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부터 후려쳐대는 찬바람은 창 옆 포플러 나무를 못살게 굴며 낙엽을 흩뿌린다. 갑자기 춥다. 아침에 창을 열고 내려다보니 거리의 한 사람 한 사람 외투를 뒤집어쓰고 웅크린 채 종종 걸음을 걷고 있다. 겨울이 가까웠나 보다. (1952.11.18.화 일기에서) --- p.20
6.25 동란 이후, 이 곳 부산이란 곳은 그 전의 부산과는 말도 못할 정도로 변하였고, 지금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요사이는 더욱이나 비가 오지 않은 고로 거리거리마다 먼지요, 그 먼지처럼 사람 또한 들끓고 있다. 바람에 날린 먼지가 눈을 감게 하고, 앞에서 툭 부딪쳐 눈을 번뜩 떠 보면 이마와 이마가 서로 맞닿고, 뒤에서 차가 경적을 울리는가 하면, 옆에서는 지게꾼의 “짐이요.” 고함소리, 두부장수 요령소리, 실로 이와 같이 뒤엉켜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할 정도로 사람이 포화상태이다. (1953.5.4.월 일기에서) --- p.100
시공을 초월한 어떤 절대적 존재가 있어서 우리들을 관찰한다면 얼마나 미미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일까. 무궁한 시간 중에 아주 잠시 나타나서, 언제까지 계속될지도 모르는 일순간을 살아가는 게 우리의 생(生)이 아닐까? 그리 생각하면 하루살이의 삶과 무엇이 다를까? 그러니 굳이 고난에 싸여 괴로워하며 살게 무어 있나 싶다. (1953.5.13.수 일기에서) --- p.108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신문을 읽고 있었는데, ‘허물어져가는 첨성대’란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내용은 이랬다. 첨성대 바로 옆으로 차도가 있는데, 거기로 수많은 차들, 특히 전차들이 날쌔게 달려 지면이 동요하여서, 첨성대 중상부에 균열이 생겼단다. 그래서 허 문교부장관은 이 실정을 조사하여 사태를 파악하라 하였단다. (1953.6.11.목 일기에서) --- p.124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들 들에서 분주한데, 짙어진 녹음만이 사립을 지키며 한가한 뜰에는 해당화가 가득 피어 있겠지. 우리 집 뜰에는 내가 가꾼 해당화가 하마 활짝 피어 맑은 향기를 뿜으며 나를 기다리겠지. 그립다! 향내 나는 해당화 곁이. 우리 집 뜰을 생각하니 오늘은 유난히도 내 고향 풍경이 그립다. (1953.6.12.금 일기에서) --- p.125
동으로 닿아 있는 끝없는 수평선은 이 복잡한 현실을 바다 저 너머로 몰아 사라지듯 마음 또한 시원하다. 흰 물새들이 자유로이 마음대로 날고 있는 모습 또한, 정말로 보기 좋다. 그 모습을 보노라면, 나 또한 이 하잘 것 없는 지간지상을 떠나, 저 물새 무리에 섞여 넓디넓은 바다 위를 날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오른다. (1953.7.11.토 일기에서) --- p.144
남쪽 바다로부터 시골의 순박한 큰 애기 같은 바람이 솔솔 불어와 막힌 가슴이 다소 뚫리는 느낌이다. 오늘 저녁에는 유난히도 뭉게뭉게 이는 구름이 찬 달(보름달)을 덮고 또 덮으며 지나간다. 그럴 때마다 바다는 은빛으로 변하여 미인의 치마폭인양 주름 잡혀 굼실거린다. (1953.7.23.목 일기에서) --- p.151
아침 일찍 일어났다. 아직 채 밝지도 않았다. 정신을 수습하여 수건을 가지고 올해 처음으로 두개방천으로 목욕을 하러 나갔다. 하얀 안개가 나직한 초가지붕을 포근하게 껴안고, 살금살금 앞으로 나아온다. 개울에 닿으니 발밑으론 길게 흐르는 물결이 거울처럼 맑으며, 얕은 여울에서는 자갈 구르는 맑은 소리가 무거운 아침공기를 뚫고 피어오른다. (1953.7.29.수 일기에서) --- p.158
이성들이 옆에 서 있으니 호기심도 생기고, 자연스럽게 자꾸 쳐다보게 되었다. 그런데 별스럽진 않았다. 모두들 뚱보 아니면 호박뿐이었다. 그 중 몇 줄 앞에 중대장이라고 완장을 찬 학생이 있었는데, “그 중 좀 낫다!”며 친구들과 같이 농을 하기도 했다. (1953.10.6.화 일기에서) --- p.210
냉수욕이나 할 마음으로 근방 개천으로 갔다. 이따금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새로 핀 들국화만이 인사를 하듯 바람에 간들거린다. 보아주는 사람이 있건 없건 철을 찾아 어김없이 꽃을 피우고, 향기를 뿌리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개천가에 한참 있자니 손이 시리고 소름이 돋았다. 집으로 돌아오려 발길을 돌리는데 아침 일 나가는 일꾼들과 마주쳤다. (1953.10.11.일 일기에서) --- p.213
집집마다 문에 불이 밝아있고, 밤공기는 무겁게 가라 앉아 있었다. 초엿새 달은 벌써 지고 암회색 밤빛만이 구석구석 들어 박혔고, 이따금 찬바람이 불었다. 되돌아 은행나무 밑까지 닿았다. 미래는 암담하고 과거는 명랑한 동시에 행복했었다. (1954.1.10.일 일기에서) --- p.275
3월에 눈이 내린다. 푸근한 기운이 감돌며 톱밥 같은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 한다. 검둥다리 위에는 인적이 드물다. 모두들 걸어뒀던 겨울옷을 도로 주워 입고 벌렁거린다. 냉방 이불위에 홀로 뒹굴며 가만 생각하니, 참 쓸쓸하여라. (1954.3.7.일 일기에서) --- p.312
달 밝은 저녁이다. 저 달을 기쁘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별스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다만 향수에 젖은 내 마음을 더욱 외롭게 만들 뿐이다. 밖에서는 가늘고 굵은 음성들이 저 달빛에 섞여 어디론지 들 흘러간다. 어느덧 잠잠해졌다. (1954.3.13.토 일기에서) --- p.316
기다리던 비가 온다. 봄비는 바실바실 알맞게도 내린다. 마음이 여유롭다. 벚나무 가지는 볼통하니 봉오리가 생겼고, 대신동 수원지에는 이름 모를 풍만한 백화가 만발해 봄빛을 물들이고, 작은 새들은 제 멋에 겨워 지저귄다. (1954.3.28.일 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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