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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삶창시선-50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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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12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80g | 120*188*20mm
ISBN13 9788966550913
ISBN10 896655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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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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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쟁쟁한 팔월 한낮
조천읍 선흘리 산 26번지 목시물굴에 들었다가
한 사나흘 족히 앓았습니다

들짐승조차 제 몸을 뒤집어야 할 만큼
좁디좁은 입구
키를 낮추고 몸을 비틀며
낮은 포복으로 엉금엉금 기어간 탓에 생긴
통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해 겨울
좁은 굴속의 한기寒氣보다 더 차가운 공포에
시퍼렇게 질리다 끝내 윤기 잃고 시들어 간
이 빠진 사기그릇 몇 점
녹슨 솥뚜껑과
시절 모르는 아이의 발에서 벗겨진 하얀 고무신

그 앞에서라면
당신도 아마
오랫동안
숨이 막혔을 것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처럼
사나흘 족히 앓아누웠을 것입니다
---「통점」중에서


세 살에 아비 잃은 소년은
아비보다 더 나이 든 사내가 되었습니다

유품이라고 남겨진
새끼손가락 같은 상아 도장 하나
그 세월 긴 인연을 벗겨내기에
한없이 가엽고 가벼우나
마침내 사내는
세월을 거슬러 돌아와
소년에게 미안하다 합니다

먼 길을 돌아 걸어온 순례의 끝
죽음의 그늘을 벗기는
꽃이 피고 봄이 오고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간절한 노래는 다시 시작되나
나는 아직도 당신과 작별하지 못했습니다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중에서


아들이 아버지가 된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아주 잠깐,
천지간이 기우뚱거렸다

폭설에 묻힌 산허리 어디쯤에
꼼지락거리는
복수초 꽃잎 한 점
꽁꽁 언 땅을 가만히 녹이고 있었으리

햇살 톡톡 터트리며 오시는 봄을 따라온
새 생명의 이름
너의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생명」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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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이종형 시인의 소개로 한라산에서 따 왔다는 고사리에다 제주 돼지를 썰어 넣어 볶은 안주를 먹은 적 있다. 이 시집에는 그걸 입에 넣고 물컹거리는 비계를 씹을 때의 서러운 느낌이 그대로 있다. 누대에 걸쳐 쌓여온 시간의 냄새, 역사의 뒤통수를 후려치던 순간의 비명, 그리고 먼 곳에서 무겁게 들려오는 무적(霧笛)이 있다. 시집 전체에 통각점(痛覺點)을 기막히게 짚는 의원의 손길이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겨울 숲에서 상처를 참고 견디는 노루의 눈망울이 어려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자신에게 모질지 못해서, 남에게 순하기만 해서, 그래서 슬픈.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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