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에 내리는 순간부터 깨닫지 않았느냐? 조선에서 너와 같은 복색을 하고 너와 같은 걸음을 걷는, 너처럼 법국 말과 문화에 능통한 여인은 너 하나뿐이니라. 법국에 있든 조선에 있든 너는 혼자란 걸 명심해야 한다. 외로우냐? 설마 사랑을 믿었던 건 아니겠지? 사랑 안에서 널 속이며 여인의 행복 따윌 빌었던 건 아니겠지? 외로움은 너처럼 특별한 여인에게 내린 하늘의 축복이니라. 나 역시 축복 속에서 살다가 축복 속에서 죽었느니라. --- p.16
리심, 너는 벌써 새로 나아감[進]을 시작하였다. 마락가까지 가는 길도 너 혼자였듯이 그곳에서부터 돌아오는 걸음걸음도 네가 최초인 것이다. 솔직하게 네 자신에게 물어보아라. 너도 이걸 기대하지 않았느냐? 이것만이 리심의 삶이라고 여기지 않았더냐? 법국에 첫발을 딛던 순간을 떠올려 보아라. 네 그 ‘처음’들을 한 순간도 잊지 마라. --- p.18
흐트러진 초점이 겨우 하나로 모였다. 그녀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빅토르 콜랭의 뺨을 만졌다. 빅토르 콜랭이 그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리심의 입술이 떨리며 열렸다. 말을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빅토르 콜랭이 급히 귀를 갖다 댔다. 한 생(生)의 완성과 소멸을 잇는 마지막 호흡이 흘러나왔다. “……첫눈 밟듯 천천히 들려줘요…… 빅토르…… 천년만년 흘러도 결코 잊지 못할 하루를!”
조선 말, 프랑스 외교관과 사랑에 빠졌던 조선의 궁중 무희 ‘리심’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이다. 관기에서 의녀로, 의녀에서 다시 궁중 무희로 변모하는 리심은 한때 고종과 동침하는 사이였지만 프랑스 외교관과 결혼하여 궁을 떠나게 된다. 이후, 일본과 프랑스를 오가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그녀는 프랑스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을 안고 다시 조선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궁중 무희였던 그녀는 조선에서 이전의 자유로운 신분을 누리지 못하고 다시 궁으로 잡혀 들어간다. 강제로 참석하여 춤을 추게 된 연회에서 리심은 혼신을 다해 마지막 춤을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