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겉모습이 과거에 철학을 했던 사람들과 딴판이라고 해서 낙담할 필요는 전혀 없다. 몽테뉴가 새롭게 그린 제대로 된 반이성적인 인간의 초상에서는 그리스어가 아닌 언어로 말하고, 방귀를 뀌고, 식후에 마음을 바꾸고, 책을 보면 지루해하고, 발기가 안 되고, 고대 철학자를 한 명도 몰라도 상관없다.
평범하고 덕이 있는 삶, 지혜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절대 현명하다고 할 수 없는 삶도 버젓한 성취인 것이다. 몽테뉴는 지금도 우리가 그의 장단에 맞추어 지식인과 이런저런 허식을 비웃을 수 있는 위대하고 이해하기 쉬운 지식인으로 남아 있다. 세속을 떠나 상아탑에 은둔한, 속물적인 16세기 학계에서 몽테뉴는 한 줄기 신선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학문은 애석하게도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몽테뉴는 이른바 영리한 사람들의 현학과 거만에 매일 압박감을 느끼는 우리 모두에게 영감과 위안을 준다.
--- p. 94~95
아이러니하게도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결핍 때문이 아니라 풍요 때문에, 즉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기 때문에 위기를 맞는다고 지적했다. 우리의 공장과 제도는 대단히 능률적이어서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자동차와 주택을 제공하고 좋은 학교와 병원을 이용하게 할 수 있다. 또한 일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해 방시키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이는 부조리하며, 일종의 병적인 마조히즘에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1700년에는 거의 모든 성인이 노동을 해야 국가가 먹고살았다. 하지만 요즘 선진국에서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거의 필요하지 않다. 차를 만들 때에도 사실상 인력이 불필요하다. 현재 실업률은 살인적이어서 다들 끔찍한 병으로 간주한 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보기에 이는 성공의 징표로, 우리의 생산력이 거짓말처럼 좋아진 결과다. 수백 명이 해야 할 일을 지금은 기계 한 대로 끝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긍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기보다 실업을 저주이자 실패로 간주한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볼 때 경제의 목표는 우리를 점점 더 많이 실업자로 만드는 것이며, 이 사실은 실패가 아니라 발전의 징표로 찬양해야 한다.
--- p.212
“모든 것을 비워라. 마음을 고요하게 하라.”
우리가 너무 바쁘고, 불안이나 야망에 너무 사로잡혀 있을 때, 인간이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는 수많은 순간을 놓치게 된다. 우리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잔물결, 다른 사람들이 웃을 때 짓는 표정, 바람 이 머리카락을 날릴 때의 느낌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경험을 할 때 우리의 흩어졌던 자아는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노자의 글에는 또 다른 요점이 있다. 자신의 본모습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고자 노심초사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그러기보다는 자신의 본모습을 지키는 데 힘써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잊고 있었던 관대한 충동이나 쾌활한 면을 다시 발견할지 모른다. 우리의 에고, 의식적 자아는 우리의 본모습을 자주 방해한다. 우리는 비판적이고 너무 거창한 자아상에 집중하기보다는 바깥 세계에 마음을 열어 본래의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 p.284
프로이트는 동료 의사들을 대단히 시기했다. 한번은 칼 융Carl Jung이 강연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실신하기도 했고, 거의 모든 제자에게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의 책은 펼쳐보지도 말라고 지시했다. 그는 자신이 61세와 62세 사이에 죽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 숫자들에 심한 공포증을 갖고 있었다. 아테네에 머물던 중 그의 호텔방 호수가 62의 절반인 31이라는 걸 알고는 공황 증세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사랑하는 시가로 마음을 달랬지만, 시가가 어릴 적 자위 습관의 대용물이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마저도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했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슬픔과 불안은 사실 그가 쌓은 가장 큰 업적 ? 인간 마음의 이상한 불행을 깊이 조사한 것 ? 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의 책들은 우리 마음의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부분이 결코 그 자신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 대신에 우리는 경쟁하는 힘들의 지배를 받는데, 그중 많은 힘이 의식의 인지 너머에 있다. 그의 이론 중에 정말 이상하고 당혹스럽고 웃음이 나오는 것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운지를 훌륭하게 밝혀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p.403
기독교의 위대한 통찰, 특히 기독교 신학에서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있는 궁극적인 통찰 하나는 모든 사람의 내면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딱히 특별하지 않은 사람도 똑같이 중요하다. 영적인 관점에서는 견습 재단사의 생각과 감정이 장군이나 황제의 생각과 감정만큼 중요하다. 페르메이르는 바로 그런 시선으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그렸다. 바깥세상의 눈으로 볼 때 이 인물은 유명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 소녀는 부자도 아니다. 소녀에게는 진주 귀고리가 비싸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겠지만 유행을 좇는 세상의 기준에서는 볼품없는 싸구려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소녀에게 정의가 필요한가? 아니다. 소녀는 세상에 짓밟히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더 좋은 표현이 있을지 모르지만) 평범하다.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다른 모든 사람 과 마찬가지로 이 인물은 한 인간으로서 전혀 평범하지 않다. 그가 그 자신인 것은 유일무이하고 신비롭고 심오한 사건이다.
--- p.471~472
프루스트가 생각하기에, 위대한 예술가는 우리에게 신선하고 깊이 있고 생생한 방식으로 세계를 보여주므로 갈채를 받아 마땅하다. 그 에 따르면, 예술의 반대는 ‘습관’이다. 우리가 삶의 많은 부분을 망치게 되는 원인은 삶의 그 모든 중요한 것과 우리 사이에 드리운 익숙함이라는 이름의 장막에 있다. 습관은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하고, 석양의 아름다움부터 우리가 하는 노동과 사귀는 친구에 이르는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아이들은 습관에 갇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물웅덩이, 침대 위에서 뛰기, 모래, 갓 구운 빵 등 단순하지만 아주 중요한 것들에 흥분한다. 반면에 어른들은 부득불 나쁜 습관을 기른다. 그래서 명성이나 사랑 같은 점점 센 자극을 찾는 것이다.
이에 프루스트가 떠올린 묘책은 어린아이처럼 사물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되찾는 것, 습관의 베일을 떨구는 것, 그럼으로써 전보다 감사 하는 새롭고 예민한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 p. 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