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경험했던 세기의 맥락에서 문명이라는 관념은 한동안 일종의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냉전의 종식은 문명이라는 용어-그리고 그것의 복수 형태로서의 문명들-의 부활을 가져왔다. 사회과학과 행동과학에서 광범위한 사건들과 쟁점들을 기술하고 설명하는 도구로서 말이다. 이러한 사태는 정치학과 국제 관계론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사상적 전환의 촉매제는 많은 부분 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의 도발적인 논문과 저서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 식으로 문명의 충돌이라는 테제를 발전시켰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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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세계를 위한 봉사라는 이러한 소명이 슈바이처의 문명철학의 핵심에 놓여 있는데, 이는 사실상 또한 윤리에 대한 그의 해석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가 생명에 대한 경외(Ehrfurcht vor dem Leben)라고 칭한 것과도 일치한다. 생명에 대한 경외는 우리에게 하나의 “세계관”, 즉 남을 배려하고 생존권 및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무한 책임”의 윤리를 넓혀 나가는 데 기여하는 세계관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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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정치와 훨씬 가깝다. 그런데 결국 정치는 아마 좀 더 커다란 규모로 행해지는 일종의 상업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또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더욱이 정치란 전쟁이 발생해 가는 자궁이다. 여기에서 이미 전쟁의 윤곽은 숨겨진 기본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는 마치 생명체의 특징이 그것의 배아 속에 들어 있는 것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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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우리는 전쟁 없는 문명을 가질 수 있는가?” 그의 대답은 “명백한 ‘긍정’”이지만, 이는 우리가 전쟁을 일으키는 문명의 본질적 성향과 또한 그것의 권위주의적, 이기적, 강제적 본성을 극복할 수 있는 한에서 그런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토인비, 소로킨, 라이트와 의견을 같이하면서 자기 파괴의 문제에 대한 윤리적 해결을 요청한다. 이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인간들의 관계가 좀 더 평등주의적, 이타적, 온정적이 되도록 문명을 재구축함으로써 전쟁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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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에게 상업과 평화 간의 연결고리는 “상업의 정신”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것은 “전쟁과 양립불가능하며, 조만간 그러한 정신은 모든 국가를 장악하게 된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여타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돈의 힘이야말로 국가 권력 아래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권력들(수단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믿을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업이 계약에 참여하는 어느 쪽을 위해서도 유익하다고 생각된다면, 지속적인 경제적 번영이라는 명목으로, “국가들은 그 어떤 도덕적 욕구 없이도 고귀한 평화를 촉진시키고, - 전쟁 발발의 위협이 있는 곳이 어디든지 간에 - 중재를 통해 전쟁을 막지 않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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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하르트는 그 본질에서 보아 “전쟁과 문명은 - 어떤 것이 먼저 발생했건 간에 - 이를테면 긍정적인 피드백 회로에서 서로를 촉진시켜 한쪽이 활발해지면 다른 쪽도 역시 활발해지고, 한쪽이 축소되면 다른 쪽도 역시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동시적인 문명화의 악순환이 “더욱 발전된 사회일수록 더 많은 전쟁을 벌였다”는 에크하르트의 “변증법적인 전쟁 진화론”의 기초를 이룬다.
--- p.85
테러리즘에 대한 전 세계적 전쟁을 수행하는 쪽도 자신들의 잔혹행위들을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Abu Ghraib) 교도소에서의 부끄러운 사건처럼 몇 안 되는 불량한 부대에 의해 저질러진 고립된 사건들인 것으로 정당화하거나 해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어쨌든 일어났고, 그런 잔혹행위들은 계속 일어나거나 밝혀지고 있다. 또한 널리 퍼진 “부수적 피해”와 같은 많은 다른 불미스러운 사건과 경우들이 있어 왔다. 그렇기에 고립된 잔혹행위의 사건들 이상의 어떤 것이 있음을 암시하는 충분히 많은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장되어야 할 요점은 바로 그 한쪽인 테러리스트들이 페어플레이의 인정된 규칙들을 포기하는 선택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분쟁의 다른 쪽도 같은 식의 행동을 하고, 이들 역시 전쟁의 “좀 더 잔인하고도” 무차별적인 수단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 p.148
너무도 자주 적대세력들은 서로의 적을 비인간화한다. 예컨대 덕과 기사도를 결여한 저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인들은 물질적으로 도덕적으로 인간의 도리를 벗어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식으로 낙인찍는 일은 이른바 문명화된 쪽이 자신들이 혐오한다고 주장하며 또한 바로 문명이라는 관념에 배치된다고 주장하는 “좀 더 잔인한” 수단에 호소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 p.149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의 출간 25주년을 기념하는 판의 서론에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지어낸 것에 불과한 문명의 충돌이라는 현상보다, 서로 겹치고, 서로 차용하며 그 어떤 축약되거나 불확실한 이해가 허용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흥미로운 방식으로 공존하는 문화들이 함께 천천히 작동하는 모습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 p.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