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개의 인골을 발굴하고 수백 개의 인골을 본 나도 서로 부둥켜안은 자세로 묻혀 있는 어머니와 아들 앞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저세상에서까지 자식을 보듬어 안은 어머니와 그 품의 자식, 그리고 그들의 손을 꼭 쥐게 해서 저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가족의 슬픔과 고통이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전해졌기 때문이다. (…)
진시황의 무덤처럼 권력을 동원해서 거대한 고분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무덤은 먼저 떠나간 사람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무덤 속 보물도 사실은 먼저 떠난 사람이 저승에서도 편히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남은 사람들이 넣어 준 선물이었다.
--- p.17~18
불꽃처럼 살다가 4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난 프레디 머큐리의 유해는 독실한 조로아스터교인인 가족들에 의해 조로아스터교 의식에 따라 안장되었다. 동서양을 이었던 실크로드의 후예답게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은 동서양 구분 없이 모든 이의 사랑을 받았으니, 실크로드가 낳은 최고의 록 스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 p.24
유명한 추리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는 나이 마흔에 열네 살 연하였던 고고학자 맥스 맬로원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 범상치 않은 그들의 결혼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부부는 ‘고고학자는 오래될수록 흥미를 더 느끼니 여자에겐 최고의 남편감’이라는 재치 있는 답변을 내놓았다. 실제로 크리스티가 85세로 죽을 때까지 이 부부는 금실 좋게 살았다. 게다가 서로의 일에도 큰 도움을 주었으니, 『메소포타미아 살인사건』을 비롯한 그녀의 여러 추리소설에 고고학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p.42
한국에서 숟가락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용되었다. 서울 암사동 신석기 시대 유적지의 8호 주거지에서 흙을 빚어서 구운 흙수저가 출토되었다. (…)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이렇게 이른 시기의 흙수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가히 한국을 숟가락의 종주국이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
고려·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우리의 숟가락 사랑은 여전해서 무덤에 꼭 들어가는 물건 중 하나였다. 저승으로 먼 길 가는 고인에게 마지막 밥 한 그릇 드리고 싶은 사랑이 담겨 있는 유물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숟가락은 서로를 아껴 주는 마음을 상징했다. 타지에 간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님들은 밥숟가락이나 제대로 뜨냐며 걱정을 하곤 했으니, 숟가락은 가족의 사랑과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을 상징했다.
하지만 서로에게 떠먹여 주던 숟가락이 이제는 바뀔 수 없는 계급의 상징이 되었다. 얼마나 우리 사회가 힘들어졌는지 실감하게 된다.
--- p. 49~50
황금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영생 불변을 의미하여 예부터 죽은 자의 명복을 기원하는 데 쓰여 왔다. 하지만 영생 불변한 것은 황금뿐,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황금 마스크를 썼던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찬란한 황금 유물들을 보면 볼수록 역설적으로 우리 인생이 참 덧없이 느껴진다.
--- p.67
카펫은 유목민이 죽은 다음에는 죽은 사람의 집인 무덤에도 똑같이 장식됐다. 파지릭 문화에서는 살아생전 유르트(천막)를 장식했던 카펫이 그 주인이 죽으면 무덤 바닥과 벽에도 똑같이 깔렸다. (…)
외형적인 주거 생활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유목민의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것이 있으니, 이사할 때 카펫은 아주 정성스럽고 조심스럽게 날을 정해 놓고 옮기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이사할 때 손 없는 날을 따지듯이 1년에 한두 번밖에 없는 날에 카펫을 옮긴다고 한다.
--- p.89~90
흉노에서 시작된 꼬치구이는 한나라 때 중국 북방에서만 유행했지만, 이것이 전 중국으로 확대된 때는 고구려가 발흥하던 시기로, 고구려의 꼬치구이가 중국 전역에서 크게 히트를 쳤다. 심지어 서진에서는 고구려의 꼬치구이로 나라가 망한다는 상소문마저 등장할 정도였다(실제로 그 상소문이 나오고 10년 뒤에 서진은 망했다). 고구려의 꼬치구이인 맥적은 고기에 된장 양념을 해서 특유의 노린내를 없애 정착 농경민의 입에도 맞는 음식으로 승화시킨 것이니, 진정한 고대 음식의 ‘한류’를 일구어 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 p.94~95
칼 라이더가 가지고 온 에스키모의 티팬티 2점이 코펜하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끈에는 술이 달려 있다. 즉 그냥 속옷이 아니라 이 팬티만 걸치고 집 안에서 활동했다는 뜻이다. 장식이 달려 있어 일종의 의식용이었던 것 같다. (…)
사실 티팬티는 한국에서만 통하는 명칭으로, 영어로는 G-string 또는 C-string이라고 하고, 그냥 간단하게 string(끈팬티)이라고도 한다. 요즘이야 속옷에 많이 관대해진 사회 분위기 덕에 길거리 속옷 가게와 쇼윈도에서도 볼 수 있지만, 과거에는 쉽게 보기 어려운 물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까지의 자료로 본다면 이런 선정적인 티팬티의 기원이 19세기 말 그린란드가 되는 셈이다.
--- p.99~100
찬란한 황금에 혹하지 않고 사소한 토기의 조그마한 변화에서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고고학은 소박하지만 인간을 생각하고 연구하는 학문이다. 실제 고고학을 전공하게 되면 수많은 유물들을 일일이 씻고 기록한 후에 비슷한 것들끼리 모으는 등 엄청난 노력과 끈기가 필요한 작업들이 이어진다. 고고학을 전공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찾아오면 나는 가장 먼저 발굴 현장과 유물을 정리하는 연구실로 보낸다.
고고학은 신나는 모험이 아니라 퍼즐을 이어붙이는 끈기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소한 단서를 찾는 형사들처럼 고고학자들은 흙구덩이를 비롯한 수많은 발굴 현장에서 토기편들을 찾아내고 있다.
--- p.138~139
고고학이 지닌 경제 규모는 매우 크다. 우리나라의 경우 매년 건설에 따른 구제발굴의 총액이 수천억대에 이른다. 앞으로 남북통일이 이뤄져 북한에 엄청난 건설 사업이 필요하게 된다면 수십 년간 수조원대의 발굴 사업이 매년 진행될 수도 있다. 한참 경제개발 중인 러시아, 중국, 중앙아시아 등 유라시아의 신흥경제대국들에서도 문화재 발굴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 굳이 한국이 아니라도 세계고고학에서 AI가 도입될 날은 머지않았다.
--- p.153
알타이와 몽골의 초원 고고학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엉뚱하게도 김용의 무협지 『사조영웅전』, 『신조협려』의 캐릭터로 유명한, 장춘진인(長春眞人)이라고도 불렸던 도사 구처기였다. 그는 산둥성 일대에서 활동하던 도교의 도사로서 1219~1222년 사이에 칭기즈칸을 만나기 위해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를 거쳐 아프가니스탄 근처까지 여행하고 그 기록을 남겼고, 그중에는 몽골과 알타이의 역사와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기록도 있다.
--- p.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