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literature)’의 어원은 세계를 읽고 다시 또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책만이 텍스트인가? 아니다. 사람들의 몸뚱이와 대지와 물과 우주와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이 텍스트다. 어디에다 무엇으로 쓸 것인가? 종이와 컴퓨터 속에? 이 기록들만을 문학이라 부른다면,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을 빼면 4%밖에 안 되는 원자가 우주의 모든 것이라 주장하는 것과 같다. 안 보여도 존재하는, 말 안 하고 글 안 써도 실재하는 “전체가 기억인” 내 몸, “시간을 담아내는 호수”에 우리는 써야 한다. 내 몸의 혁명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생성하는 종이다. 그것은 바로 시간 혁명이며, 광야의 길과 인간의 시간을 결합하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좁은 방에 갇힌 ‘나’만의 속삭임을 지나, 저 넓은 지평선을 향해 허리를 펴고 두 다리를 대지에 굳건히 디디고 있는, 혁명의 언어는 기쁨과 화해와 생명과 야생의 노래이기도 하겠다. 저 평등한 수평선을
가득 채운 출렁거리는 생명들의 말, 물속의 말, 온 세계에 촛불처럼 타오르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두운 숲속의 나무 한 그루와 풀 한 포기, 그리고 그들이 시시각각 새기고 있는 시.
---「백무산 : 시간을 혁명하다」중에서
모든 존재는 자기 안에 있는 것만 본다. 그림자 형태로라도 존재하지 않거나, 경험이 부재하거나 사유해본 적 없는 것은 모두 비밀 속에 갇힌 난해 부호다. 잘난 척인가? 아니다. 진실성이다. 고도의 핍진함과 사실성이 난해라는 이름으로 당대에 죄 없이 배척당하고 미움 받는 이유는, 사방팔방 돌아다녀도 속살은 못 만지고 돌아오는 독자 혹은 타자의 게으름과 안이함 때문이다. 희미한 한 점의 어떤 물질화된 사유가 언어를 통해 육박해오면 그 점은 점점 선이 되고 도형이 된다. ‘환영’ 같지만 그 속엔 “깊이의 실제”가 있다. “읽으면 그대 속으로 그대가 있는” 이 속으로, 위로와 편안함과 달콤함과 행복만이 문학과 예술과 삶의 존재 이유라면 구태여 들어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화석과 먼지와 짐승과 인간과 예술이 한 몸, 한 점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하나를 잠시 살아보다 가는 것이 생이라면 이 “빛, 색, 선, 우주의 공중파” 속, 바늘구멍만 한 점을 통과해야 하지 않겠나. “읽으면 그대 속으로 그대가 있는/ 속, 환영의 깊이의 실제인” 점, 뿐 속으로.(「점, 뿐, 속」)
---「김정환 : 세계의 시신을 떠메고 나아가는 시」중에서
노동자들 언저리에서 청춘을 다 보냈지만 그는 촌놈이었던 겁니다. 삶이 가파른 빙벽만큼이나 고독하고 아찔하고 춥고 외로웠을 때 그는 의식이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새로운 해방의 원초적 모습을 발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만 하고 살기에도 버거운데, 그즈음 공장 안에선 노조를 깨기 위한 전략 중 하나로 자본가의 사주에 의한 노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괴롭고 아픈 건, 한솥밥 먹는 사람들과의 대립이자 분열이자 불신일 겁니다. 적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내 옆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것이 『김미순傳』의 동기가 되었을 겁니다.
저는 공단 프락치가 된 여성 노동자의 비극적인 운명을 담은 이 장시는 자꾸 피하고 싶었습니다. 읽다 말다 읽다 말다 하는 저 자신을 보며 노동자들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너무 가까이 있는 것들은 멀리하려는 심리를 지니나 봅니다. 마치 노동자들이 노동자 글들을 더 멀리하고 대중적인 연애시나 고상한 에세이집을 사서 읽는 것처럼 말이죠. 지긋지긋하니까요. 싸움과 가난과 고통이 가득한 자신의 이야기를 책에서조차 들춰 본다는 일은.
---「박영근 : 행려의 시, 결핍의 시, 흰 빛의 시」중에서
노동할 수 없는 채 살아가야 하는 비극과,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노동을 해야 하는 희비극 사이에, 발이 묶여 있는 현대인에게 이 시는(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새로운 지평을 선사합니다. 이 시에는 노동과 비노동 구분이 없고, 고용과 은퇴의 개념도 없죠. 젊음이 끝나기도 전에 노인 취급을 받는 작금의 추세는 4차 산업혁명으로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이 풍요한 지구에 만연된 빈곤은 여전히 삶의 질을 가장 강력하게 위협하는 현실이지만, 지구상에서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더불어 절제된 소유에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절대빈곤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이런 반백수의 삶, 즉 창조적 실업이야말로 우리가 가야할 가장 ‘오래된 미래’일지도 모릅니다.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최악의 ‘도덕적 질병’인 가난에 대한 공포가 적어도 여기엔 없으니까요.
---「칠곡 할매들 : 시 안 쓰는 시인들」중에서
이반 일리치는 강자의 흥망성쇠를 주로 기록한, 거의 전쟁사가 되어버린 역사 서술 대신, 일상의 세밀한 세속사가 진정으로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강자가 되어보지 못한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자들 또한 노예와 농민, 소수자, 소외 계층의 저항과 폭동, 반란의 역사를 주로 기술합니다. 더 근래에 와서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이나 성차별에 맞서는 여성의 싸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역사도 전쟁과 투쟁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으며, “약자가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상대와 충돌하는 모습을 통해 약자를 그리는 것”일 뿐, 저항의 이야기를 나열하면서 과거의 평화에 대해서는 넌지시 서술할 뿐입니다. 「정님이」나 「후꾸도」나 「일만이 형」 같은 시를 읽게 되면, 이 모든 인류사에서 민중이란 구제와 구원의 대상이 아닐뿐더러, 교화하거나 계몽하거나 부추겨, 무슨 무슨 전선에 동원할 대상이 전혀 아님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이시영 :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보아」중에서
도종환 시인은 초월을 꿈꾸지 않는다. 나쁜 것과 미움의 위험성이 자신에게 있다는 걸 아는 자만이 그것을 잊거나 없앨 수 있는 완전한 세계로 떠나고픈 충동을 느낀다. 어쩌다 힘들어서 잠깐 들어갔더라도 그는 다시 저잣거리로, 지금 바로 그의 처지로 돌아온다. 어느 시대나 악한 것은 강한 욕망을 낳고 그 욕망은 권세를 갖는다. 그래서 무욕의 선한 인간이 권좌를 차지하는 일은 역사에는 없다고 보아도 좋다. 그런 세상에 염증을 내어 그런 꿈조차도 폐기하고 싶어지지만, 그래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나도 역사를 짝사랑할 만큼 했어’, 하고 돌아서지만, 시인은 무용(無用)의 꿈을 앓는다. 그것은 꿈이 권력의 폭력적 질서를 없앨 수는 없지만, 적어도 줄일 수는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겠다. 꿈이 그를 사랑하고 있기에, 상처만 남길지언정 그 꿈이 저와 같은 인간의 몸을 빌어 육화시키고자 하기에.
---「도종환 : 다시 길 위에서」중에서
한 시대의 희생자요 피해자였지만, 피해 의식도 없이 엄청난 강도의 노동과 생활을 묵묵히 견디는 그들이야말로 말 없는 영웅들이었는지 모릅니다. 그 뒤 오랫동안 전 미싱사였습니다. 때로 굽힐 수도 펼 수도 없는 허리를 비틀며 미싱 앞에서 내가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고 때로 시를 끄적대기도 했죠. 임금 체불에 이어 위장폐업하게 된 공장에서 몇 달간 물미역과 오이짠지로 점심 한 끼 얻어먹으며 일을 하는 기숙사 친구들과 호박과 감자와 밀가루를 가져다 부침개와 수제비를 해먹으며 공장을 지키고 노동청을 걸어 다녔어요. 그런 제게 특별히 [공장의 불빛]을 들을 때면 먹먹해집니다. 수없이 들어도 소름끼치는 “돈 벌어 돈만 벌어”를 들을 때나(이 노래는 꼭 젓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리면서 불러서 더 겁이 났습니다), “두어라 가자 몹쓸 세상”을 들을 때 저는 바다 밑으로 잠겨 부서진 공장 잔해 사이를 헤엄칩니다. 김민기는 아래서(under) 함께 서 있었던(stand)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해(understand)한 거죠. 가난과 날마다 계속되는 노동과 “밤바람 찬 새벽에 교대”하러 가는 여공들의 무섬증과 피로와 병들어가는 몸을.
---「김민기 : 우리 시대의 가객, 김민기의 노래에 부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