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어느 동네에 가면 로또 복권을 파는 곳이 유난히 많다고 그가 말했다. 그런데 그런 가게마다 손으로 휘갈겨 쓴 하나의 똑같은 문장이 붙어 있단다. 거기에 쓰인 글은 이렇다. ‘로또밖에 길이 없다!’ 그 문장은 그에게 굉장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게 진실이어서 충격적이었던 거야.” 며칠 전에 뮤지컬을 보다가 나는 울었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스토리와 좋아하는 음악과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작품이었는데, 작년에 처음 보았을 때는 울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눈물이 났다. 꿈을 찾아 떠났다가 결국 그것이 모두 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노인의 이야기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노인은 기억나지 않는 꿈을 더듬으며, 제발 기억해보라는 누군가의 말에 이렇게 묻는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요?” 꿈은 깨어지고 주위 사람들에게는 아픔과 피해를 주고, 자신은 죽음을 맞는다. 꿈이란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나를 울린 건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일 년 전에 비해 지금 더 그것을 절절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리라. 꿈도 무섭고 진실도 무섭다. 피었다 시드는 꽃보다 무섭다. 그리하여 우리는 삶의 갈피를 이토록 쉽게 잃어버린다.
---「그것이 진실이어서」중에서
누군가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진실이라 할 수는 없다. 그건 법정에서 하는 증언과 흡사하다. 똑같은 사실을 가지고 변호사와 검사는 각각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몰고 간다. 그건 카페 한쪽에 틀어놓은 오래된 흑백영화와 같다. 가끔 자막을 읽어보지만 전체 스토리를 모르면 무의미한 음절의 나열일 뿐이다. 누군가 내가 한 이야기를 악용하여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 누군가가 한 어떤 이야기가 나에게 나쁘게 전해질 수도 있다. 그것은 사실이겠으나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 어느 누구의 진실도 하루아침에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진실도 계속하여 변화하는 거지만, 최소한 사실에 눈이 멀어 휘둘리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진실을 보고 있는가. 볼 수 있는가. 보려 하는가. 보고 싶은가.
---「사실」중에서
…그러나 ‘이 순간’이 무엇을 위한 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지?
손을 내밀 때인지
마음을 전할 때인지
기다릴 때인지
물러설 때인지
미워할 때인지
감사할 때인지
떠날 때인지
새로 시작할 때인지
아니면 마음을 접을 때인지…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중에서
2권
힘내자, 말고 힘들지, 라고
잘해라, 말고 잘하자, 라고
안됐다, 말고 어떡해, 라고
잘됐다, 말고 잘했다, 라고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하다고
곁에 있어줘서 손을 잡아줘서 고맙다고
오백서른일곱 가지 이유로 좋아한다고
어제처럼 오늘도, 오늘처럼 내일도, 난 너의 편이라고.
---「소원이라면」중에서
감정에 솔직해지는 일.
어렵고 부끄럽고 가끔 무의미해지고 때로 후회하게 되는 일.
그래도 누군가 내게 그래줬으면 하는.
그래도 그럴 수 있는 누군가가 가까이 있어주었으면 하는.
어렵고 부끄럽고 가끔 무의미하고 때로 후회하더라도.
---「때로 후회하더라도」중에서
오랜만에 약속도 없이, 급히 해야 할 일도 없이, 미열이나 통증도 없이, 뒤척이거나 쓸쓸하거나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마음도 없이, 마음을 묶어두고 기다리는 것도 없이, 어디론가 가려 하는 의지도 없이, 아마도 무척 오랜만에, 어떤 온기에 담겨, 나의 중심으로부터 무언가 다시 차오르는 것들을 느꼈다. 피고 또 지는 것이 모처럼 두렵지 않아졌다.
---「오랜만에」중에서
읽고 있던 책에서 접어둔 부분을 펼쳐 굳이 그곳에 사인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글을 보며 상상했던 나와 실제로 만난 내가 다르지 않아 기뻤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거의 처음이었다. 호기심과 총기가 어린 눈매, 의지가 강한 입매, 타인의 이야기를 향해 기울이는 귀, 무엇이 될까가 아니라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스물여섯이 아름다웠다. 홀로 쓴 글들이 어떤 아름다운 존재에게 가 닿는다는 실감이 놀라웠다.
---「스물여섯」중에서
물을 잡으라는 말이 무슨 은유 같은 건 줄 알았다. 문고리도 아니고, 형태가 없는 것을 잡으라니, 그게 내 손에 잡힌다면 이미 물이 아니잖아, 했다. 손가락을 붙이고, 손바닥을 오므리고, 쭉 뻗은 팔을 배 쪽으로 당기며 팔꿈치를 꺾었다가 힘차게 뻗을 때, 손바닥과 팔의 안쪽에 묵직하게 전해져 오는 물의 근육을 느끼고 약간 감격했다. 물을 잡았다고 하여 그것이 내 손안에 남아 있는 건 아니지만, 잠깐 잡혔다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이지만, 그 힘으로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 왠지 위로가 되었다.
---「물의 근육」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