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올 때는 천천히 들어왔지만 문을 닫자마자 우리는 서둘렀습니다. 이번에는 차례대로 욕실로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면서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키스에 들어갔습니다. 이별의 위기 앞에서 돌아온 우리는 서로가 애틋했고 안타까웠습니다. 키스를 하는 동안 당신은 데무 재킷을 벗어서 옆으로 휙 던졌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안았고 손을 둘러 당신의 원피스 지퍼를 내렸습니다.
따져보면 우리 모두 오래 그런 육체적 관계에 굶주렸습니다. 당신은 당신대로, 나는 나대로.
어젯밤의 태풍처럼 우리는 격렬해졌습니다. 당신은 거칠어져서 내 셔츠 단추 하나를 뜯어버렸습니다. 당신의 발톱에 하늘색 페디큐어가 그러데이션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맥주를 마신 탓인지 당신의 얼굴빛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르더니 그 혈색이 목덜미를 지나 쇄골 언저리까지 내리뻗었습니다.
--- p.23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일이 있어 여자가 아이를 낳는 일만큼 거룩하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대숲을 휘젓고 산바람처럼 돌아치는 남자들의 방랑기를 잠재우는 것은 그 꼬물거리는 어린 것입니다. 아이는 작고 연약하지만 쉽게 끊어지지 않는 아니 끊을 수 없는 굵고 단단한 인연의 타래를 엮어주었습니다.
--- p.32
그러나 옥시토신은 이중성을 가진 물질입니다. 이 호르몬은 모성애를 촉발시키면서도 여성의 오르가즘에 작용하는 직접적인 화학물질입니다. 육체적 쾌락의 절정에 이를 때 나오는 호르몬이 아이가 배고파서 울 때도 동시에 분비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요. 물론 유두는 두 가지 경우에 다 융기합니다. 자연은 왜 성적 절정과 모성애를 하나로 묶어놓았을까요?
--- p.36
죽음에 대한 충동을 우리는 반드시 삶에 대한 욕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적 욕망이든 물질적 욕망이든 관계에 대한 갈구이든 그 어느 것이라 하더라도 자기 애착의 진정한 ‘말나식(末那識)’을 찾아가야 합니다.
오온성고(五蘊盛苦)일 수밖에 없는 전오식(前五識)과 온갖 이데올로기가 가득 찬 의식(意識)만이 모든 유식(唯識)이 아닙니다. 생명은 제칠식(第七識), ‘말나식’으로 살아 있는 겁니다.
눈도 귀도 입도 없고 의식이 머물 뇌도 없는 식물조차도 자신을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풀꽃 하나조차 척박한 돌 틈에서도 햇볕을 향한 자기 애착의 광합성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생명은 감각과 의식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애착의 말나식으로 살아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햇빛을 향하면서 자기 애착의 광합성을 해야 합니다.
자살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섹스를 하세요.
--- p.67
한편 계속 본다는 것은 결국 일종의 이미지 창출 작업입니다. 익숙한 대상은 필연적으로 이미지화가 이루어집니다.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은 묘한 일입니다. ‘이미지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세 가지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이미지는 본질을 반영한다. 아니다. 이미지는 본질을 은폐하고 변질시킨다. 아니다. 이미지는 본질과는 관계가 없다. 보는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미지는 대상을 반영합니까, 아니면 대상을 왜곡하나요? 이미지는 보는 사람이 만들어 낸 허상인가요, 아니면 보여주는 사람이 만들어 낸 허상인가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 p.110
그리고 말이에요. ‘사랑’은 단순한 명사나 동사가 아닐 겁니다. 그건 일종의 의성어이며 의태어일지도 몰라요.
소리와 움직임이 없는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가만히 ‘사랑해’라고 말을 해보세요. 그건 의미 없는 기표들의 나열이 아니라 진지하고 따뜻한 소리이며 부드럽고 열정적인 움직임이 분명합니다.
‘사’, ‘랑’, ‘해’, 이것이 어떻게 의성어 의태어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날 당신은 그 말을 온전히 하나의 의성어이며 의태어로 내게 들려주었나 봅니다. 그것이 당신의 빠롤(parole)이었습니다. 당신은 언어의 연금술사였습니다.
--- p.142
그래요,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당신이 나를 원한다, 나를 유혹했다, 내가 당신을 연민한다, 병의 고통을 덜게 하겠다, 당신을 팍팍한 이 세상과 위험한 현실에서 지켜주겠다, 당신에게 찝쩍대는 어떤 껄떡쇠들로부터 지켜주겠다, 당신을 웃게 하겠다, 나에 대한 원망을 갈망으로 바꾸어 놓겠다, 모르핀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것까지 통틀어서 그 어떤 논리도 변명도 다 허위의식이고 기만이었습니다.
나는 단지 당신에게 매료되었을 뿐입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내가 묘하게 뒤집어서 언어유희를 하고 논리 조작을 하고 내러티브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게 우리 운동권 출신들의 오래된 습성이며 스타일이 아니겠습니까? 별로 솔직하지 못한 것,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본능적으로 자기방어를 하고, 자기 의지를 어떤 대의로 포장하려 드는 것 말입니다.
--- p.178
“난 말이야. 우리가 과거의 노예가 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과거를 부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내가 정치적으로 근신하겠다는 건 과거의 노예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인(否認)하겠다는 것도 아니야.”
“오빠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근신을 해? 그러지 마.”
“아니야. 사람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데. 또 바뀌어야 한다면 바뀌기도 해야지.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고 금세 돌아서서 어제의 내 생각은 틀렸다고 나발을 불면서 마치 뭔가 깨달은 것처럼 지랄하는 것도 별로 진정성은 없어 보이더라. 그런 자식들도 있지, 있기야.
하지만 가슴 속에 묻어놓고 가야 할 때가 있고 표현해야 할 때가 따로 있는 거지. 진지한 생각이었던 만큼 적어도 일정한 공백을 가지고 그 정도의 성찰을 해볼 필요도 있다고 봐 나는. 걱정 마. 나도 파멸한 건 아니에요. 한지영 씨.”
--- p.210
“오빠… 그냥 들어 와.”
당신은 웃으면서 손으로 욕조 물을 두드려서 철썩거렸습니다.
“들어 와서… 발라 줘.”
첨벙. 나도 욕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덕분에 순간 물이 넘쳐 흘렸습니다. 당신이 오른발을 내 허벅지에 올렸습니다. 오른쪽 발을 만지자 아프지 않은 쪽이라 감각이 살았는지 간지럼을 탔습니다.
“아이. 간지러워. 호호. 간지러워”
당신이 몸을 흔들어대며 요란을 떨었습니다. 물이 출렁거리며 욕실 바닥으로 넘쳤습니다.
“이 아가씨 왜 이래? 가만 좀 있어 봐.”
“간지러워….”
당신이 앙갚음으로 오른발을 뻗어 내 가슴을 간지럽히러 들었습니다. 내가 경고로 물을 튀겨 당신의 얼굴에 뿌렸습니다. 당신도 지지 않고 손으로 물을 튀겼습니다. 이제 멘소래담은 내려놓고 우리는 여러 번 상대에게 물 튀기기를 했습니다.
그러다 물속으로 당신이 나를 끌어당겼고 나는 당신의 가슴으로 미끄러졌습니다. 따뜻하게 덥혀진 당신의 유두가 눈 앞에서 한층 분홍빛으로 도드라졌습니다. 참을 수 없어 한입 가득 물었습니다. 당신이 손을 뻗어 젖은 내 속옷을 벗겨 바닥으로 던졌습니다.
당신의 왼발을 욕조 턱에 그대로 걸쳐놓고 우리는 물속에서 엉켰습니다. 철퍽철퍽. 철퍼덕거리는 우리 때문에 물이 계속 넘쳐 바닥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 p.224
소비는 욕망입니다. 상품은 당신의 욕망을 건드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혁명이 왜 마케팅에게 졌겠습니까? 혁명가와 운동가가 왜 마케터와 세일즈맨에게 졌겠습니까? 인간의 내밀한 욕망, 무의식에 단단히 뿌리박은 그 욕망을 알고 바라보는 데 소홀했기 때문입니다.
--- p.249
“여보, 그런데 포탈(portal)이 뭐야? 뭘 포탈이라고 하는 거야?”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책을 보던 아내가 이렇게 물어왔습니다.
“응, 사전적으로는 관문, 현관, 입구 이런 뜻인데. 여기서는 좀 더 감각적으로 말해서 당신이 인터넷에 접속했을 때 맨 처음 방문하는 페이지, 바로 그 사이트가 포탈이 되는 거지. 그건 왜?”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인터넷에서 ISP보다 중요한 거야?”
“그래, 난 아주 중요하다고 보는데. 그 첫 번째 페이지로 권력이 이동할 것이라고 생각해.”
“권력이 이동한다고?”
“그냥, 내가 생각하는 하나의 표현인데. ‘포탈로 파워 시프트 될 것이다.’ 그런 사이트를 해보고 싶은 거야. 사실은 내가.”
--- p.286
당신의 침대를 사기 위해 바보같이 할부 처리한 그 카드 대금을 그 후로도 몇 개월 동안 내가 계속 결제를 해야 했던 것을 당신은 알고 있나요? 남자들 사이에서 이런 얘기가 있어요. 의심 가는 애인에게는 뭘 선물할 때 절대 카드 할부는 안 하는 것이 좋다고요. 나는 잊고 싶어도 절대로 잊지 않고 날라 오는 그 카드 할부 내역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유체이탈을 하는 자신을 볼 수도 있을 겁니다.
--- p.338
어느 순간에 보니 철 이른 바닷가 모래사장에 내가 앉아있더군요. 어깨 위에 빗물이 흘러내리고 머리칼은 속까지 젖어갔습니다. 유명한 관광지다 보니 멀리 군데군데 우산을 쓴 연인들이 보였습니다.
비 내리는 어두운 바다를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바다는 가만있어도 되는데 끝없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으르렁댔습니다. 바다만은 비에 젖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상념이 밀려오고 밀려가듯 수없는 고뇌가 생멸(生滅)하듯 모래사장에 앉아 그 파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나 바라보았을까요?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혼자 생각이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었습니다.
--- p.345
혹시 그를 만난다면 당신의 아내, 한지영을 절대 모독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거센 세파와 운명으로 인해 부부의 연이 혹시 끊긴다 하더라도 7년을 가슴 속에서 기다렸던 그 여자를 당신은 추억해야 한다고 일러주고 싶습니다. 타인의 인생에서 주로 저속한 것만을 찾아 씹어보려는 세상 사람들의 그런 잣대를 들이대지 말기 바란다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당신의 아내는 고상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고 나는 진심으로 증언해주고 싶습니다.
세월이 흘러 우리의 요동쳤던 감정이 모두 가라앉고 미혹과 욕망이 빛바랜 사진첩처럼 남는 그런 시절이 온다면 말입니다.
--- p.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