
“확신? 뭐지?”
“복음서에는, 반드시, 복음서 저자가 직접 만든 해설서가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극소수 지도층만 볼 수 있는 비밀스러운 해설서. 강의안이나 핵심정리 형태, 또는 구체적인 설명이 덧붙여진 확장된 복음서 형태가 있을 수 있겠지. 반드시 문서일 필요도 없을 거야. 구전(口傳)도 가능했을 테니까.”
“그런 게 왜 필요한 거지?”
“비유와 상징이 넘쳐나는, 다중의미구조와 동문서답구조로 쓰인 책. 시간이 가면 아마 글을 쓴 기록자조차 그 진의(眞意)를 잊어버리고 말 거야. 그게 없으면 그 누구도 그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없게 된다는 거지. 보이지 않는 세상, 감춰진 말씀과 진리로 가는 길, 그 미로(迷路)를 찾으려면 반드시 그게 필요한 거야. 그게 지도요 지침서거든.”
“그럴까....... 많은 신학자들이 말하는 Q복음서가 그런 걸까?”
“No. 아니야. 그건 예수님의 어록이라는 거 아냐? 내 생각에 그건 해설서가 아니지.”
“그럼?”
“나는 오히려 ‘마가의 비밀복음’이 그 해설서일 수 있다고 생각해.”
마가의 비밀복음.
처음 듣는 얘기였다. 비밀스럽게 전수된 또 다른 마가복음이 있다는 얘기 아닌가. 해설서로 볼 수도 있는. 호기심을 끌만했다. 하지만 왠지 미덥지가 않았다. 비밀복음이라니. 실질적인 근거가 필요했다. 그게 없다면 그냥 소설 같은 얘기가 되고 만다.
그런데 그가 있다고 했다. 마가의 비밀복음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있다는 것이었다.
--- p.245~248


■ ‘진리’는 신화이며 동시에 역사다!

“처음에는 나도 예수를 꾸며낸 이야기, 즉 신화로 여겼어. 예수가 실존 인물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지. 그래서 성경을 덮으려 했었지. 그리고 본래의 내 자리로 돌아가려 했었어.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나는 말이지, 그럴 수가 없었던 거야. 내게는, 내게는 말이지, 이상한 게 있었어. 정말 이상한 거.......”
“이상한 거? 선 박사의 ID, 이름, imi, imu, 그거?”
“맞아. 내 ID, 내 이름, imi, imu. 그리고 그들과 내가 겪었던 그 많은 일들과의 관계. 그건 모두 실재거든. 역사적 실재. 생각해 봐. 나는 20년 가까이 웹상에서 imi란 이름을 썼어. ‘나는 신이다’를 외치며 살았던 거지. 실제의 삶도 그랬고. 나는 신처럼 선악을 내 마음대로 결정했고, 내 마음대도 살았던 거야. 하지만, 하지만 말이지.......”
“하지만? 하지만 뭐?”
“죽었다 살아난 거야. 모든 걸 잃고. 그러고 나서 새롭게 깨달았지. 지금 웹상에서 내 이름은 imu야. ‘신은 당신입니다’를 고백하는 거지. ‘imi’와 ‘imu’라는 ‘이름’은 내가 이 현실 세계와 관련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지은 것이었어. 하지만 신과의 관계 아래서, 그 ‘이름’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내가 부여한 의미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어. 성경 말씀이 그것을 알려줬지. 성경 말씀이 내 삶에서 그대로 실현된 거야. 그게 내 삶에서 일어난 실제 역사야, 실제 역사.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 말은 알지. 알 것 같아. 그런데?”
“만일, 만일 말이지, 성경이 비유이자 신화라면, 그렇다면, 이것, 내 경험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지? 신화와 비유인 성경 말씀이 내 삶에서 체현됐다? 이 말은 신화와 비유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실현됐다는 말과 같은 거야. 그게 말이 돼? 말이 된다고 생각해? 게다가 나는 성경을 읽으며 이 사실을 알았고 여기까지 왔어. 그걸 설명할 수 있겠어? 설명할 수 있겠냐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내 눈을 봤다. 의문 가득한 눈빛이었다.
“이상했어. 그림 속 하나님께서 현실, 내가 직면하고 있는 바로 이 현실로 걸어 나오신 것 같았지. 저벅저벅.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야. 넌 내 백성이다. 난 살아 있는 너의 하나님이다. 네게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오래 참고, 오래 준비하고, 오래 기다려왔다....... 신 목사, 내가 이걸 받아들일 수 있겠어? 교회도 안 다니는데. 성경 한 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고! 미치지 않은 이상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
[중략]
여기까지 말한 그가 먼 길을 달려온 임금님의 사자(使者)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급하게 전해야 할 놀라운 이야기가 있는 사람 같았다.
“그게 다가 아니야.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있어. 이렇게 따지면, 성경 말씀은, 성경 말씀 그대로, 지금도, 우리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버전으로,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얘기가 되는 거야. 신화이자, 비유이자, 역사로서의 말씀이....... 나는 말이야, 나는 말이야, 이걸 못 받아들이겠어.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미친 거 아냐?”
성경 말씀이 지금도 새로운 버전으로 진행 중이다!
그의 말은 참으로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성경. 그것은 상징이고 비유이고 역사다. 그리고 개인과 가족, 민족, 인류 모두에게 적용된다. 게다가 지금 이 시간에도 살아 움직인다. 죽어 있는 옛날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나는 그걸 안다. 믿음으로 안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왤까? 따지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하찮은 인간의 이성을 갖고 영원히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지기 때문이다. 그럼 의심이 생긴다. 당연하다. 그리고 의심은 믿음의 적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에게 믿음을 줘야 했다. 그래서 그에게 말했다. 외치듯 말했다.
“맞아. 선 박사 말대로 성경은 팩트야. 개인이든 인류든, 실제 역사 속에서 일어났고, 지금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 일어날 일이라고.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개인이든 인류든, 언제 어디서든, 영원히, 그리고 모든 곳에서 살아 움직이시는 거야. 선 박사가 말했잖아. 하나님의 이름은 동사다, 그것도 만능의 be동사! 그러니 의심하지 마. 믿어! 무조건 믿어, 무조건 믿으란 말이야!”
[중략]
“아아.”
팔로 머리를 감싸 안은 그가 고개를 꺾었다. 다시 한 번 그의 혼란과 고통이 느껴졌다. 성경 말씀이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됐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이해가 됐다. 누구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교회도 제대로 한 번 다녀 본 적이 없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현장에 있었다 치자. 아니 본인이 직접 그 바닷길을 건넜다 치자. 그래도 그는 그걸 믿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믿지 않았을 것이다.
--- p.279-281


■ 당신은 당신이 누워 있던 회칠한 무덤을 보게 되리라.

나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감춰진 것,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꼭 보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게 누구라도, 그 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의 의미가 홀라당 뒤집히는, 아주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되리라 믿는다.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당신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당신의 눈을 가리는 것, 그게 뭔지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 ‘베일’을 찢어보라. 그럼 당신의 눈을 가리던 ‘비늘 같은 것’도 함께 떨어져 나갈 것이요, 그럼 당신도 보게 될 것이다. 베일 뒤에 감춰진 것, 그래서 당신이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것, 바로 진리의 ‘말씀’을.
잠시 그 ‘말씀’을 떠올려 보자.
당신은, 당신이 누워 있던, 그 회칠한 무덤을 보게 될 것이요, 그 안에서 ‘더러운 걸레(filthy rags)’를 몸에 두른 채, 개가 토한 것을 먹겠다며, 미친 듯, 남을 속이고 나를 속이고, 남을 죽이고 나를 죽이는, 당신의 그 어둠 안팎의 굶주린 귀신 떼, 즉 아귀(餓鬼)들을 볼 것이요, 그리고, 그들에게 속고 그들에게 살해당한 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긴 빈털터리로, 그들의 세계인 그 무덤에서 쫓겨나, 그 더러운 무덤 안을 내려다보며, 바로 그 더러움에 몸서리치는, 새로 태어난, 바로 그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은 불같은 ‘시련’, ‘환란’, ‘고통’ 모두는 다름 아닌 ‘산고(産苦)’였음을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결국 당신은, 씨를 받고, 아들을 잉태했던, 여자였던 당신은, ‘산고’ 후 ‘아들’을 낳은 뒤, 바로 그 ‘아들’이 되고, 그로써 ‘남자’가 되고, 또 그 ‘여자의 후손’이 되는, 아주 아주 해괴망측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 당신 발밑에 깔려 산산조각 난 뱀 대가리를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때 당신이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그 이름’을 찬양하는 일이다.
그 더러운 무덤을 열고, 당신을 거기서 건져내신,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그 이름’을.
그것은 필연이요, 정해진 이치다.
당신이 진정 ‘그분’의 백성이라면 말이다.
--- p.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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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i.
‘나는 나’라는 뜻이다. 주인공 선희진 박사는, 지난 10여 년 동안, 이 세 개의 알파벳을 자신의 이메일 ID로 썼다. 자의식 강한 그는 ‘나는 나’임을 강조하며, 타인의 시각이나 간섭에 개의치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한 대로 살겠다는 생각으로 이 ID를 자기 ‘이름’으로 써 왔다.
하지만 인생이란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그는 50을 코앞에 둔 나이에 뜻하지 않은, 참담한 일을 겪는다. 한 명문대학의 유명 교수 Y가 선 박사의 책을 교묘하게 베껴 마치 자기 것인 양 위장해 새롭게 책을 출판했던 것이다. Y는 대학원생인 조카의 지도교수였으며 조카의 소개로 알게 됐다. 당시 선 박사는 연구 분야가 비슷한 Y에게 자기 책을 선물로 줬는데, Y는 바로 그 책을 베껴먹은 것이다.
선 박사는 Y의 이 후안무치(厚顔無恥)를, 조카를 볼모로 한 치졸하고 악독한 행태로 받아들인다. 분노한 그는 Y에게 민ㆍ형사 상 책임을 묻겠다고 결심한 뒤 로펌을 찾아가 변호사 백정현에게 자문을 구한다. 그리고 근거 자료 정리에 몰두한다. 목표는 하나. Y를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시키겠다는 것이었다.
8개월 뒤. 그는 마침내 Y의 표절 근거를 확증할 자료를 완성시킨다. 워낙 교묘한 베끼기였던 탓에 자료는 엄청났다. A4 용지 120매. 하지만 그는 정작 소송까지 가지는 못한다. 준비 과정에서 치명적 질병을 얻었던 탓이다. 소송 직전 받은 건강검진에서 그에게 위암 판정이 내려졌던 것이다. 그는 이 사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술, 담배, 수면부족, 과로에 찌든 8개월이었다지만 그렇게까지 몸이 망가졌을 것이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좀처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선 박사. 그러나 이윽고 그는 전쟁 상대가 Y에서 암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죽음에 대한 극단적인 두려움, 위 절반을 잘라내는 큰 수술, 그리고 그 후유증을 경험한 선 박사는 이 모든 과정에서 성경을 읽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 그러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이름을 모세에게 알려주시는, 출애굽기 3장 14절을 접하고 또 한 번 충격에 빠진다. 10여 년 동안 자신이 인터넷상에서 쓰던 ID, 즉 이름, ‘imi’가 이 구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선 박사는 자신의 ID ‘imi’를 ‘나는 나니까 내 맘대로 살겠다’는, 단순한 의미로 써 왔다. 하지만 성경적 뜻풀이는 전혀 달랐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 구절 속 단어 ‘I Am’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imi’란 ‘I Am is I’, 곧 ‘하나님이 나다’란 뜻을 갖는다. 선 박사는 여기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나=신’임을 주장하는, 교만한 자신의 ‘육(肉)’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고, 죽어 있던 자신의 ‘영(靈)’을 부활시켜 ‘나=피조물’이라는 올바른 자기 인식의 자리로 인도한 것일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 이름’에 대한 의미 탐구를 통해 성경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결론에 도달한다. 성경이란 ‘하나님이 주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만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밀한 구원의 가이드 북’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다중의미구조(多重意味構造)’와 ‘무관(無關)커뮤니케이션구조’로 쓰였으며, 따라서 진리는 감춰져 있고, 하나님께서는 정해진 때에, 오직 하나님 백성만의 눈과 귀를 여셔서, 감춰진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구원의 진정한 의미’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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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 : 전(前) 세계성서공회 아태지역이사회 의장
감신대 교수 역임ㆍ대한성서공회 총무 역임


놀랍다. 기독교 역사가 100년을 넘으니 한국에도 이런 작가, 이런 작품이 나오는구나 싶다. 무엇보다 작가의 치열한 성경 읽기에 박수를 보낸다.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치밀한 분석에 기초한 성경 재해석은 참으로 새롭고 훌륭하다. 평생 신학에 매달려온 사람조차 놀랄 만하다. 100년이 넘었다고는 해도 한국의 기독교 역사가 서구에 비해 여전히 일천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특히 놀라운 것은, 작가가, ‘다중의미구조’ 등 독자적인 성경 해석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실제로 그 방법론에 의거해 성경을 재조명한다는 점이다. ‘2중의미구조’라는, ‘다중의미구조’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활용해 작가는 산상수훈 등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성경 구절을 재해석한다. 그리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도전적이란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런데 작가는 한 발 더 나간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감춰놓으신 ‘비밀의 구원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비밀’을 오직 ‘하나님 백성’에게만 보여 주신다. 작가가 성경을 가리켜 ‘하나님이 주신, 그리고 하나님 백성만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밀한 구원의 가이드북’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소설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 뒤에 감춰진, 보이지 않는 은밀한 비밀을 다룬다. 이 책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일독(一讀)을 권한다. 성경을 펼쳐놓고 저자의 질문에 답해 보고, 저자가 감춰둔 비밀 코드를 찾아보라. 어쩌면 당신도 소설 속 주인공처럼 ‘골수를 쪼개는 말씀의 힘’을 경험할지 모른다. 작가가, 주인공의 입을 빌려, 여러 차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도록 애쓰라고 주문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민영 : 전(前)국제위클리프연맹 부대표ㆍ성경번역선교회(GBT) 선임회원

이 책은 새롭고 도발적이다. 그리고 불편하다. ‘보수적’이라 불리는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신학적 차원에서 정도(正道)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게 묘하다. 거기에 현장감과 긴박감이 넘친다. 성경해석이, 마치 추리 소설을 읽는 듯 긴장감을 준다. 독자는 새로운 ‘성경읽기’와 ‘성격해석’이 주는 짜릿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필자가 이 책을 독자에게 적극 권장하는 이유다.
그의 성경해석은 무척 새롭다. 성경이 ‘다중의미구조’와 ‘무관커뮤니케이션구조’로 쓰였다며, 이를 제대로 파악해야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토대로 작가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성경의 구절을 새롭게 제시한다. 그의 해석에서 독자는, 독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성경 지식’ 즉 성경 해석에 대한 ‘상식’이 파괴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의 주장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그의 설명이 새롭고 설득력이 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의 책을 본 뒤, 어쩌면, 세상에 대한 시각이 일부 바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책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된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밝혔듯, 이 책의 주요 목적은 독자의 ‘인식변화’에 있기 때문이다.
2017년은 종교혁명 발발 500주년이 되는 해다. 나는 이 책이 내게 그랬듯 우리나라 기독교계에도 도발적이고 불편한 책이 되기 바란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식’에 대한, 끝없는, 그리고 강렬한 문제제기가 되기 바란다. 그를 통해 한국 기독교인들의, 작지만 의미 있는 ‘인식변화’를 기대해 본다. 그 같은 ‘인식변화’가, 미력하나마, 개혁이 필요한 한국교회에 그 ‘단초’를 제공해 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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