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랐다. 이상설의 학문은 신구학문을 겸수한 것이었으며 또 학문 분야도 광범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상설은 전통 학문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유학을 공부했는데, 이미 20세를 넘으면서부터는 유학계에서 큰 학자로 칭송되기도 하였다. 고향의 친구이며 인척인 위당 안숙의 『위당건연록』에 “이상설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민첩하여 재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며, 20세 전후에는 문행남하울관(文行南下鬱冠)의 칭호를 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장. 출생과 학문 연구' 중에서
이상설이 처음으로 관계에 진출한 것은 그가 25세 때이던 1894년의 일이었다. 그는 이승만, 김구와 함께 응시한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인 갑오문과 병과에 응시하여 급제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이상설은 영재 이건창과 위당 안숙 그리고 의당 박세화 등으로부터 축하와 칭송을 받았다. 이후 이상설은 한림학사에 제수되고 이어 세자의 시독관이 되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는 시대를 잘못 맞이하고 있었다. 이상설의 문명과 큰 포부를 실천하기에 매우 어려운 시국을 맞이했던 것이다.
'2장. 과거 급제와 관직 생활' 중에서
정식으로 관직을 벗어던진 이상설은 을사늑약 폐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시기 양반 유생들의 상소운동, 민영환 등의 분사, 을사오적 척살 시도, 의병운동 등이 다양하게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이상설의 활동은 단연 돋보였다. 이상설은 을사늑약 체결 직후 동료인 여규형, 이용직 등과 함께 여러 관리들과 유생들을 참여시켜 연명상소를 준비하였다. 이를 위해 가평의 향리에 머물고 있던 원임대신 조병세를 모셔 수두(상소문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이에 앞서 민영환을 소두로 하여 복합상소를 올리게 한 것도 이상설이었다.
'3장. 구국운동에 앞장서다' 중에서
전덕기와 이회영이 구상한 방안을 내시 안호영을 통해 황제에게 전하는 한편, 특사로 적합한 인물을 골라 추천하였다. 특사의 정사에는 이상설, 부사는 이준과 이위종을 천거하였다. 이준은 한성재판소 검사보로서 조신들의 비행을 파헤치다 면직되고,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평의장으로 활동하고 이어서 독립협회 간부로 일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이준은 러일전쟁 뒤 일제의 한국 침략이 노골화하자 보안회를 조직하여 황무지 개척권을 강탈하려던 일제의 기도를 저지했으며, 일진회에 대항하여 공진회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고 을사오적을 규탄하다가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서 헌정연구회를 조직한 데 이이 이를 대한자강회로 발전시키는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이위종은 러시아 주재 한국공사 이범진의 둘째 아들로서 러시아 주재 한국공사관 참사관을 지냈다. 러시아에서 영어, 불어, 러시아어를 익힌 까닭에 헤이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합한 인물이었다.
'4장.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선정되다' 중에서
결국 이상설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일제와 열강들의 온갖 권모술수로 대한제국 특사단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 1907년 7월 19일 이상설은 이위종, 윤병구, 송헌주 등과 함께 네델란드를 떠나 영국에서 3일간 머문 다음 8월 1일 미국 뉴욕에 도착하였다. 이상설과 이위종 이들 대한제국의 특사들에게는 또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만국평화회의에서 성과가 없을 경우 구미 열강을 차례로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한국이 일제로부터 침략을 받고 있는 사실과 을사늑약의 강요, 고종황제가 이 조약을 재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열강의 지원과 한국은 자주독립을 위해 끝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설명’하라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6장. 구미를 순방하며 활동을 펼침' 중에서
이상설은 국권회복운동의 해외 근거지로 연해주 지역을 선택하고는 미주 교포들의 소명을 받고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당시 해외 독립운동 현황은 1908년 9월 수청지방에 공럽협회의 지방회가 설립된 데 이어 1909년 1월에는 해삼위에도 지회가 설립된 상태였다. 공럽협회와 국민회가 통합하여 조직이 확대하면서 미주 한인 사회가 이상설과 정재관을 특파하여 이를 더욱 강화하도록 조처한 것이다. 이상설은 구미 열강을 숩ㄴ방하는 동안 연해주 한인 사회의 지도자들과 긴밀히 연락을 취해 조직의 활성화와 국권회복운동의 방략 등을 논의하였다.
'7장. 연해주에서 활동을 시작하다' 중에서
이상설은 봉밀산 일대에서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유인석, 최재형, 이범운 등 교민 사회의 지도자들과 접촉하면서 의병단체의 통합화 항일투쟁의 방략을 상의하였다. 이상설은 이러한 활동을 벌이던 와중에 청년의병장 안중근과도 만나게 되었다. 우국열정에 찬 두 사람은 곧 연령을 뚜어넘어 동지 관계가 되었고 날밤을 세워 국권회복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안중근은 한말 계몽운동계열의 근대화론에 영향을 받아 계몽운동에 참여하면서도 일제에 대한 폭력투쟁, 즉 의병활동으로 활동의 영역을 넓혀갔다.
'7장. 연해주에서 활동을 시작하다' 중에서
이상설은 1911년 유배지 니콜리스크에서 풀려나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아무리 시대상황이 변하고 정세가 바뀌어도, 포기할 수 없는 그의 사명이고 함께할 운명은 나라의 국권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한편,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일제와 한패가 되었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국제 사회의 어처구니없는 규칙대로 된 것이었다. 이상설은 러시아 당국의 냉대와 탄압 속에서도 국권회복의 새로운 방략을 강구하였다. 그것이 권업회의 발족이다. 1911년 5월 20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57명의 민족주의자들이 모여 새로운 독립운동의 기관으로 권업회를 창설하였다.
'9장. 권업회 창설과 권업신문 발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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