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원래 일본 독자들을 위해 쓴 것이다. 하지만 복잡한 한일관계사를 다각적이고 올바르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아주 자극적이고 참고가 될 만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방 후, 그리고 한일 국교정상화(1965년) 후,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기자 활동을 계속해온 외국인 기자이자 일본인 기자인 나의 ‘역사 인식’을 알 좋은 기회가 되리라. 비판을 포함하여 독자 여러분의 의견을 기대하고자 한다.
─p20, 한국어판 序文 中
‘헤이그 밀사사건’ 뒤 고종 퇴위 등 일본의 한국 몰아붙이기는 더 가혹해졌다. 그것이 2년 후에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불러일으켰다(1909년). 합병에 소극적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라는 ‘방어막’이 사라짐으로써 일본은 이듬해인 1910년, 단숨에 한국합병으로 치달았다. 그렇다면 ‘헤이그 밀사사건’이라는 것은 고종을 위시한 한국 측의 계산과는 거꾸로 가버려, 결과적으로 한일합병을 앞당겼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p41, 1장 망국(亡國)의 미스터리 中
영토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일본 국회의원인 신도 요시타카(新藤義孝),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사토 마사히사(佐藤正久) 씨가 독도박물관 등이 있는 울릉도를 현지 시찰하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그런데 한국정부에 의해 김포공항에서 입국 거부되어 그냥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야했던 것이다. 독도를 두고는 어떤 종류의 종교화한 열병적인 반일, 애국 여론을 염려한 한국정부의 과잉 반응이었다. 일본 여당 국회의원의 입국조차 거부하는 것인지라 정상이 아니다. 보통이라면 “부디 현지로 달려가서 우리의 주장을 알아주세요”하고 환영하는 것이 상식이리라.
그 같은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것이 한국에서의 독도 문제이다. …이것은 ‘반일 무죄’ ‘애국 무죄’라는 말과도 통한다. “반일과 애국을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하건 용납된다”고 하는 한국 사회에서,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는 대일 편협(偏狹) 혹은 대일 장벽(障壁)이다. 거기서는 국제적인 상식이나 법치주의는 통용되지 않는다.
─p83, 3장 멀리서 독도를 바라보다 中
이우 전하가 히로시마에서 원폭에 조우하여 타계했을 때, 수행 부관이었던 요시나리 히로시(吉成弘) 중령이 책임감으로 자결했다. …요시나리 중령은 원폭 투하 직후로부터 지옥도(地獄圖)나 마찬가지인 히로시마 시내에서 행방불명된 전하를 찾아 돌아다녔다. 저녁 무렵, 찾지 못한 채 녹초가 되어 사령부로 돌아오자 수용되어 있던 니노시마로부터 연락이 와 달려갔다. 하지만 전하는 응급처치의 보람도 없이 7일 새벽에 이 세상을 떠났다. 요시나리 중령은 7일 밤 쓰야를 마치고, 이튿날인 8일 아침 출관(出棺)한 뒤 전하가 숨을 거둔 육군검역소 임시 구호소의 민가(民家)에서 자결했다. 오른손의 군도(軍刀)로 배를 찌르고, 왼손의 권총으로 머리를 쏜 상태였다.
─p135~136, 5장 일본은 한국에 예(禮)를 다했는가? 中
장례 행렬이 돈화문을 나선 직후였다. 연도의 인파 속에서 갑자기 한 명의 노파가 나타나, 아스팔트 도로 위에 무릎을 꿇고 대여를 향해 이마를 바닥에 대고 절을 하는 ‘예(禮)’를 되풀이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우리 왕비’에게 이별의 예를 바쳤던 것이다. 이 같은 풍경에는 나도 몰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장례 행렬을 바라보는 내 눈이 한동안 흐릿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기분을 해석하자면, 결과적으로는 500년이나 이어진 왕조를 붕괴시킨 한스러운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인 왕비를 ‘우리 왕비’로서 예를 다하여 따뜻하게 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일본인으로서의 소박한 감격과 감상(感傷)이지 않았을까. …다시 말해 방자 비에게는 “한일 간의 가혹한 역사를 짊어지시고, 일본인으로서 이토록 애를 쓰셔서 너무 고마웠습니다”고 인사하고 싶었다. 또 연도의 한국인들에게는 “망국의 한을 넘어 이국(異國)의 왕비를 이토록 따뜻하게 전송해주셔서 감사합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p158~159, 6장 이조잔영(李朝殘影) 中
저명작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은 1950년대 이후 일본 독서 세계에서는 여태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회파 추리소설로서 크게 주목받았다. 압도적인 인기를 얻은 그는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작품은 지금도 계속 읽히고 있으며, 팬이 숱하다. …한편으로는 사회파 추리작가답게 전후의 일본 사회를 뒤흔든 여러 사회적, 정치적 사건을 소재로, 그 ‘수수께끼 풀기’에 매달린 작품도 적지 않다. 대표작이 논픽션 작품집 '일본의 검은 안개'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이 ‘모략 6·25전쟁’이다. 6·25전쟁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의 모략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이 마쓰모토 세이초의 ‘수수께끼 풀기’였다. …그 배경에는 분명히 북한 환상이 있다. ‘모략 6·25전쟁’에서는 전후의 한반도 정세가 시종 북한 칭찬 일변도이며, 한국과 미국은 ‘악’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자료의 문제가 아니다. 작가의 이데올로기 문제다. 왜냐하면 마쓰모토 세이초는 전후의 국제정세에 관해 ‘모략’은 오로지 미국과 한국(즉 제국주의) 측에만 있고, 북한이나 소련(공산 세력) 측에는 있을 리 없다는 식으로 써내려간다. …‘암흑의 남한과 발전하는 북한’, 이것은 전후 일본 사회(특히 그 지식 세계)를 오래토록 지배한 북한 환상의 전형이다.
─p315~318, 11장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中
…자유주의 세계로부터 공산권으로의 대량 탈출이라는 ‘북한 귀환’은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으로의 대량 귀환이 역사적이고 획기적인 일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당시 우리 기자 동료 중에서는 조총련계 한국인의 조국 귀환을 ‘아시아판 영광의 탈출’이라고 영웅적으로 미화하는 목소리조차 나왔다. …일단 중단되었던 귀환운동이 재개될 무렵에는, 이미 귀환자가 실제로는 ‘낙원’이 아니라 ‘지옥’의 고통을 맛보고 있다는 정보가 일본으로도 전해졌다. …하지만 그 ‘진상’은 우리 일본 미디어에서는 일시적인 악의의 역(逆) 선전정보로 취급하여 다루지 않았다. 이런 ‘태만’이 1971년의 귀환 재개에 있어서도 ‘인도의 배’가 되어 비극을 되풀이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환상에서 오는 ‘북한 미화(美化)’라는 동전의 양면으로서, 한국에 대한 편견에 가까운 부정적인 시각도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들 젊은 기자들이랄까, 그 한 사람이었던 나를 사로잡았던 ‘조선’과 얽힌 심정의 배경에는 과거 역사로서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와 통치에 대한 속죄의식과, 소련의 대두와 공산 중국의 탄생이라는 전후 정치상황을 배경으로, 사회주의 환상에서 오는 혁명적 로맨티시즘과 같은 것이 있었으리라 여긴다. …이렇게 해서 ‘밝은 북, 어두운 남’이라는 도식(圖式)이 일본 미디어를 지배한다. 그런 도식이 무너지는 것은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이 확인된 1970년대 후반이며, 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1988년의 서울올림픽 개최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p337~340, 12장 ‘在日 한국인 조국 귀환’의 비극 中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