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천천히, 첫눈 밟듯 가 줘요!” 조선에서 데려온 이 고운 아내를 위해서라면, 빅토르 콜랭은 자신의 생애 전체를 느리디느린 걸음 하나에 담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야기 속도를 늦추면서 아내 리심이 잠들 때까지, 아내의 아미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쓸면서 이야기를 잇고 또 이었다.--- p.10
“단지 법국 외교관의 아내가 되어 법국인으로 살아가겠다면 널 보낼 까닭이 없느니라. 공사와 네 사랑을 내가 도울 이유는 더더욱 없지. 리심아! 너라면 내 뜻을 헤아릴 것이라고 믿는다. 몇 해 전 홍종우도 법국으로 떠났지만 감감무소식이로구나. 구라파인들은 속속 조선으로 들어와서 조선의 모든 것을 먹고 보고 익히는데, 우리는 저들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네가 구라파로 뻗은 내 눈과 귀가 되어 주지 않으련?”
조선 말, 프랑스 외교관과 사랑에 빠졌던 조선의 궁중 무희 ‘리심’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이다. 관기에서 의녀로, 의녀에서 다시 궁중 무희로 변모하는 리심은 한때 고종과 동침하는 사이였지만 프랑스 외교관과 결혼하여 궁을 떠나게 된다. 이후, 일본과 프랑스를 오가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그녀는 프랑스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을 안고 다시 조선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궁중 무희였던 그녀는 조선에서 이전의 자유로운 신분을 누리지 못하고 다시 궁으로 잡혀 들어간다. 강제로 참석하여 춤을 추게 된 연회에서 리심은 혼신을 다해 마지막 춤을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