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은 작품을 통해 세상이 깜짝 놀랄 무림 고수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생각나는 대로 꼽아보면, 무학의 일대종사들로 홍칠공洪七公·황약사黃藥師·구양봉歐陽鋒·일등대사一燈大師·주백통周伯通·금륜법왕金輪法王·장삼풍張三?·풍청양風淸揚·임아행任我行 등이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곽정郭靖·양과楊過·장무기張無忌·영호충令狐?·단예段譽·허죽虛竹 등의 수많은 고난과 우여곡절, 그리고 기연의 만남은 생사의 문턱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기묘함을 발한다. 주인공이 계속 괴이한 경험과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에 예측 불허의 스토리 전개에 따라 독자의 흥미는 점점 고조된다. 독자들은 잔뜩 긴장하며 내용에 혼을 빼앗겨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게 된다. 곽정의 과묵하면서도 진실한 성품, 양과의 깊은 정과 소탈함, 장무기의 정견定見 없는 마음, 영호충의 호방함과 지혜, 단예의 치정癡情, 허죽의 솔직함 등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 p.59-60
세계적으로 이름난 수학자 화라경華羅庚 선생은 무협소설을 ‘어른들의 동화’라 불렀다. 일리 있는 말이다. 동화는 이야기의 변화가 크고, 신기한 소재를 다루며, 자연물을 의인화하는 수법을 이용하여 어린이의 심리와 기호에 조응한다. 동화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어른들의 동화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다. 무협소설은 신기한 스토리와 풍부한 상상 그리고 놀라운 과장을 통해 수많은 어른들을 책 속으로 끌어들인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무공의 수준을 놓고 볼 때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접근하지 못할 불가사의한 경지로 과장되어 있지만, 한편으론 이상하리만큼 모두가 보통 사람의 감정과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서 독자들은 거부감 없이 쉽게 받아들인다. --- p.78-79
중국 무협소설에는 걸출한 여협이 많이 등장한다. 서양에는 기본적으로 중국처럼 성숙한 협녀상은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갖다 붙일 만한 인물이라면 영국의 침략에 대항해 싸운 프랑스의 잔 다르크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잔 다르크는 ‘성녀’로 불린다. 물론 영국에서는 오랫동안 그녀를 마녀라고 여겼다. 심지어는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에도 그렇게 묘사되어 있다. 성녀가 되었든 마녀가 되었든 분명한 것은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서양 기사도소설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예쁘고 연약하며 신분이 높은 처녀이지, 칼이나 검 따위는 절대 휘두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까닭은 서양의 문화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기독교가 미처 유럽을 지배하기 전 서구 세계는 여성을 생육번식의 상징으로 보아 신성한 존재로 여겼다. 여협의 모습이라고 해봐야, 맨손의 여자가 전쟁터에 나타나 쌍방의 화해를 호소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자들의 힘은 바로 그들이 여성이라는 점에 있었다.
중국에서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오랜 옛날 ‘巫(무당)’, ‘舞(춤)’, ‘武(무력)’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무당은 당연히 여자였다. 굴원屈原은 『구가九歌』에서 무녀가 춤을 추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뒷날 춤은 다시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로 나누어졌다. 당나라 때 공손대낭公孫大娘의 무검기舞劍器는 일종의 무검이었다. 이런 역사적 연원이 있기 때문에 중국 여자들이 무에 익숙한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중국 부녀들은 지금까지 서양 여성처럼 신격화라는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무협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은 그 무엇이 아닌 사람 자체이고, 그것도 피와 살이 있고 애정과 원한이 있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다. 서양 ‘무협’소설에 등장하는 연약하고 섬세하며 순결하다 못해 성스러운 빛이 늘 머리 위에 감도는 여주인공과 비교하자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중국 협녀상이 한결 넉넉하다. --- p.107-108
양우생은 무협소설에 ‘무’와 ‘협’이 있다고 한다. ‘무’는 일종의 수단이며 ‘협’은 목적이다. 무력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협의俠義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협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무는 부차적인 것이다. 무공은 전혀 없어도 상관없지만 협이 없어서는 안 된다. 양우생의 이러한 견해에 따른다면 『규염객전』은 ‘협은 있되 무는 없는’ 무협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최근의 협기俠氣는 적고 비기匪氣만 충만하여 그저 자극적인 것만 추구하는, 무는 있으나 협은 찾아볼 수 없는 소설들과는 큰 차이가 있다. 혹자는 무는 있으나 협은 없는 이런 소설을 다음과 같은 하나의 공식으로 귀결지어버린다.
1. 정신상태가 불건전한 인물이 남보다 잘난 영웅이 되기 위해, 2. 갖은 굴욕을 견디며 무공을 닦는다. 3. 그런 다음 그는 사방으로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결투를 신청하고, 4. 만나는 사람마다 마구 죽여버린다. 5. 동시에 수많은 여자를 유혹하여 무절제한 관계를 맺는다. 6. 그러다 보니 애정 싸움과 무예 대결에서 늘 좌절을 맛본다. 7. 그의 정신적인 병폐는 더욱 심해지고, 8. 그에 따라 무공도 더 지독하게 연마한다. 9. 그의 손에 죽는 자는 더욱더 늘어나고, 피비린내가 갈수록 진해진다!
위와 같은 공식에 따라 ‘제조’된 무협은 살인광과 색골의 전형이 된다. 이런 식의 무협소설은 선정적이고 폭력적이어서 읽으면 읽을수록 자극적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정의와 협기가 부재하기 때문에 아무리 자극적이라도 소금물로 갈증을 달래는 것과 같이 항상 저질이란 평가를 면치 못한다. --- p.121-122
『소오강호』에 등장하는 일월신교日月神敎의 교주 임아행任我行의 이름은 글자 그대로 ‘내 마음대로 한다’는 뜻으로, 그 이름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 그는 무공이 고강할 뿐만 아니라 그 수단도 악랄하여 행동에 거침이 없다. 심지어는 무림의 태두인 소림·무당 양파조차도 안중에 두지 않는, 무림인들이 그 이름만 듣고도 치를 떠는 대마두와 같은 인물이다. 임아행의 교주 자리를 빼앗은 동방불패東方不敗는 이름만 들어보아도 무공이 절세임을 알 수 있다. 이자는 무림의 비학인 『규화보전葵花寶典』을 익혀 최고의 무공을 뽐낸다. 그 외 수중에는 늘 수를 놓는 작은 바늘이 있는데, 이를 가지고 신기에 가까울 정도의 무공을 발휘한다. 임아행이 서호 매장의 지하 감옥에서 탈출한 후 흑목애黑木崖에서 동방불패에게 복수를 하는 데, 영호충·향문천·상관운上官雲이 임아행과 힘을 합쳐 동방불패를 간신히 물리칠 수 있었다. 만약 일대일로 결투를 벌였더라면 동방불패는 결코 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임아행과 동방불패라는 이름은 두 사람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다. 한 사람은 유아독존형이고 또 한 사람은 안하무인형으로 둘 다 세상을 벌벌 떨게 하는 무공을 지닌 괴물들이다.
--- p.192-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