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하마. 너희는 해와 달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이 해와 달이 되라고 하였을 때, 너희는 참 많은 것 담은 표정으로 이 어미를 쳐다보
았다. 그렇지 않으냐. 즐거운 놀이 빼앗긴 듯도 했고, 무슨 큰 징벌 받은 듯도 했지. 그뿐이겠느냐. 의문으로 가득하기도 했어. 어머니, 해와 달이 멀쩡히 저렇게 떠 있는데 또 무슨 해와 달이 되라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지.
이미 내가 말했고, 너희도 다 알지만, 다시, 다시 말하마. 그래, 해와 달은 예부터 하늘에 박
혀 있었다. 그러나 멀쩡히 하늘에 박혀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해와 달이 멀쩡했다면 너희에게, 아니,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겠느냐. 산골 오막살이에서나마 단란하게 살아가던 우리에게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일이 생길 수 있었겠느냐 말이다. 해와 달이 한번 만들어져 내내 지금까지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이 어미인들 예전에야 알았겠느냐.
--- p.13
배신과 모함. 그것은 너 시아버지가 꿈꾼 새 세상에 죄가 스며든 일이었다. 시작부터 그리되었던 것. 언제인가 다시 읍성이 생겨난다. 그때 분명하게 드러날 일을 나무도령은 미리 내다봤고 앞당겨 고민했다. 사람의 마음에 죄가 이미 씨앗처럼 담겨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살이가 사람의 마음에 죄를 심어 자라나게 하는 것인지 하는 문제까지 따져 답을 얻고자 고민했다. 누구나 다 죄를 지을 수 있는 것. 나는 그리 생각한다. 처지가 달랐다면 우리가 그 부부처럼 그러지 말았으리란 법 없다고 본단 소리다. 집안을 이루고 마을을 이루고 읍성을 이루며 사는 일은 결국 죄지을 수 있는 우리를 서로 감당하며 살아가는 일이지 싶다. 사실 감당한다는 말은 너 시아버지가 제 나무 아버지와 함께 물 위를 떠돌던 때, 그때부터 한 소리구나.
--- p.126~127
곰이 사람이 되었느니라. 늙은 암곰이 기도하여 사람 처녀가 되었느니라. 이 어미가 사람 처녀가 되었다고 방금 이야기했다. 너는, 너는 그러니까 이 어미가 사람 처녀일 때 낳은 자식이다. 너를 떠나보낼 때가 닥쳤다는 것을 알고서 비로소 그 일을 털어놓는 것이다. 그러니 잘 들으려무나.
사람 처녀로 변하였을 때 이 털가죽은 벗고 입을 수 있는 한 벌 털옷이었다.
나는 빠르게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고 내내 놀랍기는 했지만 머릿속이 맑았다. 봄이 한창이
다 싶을 때도 갑작스레 큰 눈이 내리고 그러지 않느냐? 내가 사람이 되고 얼마 뒤에도 눈이
내렸지. 그때 그 산에는 사냥을 나온 한 무리에서 떨어져 길을 잃고만 사내가 있었지. 눈에 갇혀 먹지도 못하게 되어 거의 정신을 놓은 사람 사내가 있었지.
내가 그 사람을 구하였다. 나는 이미 기력을 다 회복했지. 그랬기에 눈에 갇힌 그 사내를 안고 동굴로 데리고 올 수 있었지. 너를 뱃속에 갖게 된 것은 이미 반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 사내에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줘 온전히 살려낸 다음의 일이지.
--- p.140
내 동생입니다.
벼랑으로 내려와 나를 찾아낸 노루가 내 동생입니다. 까무러친 나를 혓바닥으로 핥고 콧등
으로 두드리던 노루가 내 동생입니다. 나는 당신의 아내이고요.
노루가 내 동생이었고, 나는 당신의 아내이지요. 당신이 쏜 화살에 맞아 나자빠졌다가, 짐승
으로 변하며 죽은 저 요물이 아니라, 내가 진짜 당신의 아내이지요. 두 해 전 숲 속에서 처음 만나 당신을 따라 이 집으로 와 나는 혼례를 올리고 당신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때도 노루는 내 동생이었습니다. 내내 내 동생이었습니다. 노루야, 노루야 하고 내가 불러댄 것은 그러니까 동생아, 동생아 하고 불러댄 것이지요. 당신 앞에서 차마 그리 부르지 못해 노루야, 노루야 한 것이지요. 그러면서 운 것이지요.
--- p.171
어머니와 나는 몇 날 며칠을 하늘만 쳐다봤다.
모든 게 못난 자신 탓이라며 어머니가 땅을 치기 시작했지. 그 소리 듣는 게 너무 가슴 아
파 견딜 수 없어서 나는 혼자 층층폭포로 달려갔어. 층층폭포를 올려다보고 탕을 내려다보
고 하며 며칠을 지냈다. 더는 선녀가 내려오지도 않고 두레박도 내려오지 않는 그곳에서 그
냥 그대로 죽어버리자며 며칠을 보냈다. 그때는 너를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지. 하늘 문이 이미 닫힌 걸 아는데 너한테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며 매달리겠어. 그동안 날 위해 해준 것만도 이만저만 고마운 게 아닌데 뭘 더 바라. 그냥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싶었다.
뭐라고? 아, 그랬구나. 그때 하늘 문이 정말 단단히 닫혔구나. 하늘 문이 닫히고 말자, 사람과 산짐승 사이의 말도 끊겼구나. 그동안 어느 정도는 말이 오갈 수 있었는데 이제 아예 통하지 않는구나.
--- p.233~234
아, 철이 바뀌고 돋아난 새 잎의 연록빛도 이제 제법 짙어졌습니다. 머잖아 흰 꽃도 피겠군요. 옛일 하나가 떠오릅니다. 당신은 곰방대를 부싯돌까지 함께 멀쩡히 잘 챙겨가서는 정작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하고 왔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던 때 말입니다. 논으로 밭으로 일하러 갔다가 돌아와서는 말입니다. 이제야 당신이 곰방대 물고 한숨 돌릴 정도 짬을 드렸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당신에게 내가 각시임을 다 말하였습니다.
우렁이였던 나는 새가 되어 당신에게 왔습니다. 각시였던 나는 감사에게 매인 몸이라 당신
에게 오지 못합니다. 그래도 나는 당신의 각시, 당신의 우렁각시입니다.
--- p.276~277
그 순간, 막내딸이 진짜 각시로 인정받는 그 순간.
다 사라져.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고 뭐고 다 한꺼번에 사라지고 없어. 어디 산비탈 아담한 초가에 두 사람만이 마주 앉았을 뿐 새 각시도 없고 새 각시를 응원하던 식구들도 없고 그래. 그동안 놀랄 일이 어디 한두 가지였겠느냐만 이것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놀랄 일 아니겠느냐. 그래도 막내딸은 가만 앉아 있었어. 신랑이 낡은 망건을 벗네. 그리고 그걸 바닥에 내려놓는데 보니 구렁이 허물이야. 이어 신랑은 장자네 막내딸이 가져온 호랑이 눈썹으로 짠 새 망건으로 머리를 단정하게 해. 막내딸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그냥, 그때야 그냥 제 신랑 품에 안겼지.
그날 밤 막내딸은 꿈을 꿔. 자기가 딴 세상에서 만났던 바로 그 계집아이가 된 꿈이었어. 왜 그 새 쫓던 계집아이 말이다. 그 계집아이가 새를 쫓는데 보니 나락이 누렇게 잘 익었어. 끝도 없이 펼쳐진 논이 다 풍년이야. 나락이 잘 익어야 새를 쫓아도 쫓을 기분이 나겠다 싶어.
동네 한복판의 기와집에서 구렁덩덩 낭군님을 사위로 삼으려 했던 것은 낭군님의 신령한 능
력을 알아봤던 것이지 싶어.
그러다 막내딸은 마을에 와 있는 자신을 깨달았어.
--- p.320~321
지금까지 살펴봤듯‘다시 만나는 옛이야기’시리즈의 1권 『해가 되어라 달이 되어라』에는 신화적 옛이야기들만을 모았습니다. 태곳적 사람들의 사유와 세계상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또 그것들을 우리가 사는 세상의 거울과 등불로 사용해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탐색하기 위해서입니다.
태곳적 세상의 일을 담아낸 이야기들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야기로 변해 왔다는 것, 그러니까 신화의 민담화를 이제 잘 이해했으리라 믿습니다. ‘다시 만나는 옛이야기’에서 그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의 모습을 유지한 채 집단무의식의 원형이 녹아든 것이라 할 상징적 장치 같은 것이 살아나며, 원래의 신화적 이야기로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지요. 대부분 이야기가 생각보다 오래전에 생겨나 세월 속에 차차 신성성을 잃고 흥미나 일상사의 진실을 전하는 이야기로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과 상당히 먼 곳에서 전해져 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군요.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들의 진짜 기원은 인간 공통의 집단무의식이라고 봅니다. 오래되었고 또 멀리서 오기도 한 이야기가 아직도 호소력을 갖는다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강력한 증거이겠지요. 교류가 없는 두 지역에서 거의 똑같은 이야기가 생겨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증거가 아닐까요?
다 지나간 시대의 다 낡아빠진 듯한 이야기를 다시 하는 이 작업이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우선 우리 자신의 재발견이어서가 아닐까 합니다.
--- p.350~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