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1954년 9월 21일 도쿄도東京都에서 마이니치신문 기자 아베 신타로와 기시 노부스케의 외동딸 요코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야마구치현 오츠군 헤키촌山口? 大津郡 日置村으로, 지금의 야마구치현 나가토시長門市이다. 야마구치현 서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인 나가
토시는 후카가와深川 만을 벗어나면 가까이 대마도가 있으며 부산항까지 동해 바다가 펼쳐지는 곳이다.
아베 신조는 도쿄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본적지인 야마구치현에 지역구를 두고 있고, 정한론을 주장한 야마구치현 출신의 요시다 쇼인을 존경한다는 말을 수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아베 신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베 집안의 터전인 야마구치현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야마구치현은 원래 지명이 조슈번이었으나,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인한 폐번閉藩 조치로 1871년 야마구치현으로 된다.
메이지유신은 막부체제를 해체하면서 번 단위의 지방 분권적인 봉건체제를 폐지하고, 한층 강력한 구심점인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여 서구국가들과 대등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정치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김희영, 2006).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은 근대적 통일국가가 형성되어 정치적으로는 천황을 구심점으로 하는 입헌정치가 시작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시행되었으며, 사회·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천황제적 절대주의를 국가 구조의 전분야에 실현시키게 되었다.
메이지유신을 이룩한 일본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 강압적이고 침략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894년의 청일전쟁, 1904년의 러일전쟁 등이 그 대표적 예이며, 그다음 단계로 무력으로 조선을 강제적으로 합방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을 유발하였고, 1941년에는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독일과 이탈리아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1945년 히로시마?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사상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라는 비극을 자초하였다(두산백과).
조슈번은 현재의 가고시마현鹿?島?인 사쓰마번薩摩藩과 1866년 정치군사동맹인 삿초동맹薩長同盟을 맺어, 에도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을 이룩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번藩이다. 이렇듯 아베 집안의 고향인 야마구치현은 일본의 근대화를 이룩한 계기가 되는 메이지유신에는 절대적인 공헌을 했지만, 한국 입장에서 볼때 이토 히로부미,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 한일합방의 핵심적 인물들을 배출하며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고 생각된다.
아이가 태어나서 성격이 어떻게 형성될지는 아이 자신이 가지고 태어나는 기질temperament과 태어난 뒤 주변 환경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쉬운 기질easy temperament을 타고난 아이들은 환경에 적응을 잘하기 때문에 낮과 밤을 잘 가리고, 수유나 이유에 쉽게 적응하고, 낯가림 등도 심하지 않아 부모가 양육하면서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된다. 반면에 힘든 기질difficult temperament을 타고난 아이들은 수면 양상도 일정하지 않고, 수유나 이유에 어려움이 따르고, 익숙한 사람이나 익숙한 장소가 아니면 쉽게 민감하게 반응해 아이 자신도 스트레스를 받지만 양육하는 부모도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아이가 아무리 힘든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더라도 주변 환경이 아이에게 좋으면 아이는 정서적으로 별다른 문제없이 성장할 수 있고, 아무리 쉬운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더라도 주변 환경이 아이에게 적절하지 않으면 아이의 성격이 제대로 형성되어 가기 힘든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아이 엄마가 임신 때부터 아이를 갖게 된 것에 회의적인 마음을 가지거나, 자신을 포함해 주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할 때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러한 생각으로 인해 임산부의 정서가 불안정해진다. 임산부의 불안정한 정서상태는 태아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태생적으로 불안정한 정서를 지닌 아이가 태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장경준, 2017). 아이가 자라면서 성격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아이가 가지고 태어나는 기질도 중요하지만, 태어날 때의 환경적 분위기 또한 중요하다.
아베 신조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요코가 아베 신조를 임신하고, 아베 신조가 태어날 시기에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정치권력의 마지막 단계인 총리에 오르기 위해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국무대신 겸 군수차관을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용의자로 1945년 12월 스가모구치소에 수
감되었지만, 1948년 12월 불기소처분을 받고 석방된다. 기시 노부스케는 석방 이후 공직추방을 당하지만, 1952년 4월 공직추방이 해제되고, 1954년 11월 민주당을 결성해 1955년 2월 제27회 총선에서는 자유당을 압도한다.
1955년 11월에는 자유당과 보수대연합을 시도해 자민당(자유민주당)을 창당하고 초대 간사장이 된다. 그리고 1956년 12월에는 이시바시단잔 내각의 외무대신, 1957년 2월에는 56대 총리로 순식간에 일본 정치계의 정점에 올랐다. 아베 신조가 세 살이 되기 전 일이다.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숨 가쁘게 돌아가는 정치 일정과 더불어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1956년 12월 마이니치신문 정치부 기자에서 장인인
기시 노부스케 외무대신의 비서관이 된다.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가 되자 아베 신타로는 자동적으로 총리 비서관이 된다.
아베 신타로는 1958년 5월 실시된 제28회 총선에 장인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마해 중의원의원으로 첫 당선되고, 1960년 11월 제29회 총선에서 재선된다. 요코에게는 하나뿐인 오빠 기시 노부카즈가 있지만, 요코와 달리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물론 아베 신타로가 제28회 총선에 출마하겠다며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비서관을 사직했을 때, 할 수 없이 기시 노부카즈가 일시적으로 그 자리를 맡은 적이 있기는 했다.
요코는 1951년 5월 아베 신타로와 결혼해, 이듬해인 1952년 큰아들 아베 히로노부를 출산하는데, 2년도 되지 않아 둘째 아들 아베 신조를 임신하게 된다. 요코는 이런 상황에서 정치에 관심 없는 오빠 기시 노부카즈의 도움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혼자서 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의 정
치활동을 도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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