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신부님.” 그가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한다. “기분 같아서는 지금 당신을 죽여버리고 싶습니다.”
신부가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죠.”
그가 남자의 떨리는 손에서 칼을 거둔다. 그리고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남자가 잠시 움찔하지만, 몸을 뒤로 빼지는 않는다.
“뭐가 진실인가요?”
남자가 중얼거린다.
“이것.”
작은 신부가 대답과 함께 남자의 가슴 깊숙이 칼날을 꽂아 넣는다. 칼날은 매우 날카롭다. 쉽게 남자의 셔츠를 뚫고 들어가 갈빗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서는 곧 심장 속으로 반 뼘쯤 되게 깊숙이 가라앉는다. 신부가 남자를 가슴 앞으로 끌어당겨 그의 이마에 키스한다. 신이시여, 이자를 용서하시고 평화를 내려주소서. --- p.20~21
“인간이 하는 또 하나의 일은 글을 배우는 거야.” 내가 말했다. “그래야 읽을 거 아니야. 그래야 뭔가를 배우지. 역사나 수학, 과학 같은 건 물론이고, 예술, 문화, 종교,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는지, 심지어는 왜 어떤 게 존재하는지 같은 걸 배울 수 있거든.”
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불청객처럼 그 이미지가 떠오른 탓이었다. 세 번째 파동이 일어나고 나서 빨간색 손수레에 책을 잔뜩 실어 나르던 아빠의 모습, 성가신 외계인 문제가 처리되고 나면 어떻게 지식을 보존하고 문명을 재건해야 할지 열변을 토하던 아빠의 모습이었다. 나 참,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안쓰럽던지. 머리는 벗어지고, 어깨도 굽은 한 남자가 폐허가 된 도서관 잔해를 뒤져 모든 책을 수레에 가득 실어 끌며 외딴 거리를 터벅거리고 걸어가는 모습이라니. 다른 사람들은 약탈을 대비해 집을 보강할 자재를 모으고 통조림과 무기를 찾아 돌아다니는 동안, 아빠가 가장 현명한 행동이라고 결단 내린 것은 바로 읽을거리를 쌓아두는 것이었다.
“다시 배울 수 있잖아.” 에반이 말했다. “네가 가르쳐주면 되지.” --- p.40~41
노파가 언뜻 교활해 보일 수도 있는 시선을 흘낏 던지면서 맛을 좀 보겠느냐고 묻는다.
“시간이 없어.” 내가 말한다. “친구에게 돌아가야만 해.”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딱 5분만, 안 되겠니? 지금까지 너무 외로웠어.” 그녀가 수프를 젓는다. “한 달 전에 통조림이 다 떨어졌어. 그렇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해.” 다시 내 쪽을 흘낏거린다. 수줍은 미소와 함께. “친구를 이리로 데려와. 나한테 약도 있고, 함께 친구를 위해 기도도 할 수 있잖아. 주님은 마음이 순수한 사람은 누구라도 치유해주시거든.”
입안에는 침이 고이고 있지만, 입술은 바짝 타들어간다. 귓속이 쿵쿵 울린다. 고양이 한 마리가 내 종아리에 몸을 비빈다. 내가 나쁜 놈은 아닌 것 같다고 결론 내린 모양이다.
“좋은 생각이 아니야.” 내가 그녀에게 말한다. “여긴 안전하지 않아.”
그녀가 내게 놀란 시선을 던진다.
“안전한 곳이 어디 있기는 하고?” --- p.119~120
“그는 나를 구하러 왔어.” 내가 말한다. 벤은 내가 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니 나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둘 다 약간 놀란다. “그는 심지어 네 목숨도 구했어. 그것도 두 번이나. 내 목숨은 세 번이나 구했고.”
“벤이 옳아.” 링거가 끼어든다. “그건 자살행위야, 캐시.”
나는 눈을 부라린다. 이 빌어먹을 얘기는 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 에반 워커에게서. 내가 꼬마 동생을 찾아 죽음의 캠프 안으로 들어갈 계획을 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가 했던 말이다. 왜 나는 늘 이성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광기의 섬에 홀로 있어야만 하는 걸까? 내겐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왜 다른 모두에게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되는 걸까? 내가 하고야 말겠다고 하면, 왜 모두들 안 하는 게 좋겠다고 반박할까?
--- p.235